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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죽음이 당신에게 미치는 영향 (114)화 (114/183)

내 죽음이 당신에게 미치는 영향

114화

“나한테 하는 말이니?”

“그럼 여기 저 애한테 관심 두는 게 너 말고 누가 있는데.”

402번의 말에 좌우를 살피니 확실히 대부분 웅크리고 있거나 울거나, 잠들어 있지 창밖을 관심 있게 보고 있는 아이는 없었다.

가경은 민망함에 몇 번 헛기침하고는 402번을 바라봤다.

“넌 재랑 아는 사이야?”

“아니.”

담담한 대답에 가경은 미간을 좁혔다.

“그런데 왜 관심을 끄니 마니 하는데.”

“그럼 너는 왜 관심 두는데.”

“내가 먼저 물어봤잖아.”

가경이 인상을 찌푸리며 성을 내자, 402번은 망설임 없이 뒤돌아 벽 쪽으로 걸어갔다.

가경은 눈이 휘둥그레져서는 급하게 그녀를 따라갔다.

“왜 말을 하다 그냥 가!”

“궁금한 건 너 아니야? 나는 말 안 해 주면 그만이야.”

“…….”

그리 말하며 402번은 벽에 기대앉은 채 제 손톱을 만지작거렸다. 반듯하게 잘린 손톱이 깨끗했다.

정말 관심 없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기에 가경은 절대 그녀와 말싸움해서 자신이 이길 수 없음을 인정했다.

가경은 별수 없이 그녀의 옆에 따라 앉았다.

“그냥 저 여자애만 이 방 저 방 옮겨 다니잖아. 자유롭게 말이야. 그게 신기하기도 하고 부럽기도 하고.”

손톱을 매만지던 402번이 가경을 쳐다봤다.

“넌 저게 자유로워 보여?”

“그럼 아니야?”

“너 혹시 이 연구실에서 태어났니?”

가경은 단번에 인상을 구겼다.

“아까부터 그게 무슨 소리야. 여기서 태어난 애가 어딨어? 에스퍼로 각성시켜 준다니까 온 거지.”

402번의 말도 안 되는 소리에 울컥해 가경은 제가 숨겨 온 사실을 말했다. 그 말에 402번이 소리 내 웃었다.

“그 말에 네 발로 직접 온 거라고? 너 진짜 재미있는 애구나.”

자신의 말에 큰 소리로 웃는 402번의 모습을 보니 괜히 귀 끝이 붉어졌다.

“됐어. 너도 모르면서 아는 척이나 하고.”

그렇게 말한 뒤 자리를 피하려는 가경을 향해, 402번이 웃음을 삼키며 말을 이었다.

“저건 자유가 아니야.”

가경은 402번의 시선을 따라 창밖의 그 아이를 바라봤다.

“너도 밖에서 왔으니 우리는 자유가 뭔지 이미 알고 있잖아. 이런 좁은 철창 사이 사이를 우리보다 조금 더 넓게 돌아다닌다고 그게 어떻게 자유로운 게 되겠어.”

“…….”

“그러니까 저건 자유로운 게 아니야, 아니, 자유가 될 수 없지.”

가경은 그때부터 402번이 마음에 들었다.

여기에 있는 애들은 하나같이 울보에 바보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아이 정도라면 자신이 근사한 에스퍼가 된 후에 데리고 나가 줄 의향이 있었다.

그 이후 가경은 402번을 따랐다.

그녀를 따라 연구실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402번이 말한 가짜 자유가 뭔지 알 수 있었다.

자유롭다 여겼던 아이는 이 연구실에서 유일하게 철장을 넘나들고 이름도 있었지만 어쩐지 항상 불안하고 초조해 보였다.

그런 생각이 들쯤에는 더 이상 그 아이가 부럽지 않았다.

* * *

“아무래도 내 기억을 바탕으로 한 이야기니까 네가 듣기에 썩 좋은 이야기는 아니지?”

이야기를 마칠 무렵 내 표정을 살핀 가경이 그렇게 물었다.

나는 곧장 표정을 정돈했다. 이야기에 집중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표정이 서늘하게 굳은 모양이었다.

“아니에요, 집중하느라.”

이내 가경의 수첩에 하나와는 다르게 생긴 여자아이가 그려졌다.

부드러운 인상을 한 그녀는 아마…….

“402번.”

내 말에 가경이 나를 힐끗 보더니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수첩을 다음 페이지로 넘겼다.

그리고는 그림을 이어 나갔다. 갑작스럽게 내려앉은 침묵에 나는 입술을 축이며 입을 열었다.

“아까 마지막 기수라고 하셨죠. 그럼 가경 씨도 연구실에서 인조 각성된 에스퍼인 건가요.”

아까부터 의문스러웠던 지점이었다.

가경은 S급 감각계 에스퍼로 조각한 정제석에 에너지를 집어넣을 수 있었다.

그녀는 괴짜라고 소문났지만, 그 힘의 위력만큼은 무시하는 자가 없었다.

이천 게이트에서 몇 미터에 달하는 거리를 가이드가 혼자 걸어온 것만 봐도 그랬다.

그런데 그런 그녀가 연구실 출신이라니.

그렇다면 그건 그 연구진들이 인공적으로 S급 에스퍼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는 것을 뜻하기도 했다.

가경은 내 표정에서 그 생각을 읽었는지 한쪽 입꼬리를 올려 보이더니 단호하게 답했다.

“유감스럽게도 나는 연구실 밖으로 나온 뒤 자연 각성했어.”

그녀의 말에 옅은 안도의 한숨이 터져 나왔다.

만약 연구가 성공적이었다면, 연구실에서 일어난 게이트 브레이크를 의심하게 되는 결정적인 이유가 될 터였다.

‘하필 브레이크가 일어나 가장 먼저 강력한 피해를 본 곳이 연구실이니까.’

“내가 운이 좋았지.”

“…….”

“내 차례를 앞둔 그해 겨울, 게이트 브레이크가 일어난 거였거든.”

운이 좋았네요, 혹은 하늘이 도왔네요, 같은 말이 입 안에 고였지만 가경의 표정을 보고 있자니 그 어떤 말도 나오지 않았다.

왜냐하면, 지금껏 다큐멘터리의 내레이션을 하듯 담담한 얼굴로 말을 잇던 가경의 표정이 아주 좋지 못했기 때문이다.

“원래라면 내 차례가 돌고 브레이크가 터졌을 텐데. 뒤 차례를 양보받았거든.”

“차례를 양보받아요?”

“그래. 402번에게서 말이야.”

본격적으로 가경의 기수에 있는 아이들이 연구에 투입될 무렵, 가경은 그제야 자신이 아주 큰 착각을 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투입된 아이 중 실험장에 끌려갔다 되돌아온 아이는 손에 꼽았기 때문이었다.

하루가 멀다고 좁았던 방이 텅 비어 갔다.

공포는 밀려오는 파도처럼 강력하게 가경을 불안에 젖어 들게 했다.

가경이 말수가 줄고 밥도 잘 먹지 못하며 말라 가자, 402번이 연구진에게 가경과 제 차례를 바꿔 달라고 말했다.

그 사실을 안 가경의 마음 깊은 곳에 죄책감이 자라났지만, 결코 402번의 배려를 거절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402번이 투입된 날 게이트 브레이크가 터졌어.”

“…….”

가경이 완성한 그림은 불길에 휩싸인 연구실이었다. 가경은 볼펜의 뚜껑을 닫더니 내게 잘 보이도록 그림을 앞으로 내밀었다.

“과거 일이 잘 기억 안 난다고 하더니 아무래도 그 말은 진짜인가 보네.”

“그래 보이나요?”

“응.”

가경은 무언가를 예감한 듯 고개를 작게 끄덕이더니 말을 이었다.

“이천 게이트에 너와 함께 투입된 센터 소속 에스퍼 중 한지원 헌터가 있지?”

“…….”

“나는 네가 그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한 줄 알았어. 그런데 아무리 봐도 그건 아닌 거 같네.”

연구실과 한지원을 잇는 사람은 내가 아는 이 중엔 한 명밖에 없었다.

“설마 402번이…….”

“그래, 402번은 한영원이야.”

아까부터 맺혀 있던 식은땀이 관자놀이를 타고 흘렀다.

말없이 눈을 느리게 끔뻑이고 있자, 가경은 불타오르는 연구소 그림 아래 작은 사람의 인영 하나를 더 그려 넣었다.

시커먼 인영은 연구실 밖으로 뛰어나오는 듯한 형상이었다.

가경은 검정 볼펜을 내려놓으며 한 마디를 덧붙였다.

“연구원들이 대부분 죽고 도망간 상황 속 유일하게 카드 키를 쥐고 있던 네가 우리를 버리고 갔어. 설마 이것도 잊은 건 아니지?”

창백하게 굳은 내 표정에 가경은 웃음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너 정말 하나도 몰랐구나.”

분명 눈앞에서 말하고 있는데, 어쩐지 가경의 목소리가 자꾸만 멀어졌다.

손등으로 눈을 거칠게 비벼 봐도 눈앞의 가경이 커지고 작아지길 반복했다.

“잠깐만요…….”

“네가 이곤을 따라 센터에 입사했다는 소문을 들었을 때부터 이상하다고는 생각했어. 그럴 리가 없잖아? 너를 가장 믿어서 배신감이 클 사람이 바로…….”

툭-

“…….”

가경의 말을 전부 듣기도 전에 나는 책상 위로 고개를 떨궜다.

* * *

가경은 식은땀을 흘리며 책상 위로 머리를 박고 쓰러진 양하나를 가만히 내려다봤다.

양하나를 내려다보는 시선에는 어떤 감정도 묻어 있지 않았다.

그녀가 이곳에서 이대로 열이 올라 목숨을 잃는다 해도 손 하나 까딱하지 않을 표정이었다.

그때 미닫이문이 열리며 이 팀장이 들어왔다.

“이쯤 하죠.”

“뭘요. 꼭 내가 무슨 짓이라도 한 사람처럼 말하네.”

“…….”

이 팀장은 아무 말 없이 걸어와 양하나의 이마에 손등을 댔다.

분명 진료를 본 의사가 일주일은 못 일어날 거라 했는데, 잘만 돌아다니더니 어떻게 깨어난 건지 싶을 정도로 고열이었다.

이 팀장은 의자를 빼고 쓰러진 양하나를 안아 들었다.

가경은 그 모습을 빤히 쳐다보다 말을 이었다.

“깨어나면 또 말할 거에요.”

이 팀장은 걸음을 멈춰 가경을 내려다봤다. 모두가 있던 자리에서와는 확연히 다른 표정이었다.

가경이 이 팀장 앞에서 멋대로 굴 때면 같은 길드원들은 그녀가 그의 성정을 몰라 그렇게 행동할 수 있는 것이라 말했다.

하지만 가경은 오델리아의 S급 망나니이기 전에 무엇이든 이름과 얼굴만 알면 배달하는 우체부 사업을 할 정도로 정보력이 좋았다.

그런 그녀가 길드장의 음습한 면을 모를 리 없었다.

다만 가경은 이필엽이 자신을 스카우트하며 제안한 사항이 마음에 들었을 뿐이다.

가경은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또 말하고 또 말할 겁니다. 알아야 하는 진실도 있는 거니까. 본인만 다 잊고 살면 그건 좀 너무하니까.”

이 팀장은 양하나를 안아 든 채 자리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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