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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죽음이 당신에게 미치는 영향 (112)화 (112/183)

내 죽음이 당신에게 미치는 영향

112화

이 팀장의 단호한 말에 괜히 그에 반하는 대답을 하고 싶어졌지만 사실이었다.

지금의 난 서 있는 게 고작일 정도로 굉장히 지쳐 있었다. 끓어오르던 분노가 가라앉았다.

이 팀장뿐 아니라 김형도와 박이설 그리고 고등학생 정도로 보이는 남자아이까지.

나를 옮기고 깨어날 때까지 돌봐 줬을 이들이 그제야 보였다.

나는 그가 내민 리모컨을 밀어 넣으며 한 톤 가라앉은 목소리로 사과했다.

“미안합니다. 도와주셨는데 인사도 없이 실례를 범했네요.”

내 딱딱한 인사에 김형도는 이 팀장의 눈치를 살폈다. 이 팀장은 그런 나를 가만히 바라보다 희미하게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남한테 잘 기대지 않는 성격이죠?”

이 팀장은 그 말과 함께 탁상 위에 올려져 있던 찻주전자를 들더니 찻잔에 차를 따랐다.

“지난 이천 게이트 때도 느꼈지만, 상시가 긴장 상태더군요.”

그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찻잔을 내밀었다.

“이럴 때는 미안하단 말보다는 고맙다고 하는 게 좋습니다. 우린 사과를 받으려고 양 헌터를 도운 게 아니니까.”

내민 찻잔을 받아 들었다. 카모마일이었다.

코에 닿는 익숙한 차향에 불쑥 강우신의 얼굴이 끼어들었다. 목구멍이 울렁였다.

나는 천천히 차를 받아 마셨다. 목구멍을 따라 내려가는 열기에 딱딱하게 얼어 있던 몸이 녹아내렸다.

그 뜨거운 차를 꿀꺽꿀꺽 선 자리에서 다 마셨다. 형도의 눈이 놀란 듯 휘둥그레졌다.

나는 빈 찻잔을 내려 두고는 입 안의 열기가 다 가시지 않은 채로 이 팀장을 바라봤다.

“구해 줘서 고마워요.”

이 팀장은 그제야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어 보였다.

* * *

진정이 된 후 탁상에 둘러앉았다.

바로 옆에 박이설과 김형도가 앉고, 정면에 이 팀장과 밤톨을 닮은 남자가 마주 보고 앉았다.

이 팀장은 곧장 그를 소개했다.

“처음 보죠? 아직 정식 입단을 하지 않았지만…….”

“고우주예요.”

그는 냅다 이 팀장의 말을 자르더니 손을 내밀었다.

내가 그의 손을 멀뚱히 바라보고만 있자, 고우주는 손을 거두어 가며 말을 이었다.

“아직은 입단 전이지만 고등학교 졸업하고 오면 받아 주신다고…….”

“미성년자여도 청소년법만 지키면 상관없지 않나요?”

돌려 말해 그의 길드 가입을 지양하고 있다는 뜻처럼 들렸지만, 내 물음에 그는 그런 어려운 건 잘 모른다면서 허허 웃어 보였다.

앳된 얼굴치고 넉살이 좋았다. 그게 아니라면 민망해할 법도 한데…….

‘머리가 꽃밭인 건가.’

이천 게이트 클리어 직후, 센터 다음으로 클리어 기여도가 높은 오델리아가 함께 주목받았다.

당연한 순차처럼 약소 길드인 오델리아로 입단 지원서가 물밀듯이 들어왔다고 한다.

항상 인력난에 시달리던 조이현은 반색했다. 하지만 그와 달리 이 팀장은 모든 지원서를 거절하며 당분간 충원 생각 없다는 공지를 홈페이지에 올렸다.

영문 모를 행동에 그가 눈만 높아져 실수하는 것이라는 이야기가 헌터 커뮤니티에 돌았었다.

나는 이 팀장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여긴 어디죠? 서울에 있는 사옥은 아닌 거 같은데.”

“본 사옥은 강남에 있고, 예상대로 여긴 강남이 아닙니다. 사옥이라기보다는 개인 자택이죠.”

그러고 보니 그가 센터를 퇴사할 때, 당장 어디로 갈 거냐는 물음에 경주에 있는 본가로 갈 거라고 했었다.

“그럼 여기가 경주……?”

중얼거리듯 말이 흘러나왔다. 이 팀장은 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저도 양 헌터가 낯설지 않은데 그건 양 헌터도 마찬가지인 모양입니다.”

“그냥 언뜻 들은 거였습니다.”

“그렇군요.”

혀를 차며 그렇게 말하자 이 팀장은 그렇냐며 너그러이 답했다.

“이현 형이 길드장님 양 헌터에게 추근거린다고 하더니 없는 말을 한 건 아닌가 보네요.”

그 모습에 형도와 이설은 한껏 웃었다.

창을 통해 들어오는 햇살과 티 없이 맑은 웃음소리 때문인지 평화롭게 느껴졌다.

방금까지 본 뉴스 같은 건 나와 관계없는 것처럼 말이다.

그 때문인지 날이 서 있던 나까지도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는 모른 척하고 싶다는 생각이 자꾸만 자라났다.

하지만 이게 내 것이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내가 있을 곳은…….’

나는 찻잔의 둘레를 둥글게 감싸고는 말을 이었다.

“도와주신 건 감사하지만 가능한 한 빠르게 움직이고 싶습니다. 가능할까요?”

이 팀장은 마시던 차를 내려놓더니 되물었다.

“어디로 갈 생각이죠?”

“센터로 갈 겁니다.”

“가서요.”

“말도 안 되는 일이라 말해야죠. 설마 저 가짜 뉴스를 믿으시는 건 아니죠?”

“…….”

이 팀장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 모습에 괜히 울컥하는데 나직한 답이 돌아왔다.

“물론이죠. 믿지 않습니다.”

그의 말에 안도의 한숨을 흘렸는데, 곧장 그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게 무슨 소용이죠?”

“네?”

“저나 여기 있는 사람들 그리고 그간 양 헌터를 가까이에서 본 이들은 보도된 내용을 믿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그게 무슨 소용일까요. 이미 센터에서 연구소장이 나와 낙인을 찍었고 상부에서는 타겟팅 명령에 응했습니다.”

“…….”

“그게 뭘 뜻하는지는 센터를 떠나온 저보다 양 헌터가 더 잘 알 거 같은데, 아닌가요?”

찻잔을 감싼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알고 있습니다. 약물 검사를 시켜 주기는커녕 아가리를 벌린 적군의 입 안으로 스스로 들어가는 격이 될 수 있다는 걸.”

내 대답에 일순 그의 표정이 굳었다.

“그 대답은…….”

이 팀장의 말을 자르듯 닫혀 있던 미닫이문이 열렸다.

모두의 시선이 그곳에 닿았다. 그곳엔 짙은 갈색 멜빵바지를 입은 여자가 서 있었다.

하나로 높게 올려 묶은 머리가 걸을 때면 말꼬리처럼 흔들렸다.

“벌써 깨어났다고.”

그녀는 마치 내가 깨어나길 기다리던 사람처럼 반가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형도는 기다렸다는 듯 제 옆자리 의자를 빼 주었지만, 그녀는 그걸 무시하고 바로 내 앞까지 걸어왔다.

그녀는 멜빵바지 주머니 안에 넣고 있던 손을 빼 탁상을 짚고는 내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부담스러운 시선에 이 팀장을 돌아보는데 책상을 짚은 그녀의 손목에 걸린 팔찌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표면이 잘 다듬어지지 않은 보석은 눈에 익은 것이었다.

나는 곧장 그걸 어디서 봤는지 떠올리고는 그녀의 정체를 예감했다.

“오델리아 소속의 능력 좋은 감각계 에스퍼군요. 그쪽.”

내 말에 그녀가 웃어 보였다.

“맞아, 생각보다 평가가 후하네.”

“가경 씨, 양 헌터 깨어난 지 얼마 안 됐어요. 그러니까.”

옆에서보다 못한 형도가 말렸지만 가경은 주저 없이 말을 이었다.

“막상 이렇게 가까이서 보니까 나는 티브이에서 나오는 말이 진짜가 아닐까 하는데.”

“진심으로 하는 소립니까?”

불쾌한 언사에 미간을 좁히자 가경의 눈매가 휘어졌다.

“인상 쓰니까 이제야 내가 좀 아는 사람이 맞는 거 같네.”

여유로운 목소리를 한 이 낯선 여자의 말에 일순 불길함을 느꼈다.

이런 식의 태도가 어딘가 낯익다고 생각했는데…….

“정말 딴 사람처럼 변했네. 하나야.”

내가 아닌 양하나를 보는 사람의 눈이었다. 마치 이곤처럼 말이다.

“우리 정말 오랜만이지?”

가경의 인사에 적막이 흘렀다.

사이에 앉은 오델리아의 사람들은 묘한 기류에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그녀의 인사에 어떤 대꾸도 못 하는 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나를 잘 아는 듯한 그녀의 여유로운 행동에 생각이 많아졌다.

자연스럽게 넘어가려면 무슨 대답이라도 해야 할 텐데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자꾸만 이곤의 얼굴이 겹쳐 보였기 때문이었다.

괜히 아는 척 어설프게 연기했다가는 이곤에게 그랬듯 덜미가 잡히기 쉬웠다.

마른침만 삼키는 데 여유로운 표정을 짓고 있던 가경이 웃음을 터트렸다.

배를 잡고 웃는 모습에 눈을 끔뻑거리자, 옆에 앉아 있던 형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경 씨! 짓궂게 행동하지 않기로 했잖아요.”

“아, 미안해요. 오랜만에 만난 거라 저도 모르게 흥분했네요.”

가경은 두 손을 들어 보이며 내게서 두어 걸음 떨어져 섰다.

아직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한 내가 형도의 말에만 가만히 귀를 기울이고 있자 가경이 그를 알아차리고 미소 지었다.

“하나 네가 날 기억 못 하는 건 당연해.”

불쑥 내 이름을 부른 가경은 내 시선이 온전히 제게 닿자 말을 이었다.

“7년 만에 만나는 것이기도 하고, 옛날에도 내가 너를 일방적으로 알고 있던 것뿐이니까.”

“7년 전이라면.”

“그래. 연구실 이후 참 오랜만이지.”

“…….”

불쑥 나를 안다며 나타난 이 처음 보는 여자 역시 연구실 출신의 사람이었다.

그늘에서 기억을 본 이후 연구실의 존재에 차츰차츰 다가가는데, 알면 알수록 내가 예상한 것은 빙산의 일각이었다. 저절로 불안이 샘솟았다.

물 안에 잠긴 빙산의 크기가 감히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연구실 출신이라고 해도 나는 마지막 해에 투입된 실험체였고, 아직 대기 번호를 한창 앞두고 있었으니까. 네가 모르는 게 당연해.”

형도가 빼 준 의자에 앉은 가경이 제 몫의 찻잔에 차를 따르며 말했다.

“하지만 너는 날 잘 알고 있잖아.”

고심 끝에 한 말이었는데, 가경이 머리를 뒤로 젖히며 큰소리로 웃었다.

“그치, 나는 널 잘 알지.”

방 안이 떠나가라 웃던 가경은 차를 들이켜 웃음을 삼키고는 말을 맺었다.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잖아. 나는 일개 실험 대기자였지만, 너는 실험…….”

“윤가경 씨.”

이 팀장의 부름에 가경의 말이 툭 잘렸다. 가경은 표정이 굳어서는 이 팀장을 돌아봤다.

“왜요.”

“양 헌터는 방금 깨어났습니다. 아직 제 컨디션이 아니라는 말이죠.”

“그래서요.”

분위기가 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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