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죽음이 당신에게 미치는 영향
106화
그를 빤히 쳐다보고 있자, 이곤은 잠시 제 입술을 매만지다가 무겁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운을 뗐다.
“한영원은 글쎄, 게이트 브레이크 직전에 들어온 애라서 사실 명확히 기억나는 건 없어.”
“하지만 아까 분명 한지원 헌터한테 그랬잖아, 망가트릴 생각이 없다고.”
내 말에 그는 아, 자기가 그런 말을 했냐며 심드렁하게 반응했다.
“그건 나도 어디서 들은 거야. 같은 연구실 출신이라는 것도 작은 문제가 있었다는 것도.”
나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누구한테 들었는데?”
“…….”
짧은 침묵 뒤 이곤이 희미한 미소와 함께 답했다.
“민지민 헌터에게서.”
불쑥 튀어나온 귀에 익은 이름에 안면이 굳었다.
뒤 구린 일에서라면 어김없이 등장하는 이름 때문이기도 했으나, 그의 이름을 말하는 이곤의 태도가 심히 눈에 거슬렸다.
그 이름이 거론된 순간 내 표정을 살피는 시선 때문이었다.
나는 악물고 있던 입술을 뗐다.
“그래? 민지민 헌터가 그런 말을 했다고.”
목소리가 급격히 낮아졌다.
표정 관리를 하기 위해 입술을 짓씹었으나 좀처럼 의중을 알 수 없는 그의 어투에 미간이 좁아 들었다.
이곤은 그런 내 표정이 보이지 않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을 이었다.
“그런데 말이야. 사실 그것 말고도 들은 게 있어서.”
“……뭔데.”
이어질 말을 기다리는데 이곤이 손을 뻗어 내 뒤쪽을 가리켰다.
“올라가는 길 보인다.”
이곤이 가리킨 방향에는 벽면을 따라 타고 올라갈 수 있는 사다리가 붙어 있었다.
그가 그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말을 하다 말고 출구로 향하는 모습에 다급하게 이곤을 불렀다.
“잠깐만 더 들었다는 게 뭔데.”
서둘러 부르자 그가 걸음을 멈추고 휙 돌아봤다.
“왜 이렇게 궁금해할까? 남 일에 관심 하나 없던 양하나께서.”
“…….”
“사실 네가 한지원 헌터 에너지 운용을 돕는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귀를 의심했어. 그 양하나가? 이러면서.”
“네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야. 단지 내가 지원 헌터에게 도움받을 게 있어서…….”
“그러니까.”
이곤이 불쑥 내 말을 잘랐다.
“하나 네가 언제부터 남한테 도움을 받던 애였냐고.”
땅 밑인 탓일까, 아니면 아까부터 조여 오는 이곤의 시선 때문일까 점점 숨쉬기가 어려워지는 기분이었다.
쉽사리 대답하지 못하고 있는데 이곤이 한결 풀어진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사실 나는 연구실에서 널 처음 만났을 때보다 연구실 사고 날이 더 기억에 또렷하긴 해.”
연구실 사고라는 말에 화마에 휩싸이던 연구실과 숲길을 따라 피투성이가 된 채 걸어오던 어린 하나의 모습이 떠올랐다.
아직도 그게 하나의 기억인지 아니면 나의 기억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대답을 기다리듯 나를 빤히 보고 선 이곤에게 보다 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도 기억해.”
내 대답이 만족스러웠는지 이곤이 입매를 올려 웃었다.
“그래, 그걸 어떻게 잊겠어. 우리 그때 완전히 죽을 뻔했잖아.”
“…….”
“이렇게 같이 게이트 브레이크를 맞으니 그때 생각이 많이 나.”
이곤은 먼저 사다리를 통해 올라가라는 듯 자리를 내줬다. 나는 그를 힐끗 보고는 사다리를 밟고 두어 칸 올라섰다.
이곤은 그 모습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우리가 함께 살아 나와 정말 다행이야. 하나야.”
휘어진 눈썹을 한 채 나를 바라보는 그의 표정에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나는 그날을 회고하는 그의 깊은 눈동자를 바라봤다.
아까부터 완전히 이곤에게 휘둘리고 있단 기분을 지울 수가 없다.
‘감정의 폭이 이렇게 큰 적이 없었던 거 같은데…….’
수도로 떨어진 다음부터 아니 합동 훈련이 시작된 이후부터.
나는 점점이 흩어져 있는 기억 속 이곤의 얼굴을 찾아가다 집공팀에 말없이 올라왔던 그를 떠올렸다.
무어라 설명하긴 어렵지만, 소 대리 옆에 서서 말없이 나를 바라보던 이곤의 얼굴이 굉장히 낯설다 느꼈었다.
그때부터였던 거 같았다.
연구실 피해자였다고는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그늘 없이 행동하던 그가 감정적으로 나를 대하던 게.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머릿속에 경고 음이 울렸다.
나는 끝없이 긴 사다리의 위로 시선을 돌리며 답했다.
“그러게……. 함께 살아 나와 다행이야.”
그렇게 넘길 생각이었다.
한번에 너무 많은 진실을 마주해 버렸고, 이곤의 과거는 내 생각보다 더 암울했으니까.
그렇기에 어디로 튈지 모르는 이곤을 데리고 지상으로 올라가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내 답에 이곤이 미친 듯이 웃기 시작했다.
그의 커다란 웃음소리가 하수도를 따라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배를 잡고 웃는 모습에 당황한 나는 행동을 멈추고 그를 쳐다보았다.
“……왜 그래?”
당혹감 어린 음성으로 물었으나, 이곤은 좀처럼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그 모습을 바라만 봤다. 그렇게 얼마간 웃어 대던 그의 입꼬리가 이내 저물었다.
시선을 바닥으로 내린 그가 꿈쩍없이 내 발끝 언저리를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귓가에 속삭이듯 이렇게 말했다.
“진짜네. 진짜 그놈 말이 맞네.”
나지막한 독백에 입술이 바짝 말랐다.
“……이곤?”
“개 같네, 시발.”
불쑥 튀어나온 욕에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너 왜 그래, 아까부터 너답지 않게.”
내 말에 땅바닥을 응시한 채 서 있던 이곤이 고개를 들더니 나를 바라봤다.
바로 전까지 미친놈처럼 웃더니, 지금은 웃음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창백한 얼굴이었다.
그가 눈을 또렷하게 뜨고는 날 바라봤다.
“너답지 않게라니……. 그건 내가 할 말인 거 같은데.”
서늘한 어투에는 일말의 농담조도 담기지 않았다.
나는 침묵 속에서 이어질 이곤의 말을 기다렸다. 본능적으로 입을 열면 불리해질 것임을 직감했다. 그렇게 느낄 수밖에 없었다.
눈앞의 이곤은 처음 보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가 사다리에 어중간하게 매달려 있는 나를 아래서 위로 훑었다. 그러며 말을 이었다.
“널 괴롭히던 놈들은 네가 남에게 너무나도 무신경하고 이기적이라고 말하지만, 그건 정말 너를 잘 몰라서 하는 말이지.”
“…….”
“너는 남에게 무신경하긴커녕 과하게 눈치를 보잖아.”
건들면 깨질 듯 얼어붙어 있던 이곤의 입매가 희미하게 올라갔다.
섬뜩한 미소를 머금은 이곤이 아주 당연한 걸 이야기하듯 확신 어린 어조로 말을 이어 갔다.
“습관처럼 남의 생각을 읽는 게 일종의 네 생존법이라는 건 잘 알고 있어.”
한 번도 그런 식으로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내가 알게 된 양하나는 흔히 말하는 ‘착한 아이’는 아니었다.
아마 내 후배로 있었다면 나 역시 멋대로 힘을 휘두르고 다니는 그녀를 못마땅하게 여겼을지도 모른다.
물론 그게 그녀가 따돌림을 당해도 되는 이유는 아니었다.
그래서 지난 양하나의 행동을 변호하진 않되 당하고만 있지도 않은 거였다.
그런데 그게 다 양하나가 살아남기 위한 방법이었다니.
그런 식으로는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니까 이 근래 변해 가는 너를 이해할 수 없었어. 남을 신경 쓰고 도우려 하고 미안해하고 기뻐하고.”
감정이 다 떨어져 나간 듯 섬뜩하던 이곤의 눈동자가 뜨겁게 일렁였다.
“나는 네가 먹지 않던 커피를 마시는 것도, 오랫동안 시달리던 불면증이 사라진 것보다도 그게 가장 이상했어.”
나는 마른침을 삼키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 태도가 변했다고 생각한다면 그걸 부정하지는 않을게.”
“…….”
“하지만 그게 뭐가 이상하다는 건지 모르겠어. 알잖아. 사람은 수도 없이 변해.”
이곤의 절박한 시선에 입이 멋대로 움직였다.
생각해 본 적 없는 말이었다. 그런데도 미끄러지듯 말이 나왔다.
실제 그렇게 변해 가는 사람들을 봐 왔기 때문이었다.
그게 내게 그런 말을 뱉어 낼 힘을 주었다.
“어떻게 내가 계속 네가 말한 상태에 머물러 있을 수 있겠어…….”
그 순간 이곤이 내 말을 단호하게 잘랐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거야. 네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다니. 네가 생각해도 우습지 않아?”
“…….”
“그렇게 당하고도 아직 믿는 거야? 성시현도 제 목숨 하나 지키지 못했다고 하나 네 입으로 말했잖아.”
냉소적인 얼굴을 한 이곤의 입에서 나온 뜻밖의 이름에 일순 몸이 얼어붙었다.
그 모습에 이곤이 웃어 보였다.
“이것 봐라. 진짜네.”
분명 웃는 낯임에도 목소리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사람처럼 떨렸다.
“성시현 이름 꺼내니 급격히 동요하는 걸 보니 맞네.”
그의 말에 번뜩 이모네 집에서 본 양하나의 스크립터 북이 떠올랐다.
한 권 가득 성시현의 영웅적 기사로 가득 차 있던 것 말이다.
나는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한 글자씩 내뱉었다.
“내가 말했잖아. 지난번 머리를 다친 이후로…….”
“그 말이라면 그만둬. 정말 다 뒤집어 버리고 싶으니까.”
이곤이 한 걸음 가까이 다가왔다.
나는 움찔 몸을 굳혔다. 팔 뻗으면 닿을 거리에 이곤이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