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죽음이 당신에게 미치는 영향
105화
미친 듯이 앞만 보고 걷더니, 지금은 마치 내 입에서 이어질 말을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
이곤이 기다리고 있는 다음 말이 무엇인지 나는 감히 알 수 없었다.
지금까지 그에 대해 깊게 고민해 본 적이 없었다.
내가 양하나의 몸에 빙의한 이유를 고민한 게 오래되지 않은 것처럼, 그저 이곤을 양하나의 유일한 친구이자 가족이라 여겼다.
양하나의 기억에 조금씩 동화되는 탓인지, 그가 멀게 느껴지지 않은 것도 한몫했다.
그런 이곤이 낯설게 느껴진 건, 그늘에 다녀온 이후부터였다.
양하나의 그늘, 연구실에 대한 악몽을 본 후부터 자꾸만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가끔 이곤이 섬뜩한 얼굴을 보이던 게 착각이나 오해가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감 같은 것 말이다.
서서히 호흡이 돌아오고, 그제야 알 거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와 다영과는 정반대편에 있던 이곤이 어떻게 내 바로 뒤에 서 있었는지.
돌이켜 보니 다영이 몬스터의 머리를 베어 내기 무섭게 기다렸다는 듯 그는 이렇게 말했다.
“함정이야.”
“뭐?”
“어떻게 알았어? 함정인지.”
“그거야, 다영 헌터가 목을 베어 내는 타이밍에 내 쪽에서는 보였거든……. 돌무덤 아래로 몸을 숨기고 있는 또 다른 몬스터가.”
“그래? 혹시 그전부터 이미 네 시야에 보였던 건 아니고?”
내 말에 이곤이 헛웃음 쳤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랬다면 위험하게 두지 않았겠지.”
“그래, 그래서 네가 날 구했잖아.”
“…….”
“정확히는 나만 구할 타이밍을 만들었지.”
이곤의 얼굴 위로 희미하게 남아 있던 웃음기가 서서히 저물어 드는 게 보였다.
나는 이곤의 손에 힘없이 들려 있는 손전등을 가져왔다. 그러고는 그걸 들어 그의 얼굴을 비추었다.
이곤은 눈이 부신지 얼굴을 찡그렸다.
“대답하기 곤란하다면, 질문을 바꿀게.”
“왜 그래, 하나야.”
“곤아, 한영원에 대해 네가 알고 있는 게 뭐야.”
묘한 긴장감이 서린 분위기 속에 내 입에 나온 이름에 이곤의 표정이 멍해졌다.
섬뜩하게 굳어 가던 표정이 엉뚱하게 변해, 나는 눈썹을 찡그렸다.
‘뭐지?’
그렇게 생각하는데, 이곤의 입가가 부드럽게 올라갔다.
“그러고 보니 너 게이트 브레이크 현장에 오는 건 오랜만 아니야? 여기 있으니까 옛날 생각난다. 그치?”
“말 돌리지 말고.”
“그래서 그런가, 자꾸만 그때 일만 생각나네.”
“…….”
“내가 처음에 너 진짜 싫어했잖아. 기억나, 하나야?”
* * *
최초의 기억이라 할 건 연구실에서부터 시작된다. 그 전의 일이라면 버려짐의 연속일 뿐이었다.
가는 곳마다 이름이 바뀌고 보호자가 바뀌어 크게 기억에 남는 게 없었다.
당시 연구실에서 비밀리에 2차 성징이 나타나기 전인 아이들을 구하고 있었다.
그는 열 살의 나이로 연구실에 왔다.
처음에는 단순히 깨끗한 제 방이 생겼다는 게, 매 끼니를 배부르게 먹을 수 있다는 게 좋았다.
하지만 머지않아 세상에 공짜가 없다는 걸 알았다.
아무렇게나 성의 없이 붙은 이름 대신 숫자로 불리게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인공 각성자로 연구실 최초의 살아남은 성과가 됐다.
-209번.
스피커를 타고 들려오는 소리에도 그는 벽에 기대앉아 작은 몸을 옹송그렸다.
가슴께에 붙어 있는 209라는 숫자가 몇 번이나 더 불렸지만,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머리를 짧게 민 정수리만 보일 뿐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방 안으로 흰 가운을 입은 성인 대여섯 명이 들어왔다.
그들이 몸 상태를 확인하듯 그를 일으켜 세우고 채혈하고 혈압을 잴 때도 그는 반항을 하기는커녕 꼭두각시처럼 움직였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한 남자가 입을 열었다.
“이거 이래서는 각성의 의미가 없잖아. 지난달부터 맥박도 약해지고 운동량도 없고.”
혀를 차는 남자의 말에 옆에 서 있던 여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약물에도 더 이상 반응이 없습니다. 이 이상은 위험 수치여서 다른 수를 써야 해요. 아니면 이번에도 폐기하게 될 겁니다.”
그 말에 서늘한 침묵이 감도는데, 때마침 그 무리의 가장 끝에 있던 이가 불쑥 입을 열었다.
“저한테 좋은 생각이 있습니다. 제 딸을 데려와서 교감하게 하면 어떨까요? 분명 변화가 있을 겁니다.”
흰 가운을 입은 사람들 무리에서도 가장 젊어 보이는 남자였다.
그는 안경을 쓰고 있었는데, 일부러 어려 보이는 얼굴을 가리기 위해 쓴 듯 안경에 알이 없었다.
그의 말에 파일을 들고 있던 여자는 뭔가 떠오른 듯 답했다.
“아, 그러고 보니 양 박사 딸도 각성자라고 했었지?”
“네, 정신계 에스퍼입니다.”
옆에 서 있던 남자 연구원이 툭 말을 잘랐다.
“그런데 C급이라고 하지 않았나?”
산통을 깨는 말에도 양 박사는 옅은 미소를 잃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래도 이런 어린 에스퍼를 상대로는 부족함이 없을 겁니다.”
앳된 얼굴과는 다르게 박사의 두 눈에는 불꽃 같은 욕망이 이글거렸다.
209번은 약물에 정신이 몽롱해 그 대화의 뜻을 전부 이해할 순 없었으나 머지않아 대화에 나온 제3의 인물이 누군지 알 수 있었다.
* * *
양박사의 아이는 저보다 한 뼘은 작은 여자아이였다.
단발머리를 한 아이는 그 희멀건 방안에서 유일하게 색채를 띠었다.
처음엔 푸른색 원피스를 입고 입구에서 쭈뼛거리기만 했다.
양박사가 아이를 달랬지만, 그녀는 좀처럼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렇게 문 앞에서 서성이다가 돌아가기를 일주일쯤 반복했을 때, 양 박사를 제외한 다른 이들은 기대를 지운 듯했다.
그럼에도 양 박사는 꿋꿋하게 그 아이를 제 방 안에 들였다.
그렇게 얼마간 더 시간이 흐르고, 어느새 여자아이는 제 옆에 와서 그림을 그리며 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그녀를 방 안에 가구 정도로 인식하고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양하나.”
그때, 그 아이가 대뜸 말을 걸어왔다. 뜬금없는 말에 옆을 보자, 그녀가 들고 있는 스케치북이 보였다.
캐릭터 그림 사이에 아이의 이름 석 자가 하늘색 크레파스로 쓰여 있었다.
그림은 엉망인 데 비해 이름 석 자만큼은 제법 반듯했다.
스케치북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데, 하나가 재촉했다.
“너는?”
“…….”
“너는 이름이 뭐야?”
그런 한가롭고 일상적인 질문을 듣는 게 굉장히 오랜만이어서, 그래서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다.
하나는 꼭 대답을 듣겠다는 얼굴로 진득하니 그를 쳐다봤고, 결국 별수 없이 물음에 답을 했다.
“209…….”
“뭐?”
잘 알아듣지 못한 것처럼 인상을 찡그리는 탓에 가슴께에 달린 명찰을 보여 주었다.
그런데 어쩐지 성의 없이 부여된 숫자를 이름이라고 내밀고 있자니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한 부끄러움이 들었다.
“뭐야. 그게 무슨 이름이야.”
그래서 그렇게 투정 부리듯 말하는 하나에게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
그녀는 흥미가 떨어진 듯 도로 스케치북에 그림을 그렸다.
스케치북 위로 시선을 옮기자 하나가 209라는 숫자를 그리고 있는 게 보였다.
그녀의 이름처럼 연습한 글자가 아니어서 삐뚤빼뚤한 게 그림을 그리는 거 같았다.
그렇게 말없이 9를 그리던 하나는 그것을 물끄러미 보다가 입을 열었다.
“이거 꼭 그거 같다.”
“…….”
“곤.”
하나는 입술을 쭉 내밀며 그렇게 발음했다.
“이곤.”
-하나야 이만 가자.
때마침 스피커를 통해 그녀를 부르는 소리가 났고, 하나는 미련 없이 스케치북을 남겨 두고 출입구로 뛰어갔다.
문이 열리고 그는 나갈 수 없는 곳으로 그렇게 사라져 버렸다.
얼마간 하나가 사라진 문을 바라보고 있다가 스케치북으로 시선을 옮겼다.
209, 곤.
그는 나란히 쓰인 이름을 번갈아 바라봤다.
‘9와 곤이 어디가 닮았다고.’
그런 투정 같은 생각이 드는 건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이곳에 온 이후로, 그리고 이질적인 힘을 가지게 된 이후로는 피곤하다는 생각 외에 해 본 적이 없는데 말이다.
이제는 연구실 밖에서 쓴 이름이 무엇이었는지도 가물가물했다.
그는 스케치북 위에 적힌 곤이라는 이름을 손가락으로 훑었다.
양하나를 닮은 하늘색이 손끝에 묻었다. 그는 이름을 물어본 그 아이를 떠올렸다.
이제 이름 같은 거 필요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왕 이름을 가진다면 누군지 모를 사람이 붙인 숫자보다는 하나가 둥글게 입술을 모아 말해 준 그 이름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하나가 떠나가 혼자 남은 방 안에서 그 이름을 소리 내 읽었다.
“이곤.”
이곤이 기억하는 양하나와의 첫 만남은 그랬다.
* * *
이곤의 말에 나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못했다.
그의 이름을 지어 준 게 양하나였다니. 그리고 그 연구실에서 인공 각성자를 만들고 있었다니.
갑작스럽게 너무 많은 걸 알게 된 기분이었다.
그리고 진실의 형태가 예상하던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라, 쉽사리 입이 안 떨어졌다.
내가 공격 1팀으로 활동하고 있을 때 인공 각성은 불법이었다.
미디어를 통해 보이는 에스퍼의 모습에 각성자가 되길 바라는 이들이 생겼지만 억지로 각성자가 되게 만드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런데 설마 그렇게 큰 부지의 연구실에서 연구가 이루어졌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나는 입술을 달싹이다 말을 이었다.
“그럼 한영원은.”
“…….”
불쑥 영원의 이름을 꺼내는 내 모습에 이곤의 얼굴 위로 잠시 실망하는 듯 어두운 그림자가 스쳤다.
그런 그의 반응도 이해됐다. 양하나와 이곤의 만남은 기억에 각인될 만큼 임팩트가 강했으니까.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이곤과 양하나 사이에서 있었던 일이고 거기에 젖어 있기에는 그가 한 말이 마음에 걸렸다.
“하나를 한영원처럼 망가트릴 생각은 없으니.”
직감이지만 그가 내게 말하지 않은 이야기가 더 있다는 생각이 쉽사리 떨어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