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죽음이 당신에게 미치는 영향
109화
우신이 그걸 만지작거리자 마주 보고 있던 감시관이 한마디를 덧붙였다.
“지난 3월 표시한 겁니다. 양하나 헌터가 가이딩 적합도에 문제가 생긴 게 그즈음이며 홍 반장의 증언을 들어 보니 정신 감응을 처음 시도한 것도 그 시점입니다.”
그의 말에 양하나를 함부로 대하던 홍 반장의 모습이 떠올랐다.
“보고서에 따르면 양 헌터는 당시 힘이 불안정해 능력 사용 끝에 기절했습니다. 저희는 그쯤부터 약물에 손을 댄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우신이 아는 바에 따르면 그때 분명 한 번 걸고넘어졌던 문제였다.
재각성 테스트에서 같은 C급이 뜨며 감시과의 주목도 멀어졌다고 생각했는데, 이 방대한 자료를 보니 전혀 아니었다.
오히려 함정을 파고 때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말이 더 잘 어울릴 것 같았다.
우신은 이를 악물었다.
“이 자료들이 약물 중독을 뒷받침할 수 있는 근거가 될 수는 없습니다. 양 헌터가 3월을 기점으로 두드러진 성적을 내고 있다고 하지만 그건 능력적인 면에서만은 아닙니다.”
지민은 팔짱을 낀 채 우신을 가만히 바라봤다.
“능력은 물론 게이트에 대한 지식과 판단력, 대응력까지. 어느 것 하나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그것 역시 의심스러운……!”
감시관이 반박하려 들자 우신은 대번에 그의 말을 잘랐다.
“급작스러운 성장에 이유를 묻는 건 감시과의 몫이겠지만, 저는 이렇게 묻고 싶네요. 요즘 약물은 능력뿐 아니라 지식도 채워 줍니까?”
우신의 날카로운 물음에 감시관은 대답 없이 혀를 찼다.
반면 지민의 표정은 영 변화가 없었다. 우신은 동요 없이 제 말을 이어 갔다.
본부실 안에는 저 말고도 양 헌터와 게이트를 함께 들어갔다 나온 에스퍼가 있었다.
우신은 그들을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그건 저뿐만 아니라 양 헌터와 게이트를 함께 들어간 적 있는 헌터 분들이라면 모두 알고 있을 겁니다.”
우신은 그 말과 함께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생수병의 뚜껑을 열었다.
“그러니까 이런 종이 쪼가리로 양하나를 데려갈 생각이라면 꿈 깨라는 소립니다.”
그러고는 물을 종이 뭉텅이 위로 쏟았다. 순식간에 젖어 드는 종이에 감시관은 놀란 듯 의자를 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게 뭐 하는 짓입니까, 강우신 가이드!”
“더 제대로 된 증거를 가져오라는 소립니다.”
“증거 여기 있습니다.”
그 순간 우신의 등 뒤에서 지금껏 한마디도 하지 않던 이곤이 입을 열었다.
그가 정체 모를 비닐 팩을 내밀었다.
비닐 팩 안에는 머리카락 몇 가닥이 들어 있었다. 검은 중단발은 양하나의 것처럼 보였다.
우신이 이곤을 돌아봤다. 우신과 눈이 마주친 그가 보란 듯 입을 열었다.
“양 헌터의 모발이라면 충분하겠죠. 그 증거로.”
“그게 양 헌터의 모발이라는…….”
“확인해 보면 알겠죠. 하나 거인지 아닌지, 약물 중독이 맞는지 아닌지.”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그렇게 말하는 이곤의 모습에 강우신은 입매가 뒤틀렸다.
“……이곤 헌터. 미쳤습니까?”
“아니요. 오히려 놀라울 정도로 정신이 맑습니다.”
이곤은 그 말과 함께 민지민에게 그걸 건넸다.
비닐 팩을 받아 든 민지민은 대충 둘러보더니 옆에 서 있던 감시관에게 내밀며 연구실로 보내라는 말을 전했다.
그게 진짜 양하나의 머리카락이라면 증거품을 저렇게 쉽사리 아무에게나 넘길 놈이 아니다.
우신이 아는 민지민은 그런 놈이었다. 그러니까 지금 이건 허울 좋은 연기에 불과했다.
이놈도 저놈도 모두 눈 가리고 아웅 하고 있다는 거였다.
민지민은 대충 상황이 마무리되자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기다렸다는 듯 눈이 가늘어져서는 말을 맺었다.
“어떻게 된 상황인지 모두 알겠습니다. 현재 양 헌터는 동료 에스퍼를 공격하고 도주까지 한 상태로, 위험 단계라는 판단이 들어…….”
말끝을 흐리던 지민은 지금 시각을 확인하고는 축제의 서막을 알리듯 고양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현재 현장에 있는 전 헌터에게 전하세요. 양 헌터의 타겟팅을 허락한다고.”
* * *
“윽.”
옅은 신음과 함께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춥고 몸이 무거웠다. 어떻게 된 건지는 곧장 알 수 있었다.
온몸은 젖어 있었고 왼쪽 어깨에 엄청난 통증이 밀려왔다. 어깨뼈가 으스러진 듯했다.
하수도에 반쯤 빠져 있는 하체를 이끌고 물 밖으로 나와 벽면에 기대앉았다.
뒤이어 정신을 잃기 전 상황을 더듬었다.
이곤과의 힘겨루기 중 상황이 불리해져 공격을 막고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하지만 내 행동을 예측했는지 이곤은 정확히 내가 당도할 방향으로 재장전한 총알을 쐈다.
어깨에 탄환이 박히며 탄에 휘감겨 있던 에너지에 의해 뼈가 그대로 으스러졌다.
추락하듯 물속에 떨어진 직후 정신을 잃었는데, 흘러내려 오다 계단에 걸린 모양이었다.
“탄환에 무슨 짓을 한 거야.”
이곤과 함께 작전할 일이 없어 몰랐는데, 에너지가 무식할 정도로 폭력적이었다.
정제되지 않은 힘이 탄환 같은 실체에 더해지니 대포를 맞은 격이었다.
이곤을 생각하자, 직전 그의 얼굴이 떠올랐다.
“우리는 함께 도망친 적이 없다고, 너 누구야.”
아까 그는 정말 배신이라도 당한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누구냐고 물어본 주제에 들으려고 하지도 않고……. 나쁜 새끼.”
이곤은 마치 모든 걸 알고 있는 듯 관망하는 자세로 내게 질문해 왔다.
‘도대체 언제부터 이런 타이밍을 노린 거지? 정말 확신도 없이 나를 시험해 보겠다는 목적 하나로 총을 쏜 걸까?’
그동안 알던 이곤과 전혀 다른 모습에 혼란스러웠다.
나는 괜히 짙은 배신감에 물든 얼굴을 떨쳐 내려고 고개를 내저었다.
“윽.”
조금만 움직여도 으스러진 팔이 불에 타는 것처럼 아팠다.
상의의 밑단을 찢어 어깨와 팔뚝을 몸통에 딱 맞게 고정했다. 당장 이런 몸으로는 뛰는 것도 불가능했다.
나는 한쪽 팔로 벽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짓단을 따라 물이 툭툭 떨어졌다.
조금만 긴장을 풀어도 잠이 올 거 같았다. 하지만 그럴 때가 아니었다.
이곤은 물론 위에 남아 있는 다영과 지원, 생존자들까지 무엇 하나 걱정되지 않는 게 없었다.
“어디까지 밀려온 거지.”
계단을 밟고 올라가자, 지상으로 통하는 사다리가 보였다.
물에 떠밀려 온 탓에 여기가 어디 아래인지 알지 못했지만, 지금은 직접 부딪쳐 보는 수밖에 없었다.
나는 부러진 팔을 최대한 고정한 채 한 팔로 천천히 사다리를 잡고 위로 향했다.
겨우 위에 도달해 닫힌 맨홀을 열려는데 한 손으로는 밀어도 꿈쩍하지 않았다.
당장 가이딩을 받을 수도 없으니, 더 이상 에너지를 쓰는 건 위험했다.
최대한 오른쪽 어깨에 힘을 실어 부딪혀 보았지만 미동도 없었다.
“제발……. 제발 열려.”
부딪힐 때마다 진동이 전해져 왼팔이 난도질당하는 거 같았다.
통증에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꽉 쥐고 다시금 심호흡했다. 마지막 힘을 다해 부딪힐 생각이었다.
방향을 조준하고 힘껏 맨홀로 달려드는 순간 어깨가 닿기도 전에 맨홀이 열리며 그대로 몸이 위로 떠 올랐다.
균형을 못 잡고 몸이 뒤로 기우는 그때 누군가 내 허리춤을 휘감았다.
균형을 완전히 잃은 탓에 허리를 감싼 이의 품으로 쓰러졌다.
“윽.”
통증에 몸을 옹송그리는데 곧장 귓가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양하나 헌터……?”
그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코앞에 있는 남자는 박희민이었다.
나는 오랜만에 마주치는 낯익은 얼굴에 눈살을 한 번 찌푸렸다.
“박희민 가이드?”
앞머리를 올리고 이마를 드러낸 탓에 단번에 알아보지 못했다. 그러자 희민은 앞머리를 살짝 내리며 웃어 보였다.
“이러면 좀 알아보겠죠?”
이제 보니 머리칼도 그렇고 윗옷도 젖어 있었다.
맨홀은 좁은 골목에 있었다. 머리 위로 천막이 처져 있는 덕분에 날씨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
시선을 돌리니 길목 끝에 놓인 도로가 빗물에 젖는 게 보였다.
“비가 옵니까?”
희민은 나를 부축해 맨홀 밖으로 하체까지 빼내며 답했다.
“네, 하늘이 어두워지는 거 같더니 아까부터 조금씩 비가 내리네요. 그것보다 이게 도대체 무슨 꼴입니까?”
희민은 내 모습을 위아래로 훑으며 그렇게 물었다.
담백하게 묻는 물음에 비해 시선이 바삐 움직이는 것이 맨홀 아래서 불쑥 튀어나온 나를 보고 적지 않게 당황한 모양이었다.
그럴 만도 하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쫄딱 젖어서는 왼팔까지 망가진 모습이 누가 봐도 무슨 일이 있는 사람의 모습이었다.
“사고가 있었어요. 그것보다 박희민 헌터가 여긴 왜 있습니까? 여기 게이트 브레이크 지역 아닙니까?”
혹여라도 내가 물살에 휩쓸려 브레이크 지역 밖으로 나온 건가 싶어 물었는데, 희민은 게이트 브레이크 지역에 들어오며 받은 명찰을 내보이며 고개를 저었다.
“게이트 브레이크 지역 맞습니다. 저는 후발대로 들어왔고요.”
“지금 시간이.”
“오후 7시 27분이요.”
“…….”
빌딩을 무너트린 시간으로부터 다섯 시간 가까이가 지나 있었다.
나는 혀를 차고는 벽을 짚고 몸을 일으켰다. 그 모습에 박희민은 당황한 듯 나를 부축했다.
“기다려요, 제가 지원팀을 부를 테니까.”
희민이 호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그 모습에 나는 서둘러 그를 저지했다.
“잠깐만요.”
이곤과 헤어지고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몰랐다. 기절해 있던 시간이 긴 만큼 신중하게 행동해야 했다.
하수도에 떨어진 것부터 이어진 대화들까지 그게 다 우발적으로 혹은 우연히 일어난 일이라 생각되지 않았다.
‘정말 그 사람 말대로잖아.’
아무래도 그 말이 마음에 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