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죽음이 당신에게 미치는 영향
99화
다영은 삽을 든 채 조용히 한곳을 주시했다.
그녀의 시선 끝에 지원이 묵묵히 몬스터의 잔해들을 포대 자루에 담고 있었다.
C조는 B구역을 담당하게 됐는데, 도착한 이후로 세 시간째 같은 일을 반복하다 보니, 대부분의 헌터들이 농땡이를 피우기 시작했다.
특히 조장인 유제이가 왜 이런 일을 헌터가 하냐며 투정을 부린 터라 조원들이 눈치를 볼 필요도 없었다.
그 틈바구니에서 오직 한지원만이 흐트러짐 없이 주어진 일을 계속했다.
“정말이지 성실하달까, 융통성이 없달까.”
다영은 그 모습을 지켜보며 지원을 지켜봐 달라는 하나의 부탁을 떠올렸다.
숙소에 돌아와 씻고 나왔는데 핸드폰에 문자 한 통이 와 있었다.
다영은 젖은 머리칼을 털며 핸드폰을 열었다.
그것이 하나에게 온 것임을 알고 이 근래 집중하고 있는 연구실 관련 일이 아닐까 생각했다.
[늦은 시간에 미안해요. 괜찮다면 내일 같은 조의 한지원 헌터를 눈여겨봐 주세요.]
그러나 문자는 생각지도 못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 탓에 다영은 하나가 보낸 문자가 맞는지 발신인을 다시 확인했다.
그녀는 지금껏 하나의 부탁을 말없이 들어줬다.
‘지난번에 했던 말은 진심이었으니까.’
그래도 언제나 그녀의 의도를 조금이나마 추측할 수 있었는데…… 이렇게까지 이유를 알 수 없는 부탁을 받는 건 처음이었다.
땅에 꽂아 넣은 삽에 기대 한숨을 푹 내쉬는데 지원이 삽질을 멈추더니 움직이기 시작했다.
멀뚱히 그를 보고 있자 점점 그녀와 가까워졌다.
다영은 급히 주변을 둘러봤지만, 그녀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지원의 걸음은 다영의 앞에 멈췄다. 삽을 질질 끌고 온 터라 그가 걸어온 길을 따라 땅이 패어 있었다.
다영은 어색한 얼굴로 지원의 눈치를 보다 입을 열었다.
“저한테 볼일 있으세요?”
그러자 지원이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저한테 볼일이 있는 건 그쪽 아닌가요?”
지원은 다영의 명찰을 힐끗 보고는 말을 이었다.
“김다영 헌터? 할 말이 있으면 그냥 하는 게 어때요. 세 시간 내내 쳐다보는 시선이 내 입장에서 상당히 부담스럽습니다.”
그의 말에 다영은 허, 하고 숨을 뱉어 냈다.
지원이 처음부터 그녀의 시선을 알아차렸을 거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몇 시간 전만 해도 C조의 헌터들이 모두 모여 있어 들키지 않을 거라 자신하고 있었는데.
‘역시 집공 팀 소속이라는 건가.’
그녀의 실책이었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부탁이었던지라 지원에 대해 조사할 겨를이 없었다.
다만 그를 지켜본 세 시간 동안 멍하니 보고만 서 있었던 건 아니었다. 최대한 주위를 훑듯 티 나지 않게 보았는데.
다영은 짝다리 짚고 있던 자세를 고쳐 잡으며 말을 이었다.
“정식으로 인사드려요. 1군 소속의 김다영 헌터입니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닌데 기분 나쁘셨다면 죄송해요.”
“자기소개나 하자고 말을 건 게 아닙니다. 한두 번도 아니고 계속 그러는 데는 무슨 이유가 있을 거란 생각밖에 안 드는데요.”
“…….”
“다시 묻죠. 절 왜 그렇게 쳐다본 겁니까?”
경계심 가득한 눈빛으로 노려보는 모습이 꼭 예민한 아기 고양이 같았다.
위협적으로 묻는데도 무섭게 느껴지지 않는 이유도 그 때문일 거다.
지원은 다영이 대답하기 전에는 원래 자리로 돌아갈 생각이 없는 듯 질질 끌고 온 삽을 땅 아래 꽂아 넣고는 팔짱을 꼈다.
다영은 곤란한 듯 잠시 눈을 굴렸다.
하나에게 부탁받은 일이라 그랬다고 대답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다고 얼렁뚱땅 넘어가려 했다가는 말꼬리가 잡힐 거 같았다. 다영은 머리를 굴렸다.
‘뭐라고 해야 이 상황을 자연스럽게 넘길 수 있을까.’
다영은 이런 상황에서 말꼬리를 잡히지 않고 대화를 끝낼 마법의 대답이 떠올랐다.
그녀는 입꼬리를 끌어올린 채 지원을 보고 입을 열었다.
“취향이라서요.”
“네?”
“그쪽 얼굴이 내 취향이라서요.”
지원은 눈이 휘둥그레져서는 다영을 쳐다봤다.
“농담하는 겁니까?”
“왜요? 외모에 자신이 없는 편인가요? 충분히 자신감을 가져도 될 것 같은데.”
그녀의 말에 지원은 얼굴을 붉히며 미친 사람을 다 보겠네, 하고 중얼거렸다.
“됐습니다. 이제 그렇게 빤히 쳐다보는 건 그만두세요.”
그는 곧장 뒤로 돌아 제자리로 갔다.
‘뭐야, 진짜 좀 귀여운데?’
푸른빛이 도는 머리칼이 제법 제 취향이었으니 전부 거짓말은 아니었다.
저도 모르게 웃던 다영은 좋은 생각이 난 듯 삽을 챙겨 지원의 뒤를 따라 걸었다.
하나는 지켜봐 달라고 했지만, 그게 지켜‘만’ 봐 달라는 의미는 아닐 것이다.
그가 이미 자신을 인식한 마당에 멀리서 바라보는 것도 무리였다.
다영이 두어 걸음 거리를 두고 따라 걷자, 지원은 화가 난 듯 인상을 쓰고 뒤를 돌아봤다.
“이제는 아예 대놓고 따라다니는 겁니까?”
“쳐다만 보는 건 싫다고 하셨고, 제 소개도 했으니 그래도 될까요?”
뻔뻔한 그녀의 말에 지원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방긋방긋 웃는 다영을 빤히 쳐다보다 포기한 듯 입을 열었다.
“양하나 헌터의 부탁인 건가요.”
지원의 말에 다영의 표정이 그대로 얼어붙었다.
그녀는 입술을 뻐끔거리다가 아주 자그마한 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걸 어떻게…….”
“어제 양 헌터와 같이 있는 걸 봤습니다. 제가 한 번 본 사람의 얼굴은 잘 안 잊어서요.”
다영은 의문이 풀린 듯, 작은 탄성을 내지르고는 손거스러미를 뜯어내기 시작했다.
척 봐도 정곡을 찔린 사람의 모습이었다.
‘거짓말에는 영 재능이 없나 보네.’
지원은 그렇게 생각하고는 다시 삽질을 시작했다.
“양 헌터의 부탁이라면 더 이상 뭐라 하지 않을 테니 거리만 두고 있어요, 저랑.”
다영에게만 들릴 만큼 작은 목소리로 말한 지원은 곧 하던 일을 다시 시작했다.
“이유가 뭐죠? 양 헌터의 부탁인 것도 알았으면 그냥 저랑 같이 다니는 게…….”
“됐으니까, 제발 혼자 둬요. 양하나 헌터라면 분명 지켜보라고만 했을 거 같은데.”
“…….”
어딘가 정곡을 찔린 기분이었지만, 다영은 그녀보다 하나에 대해 더 잘 안다는 듯한 그의 말에 오기가 들었다.
다영은 이미 그녀는 안중에도 없다는 얼굴로 삽질에 몰두하고 있는 지원을 빤히 쳐다봤다.
그의 말에는 틀린 점이 없었다.
‘하지만…….’
다영은 지원의 등 뒤에서 삽질을 시작했다. 그러자 그녀를 바라보는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다영은 지원에게 시선을 주지 않은 채 삽질을 계속하며 입을 열었다.
“저도 할 일을 하는 것뿐이니 신경 쓰지 마시죠. 저도 좋아하거든요, 삽질.”
그녀는 보란 듯이 몬스터의 잔해를 삽으로 퍼서 자루에 옮겼다.
지원은 헛웃음을 쳤지만, 더 이상 무어라 하거나 자리를 옮기지 않았다.
다영은 그것에 만족한 채 서서히 일에 집중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같은 일을 반복하고 있자니 잡생각이 솟아난 그녀는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혹시 그쪽이 양하나 헌터의 팀메이트인 건가요?”
“…….”
“양 헌터가 자기 이야기는 잘 안 하는 편이잖아요. 요즘 고민이 많아 보이는데 팀에서 친구는 잘 사귀었나 걱정이 되어서요.”
돌아오는 답이 없자 다영은 머쓱한 듯 허리를 폈다.
“뭐야, 잘 아는 척하더니 사실을 그쪽도…….”
“글쎄요. 팀메이트의 범주가 어디까지인지 잘 모르겠지만 저도 비슷합니다.”
지원은 그렇게 말하다 다영과 눈을 맞추고 말을 맺었다.
“언제나 도움을 받기만 해서 그 은혜를 꼭 갚고 싶은데…… 양하나 헌터가 곁을 내주지 않으니 그 사람의 무엇을 도울 수 있는지 모르겠네요.”
“…….”
지원 역시 그녀와 같은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하나는 이상하리만큼 곁을 주지 않고, 이상하리만큼 모르는 게 많았다.
연구실 사건만 해도 종종 이곤과 어울리는 그녀가 모를 것들이 아니었다.
같이 2군에 있던 시기, 다영은 하나가 왕따를 당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녀에게 가해지는 폭력의 강도가 유독 강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유일하게 어울리는 이곤 조차 다른 헌터들을 제재하지 않으니 하나를 도울 사람은 한 명도 없는 듯했다.
다영은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그녀가 살아남을 방법이 두 가지뿐이라 생각했다.
양하나 스스로 2군에 있길 포기하든가 아님 최상위 포식자가 그녀를 구해주거나.
하지만 놀랍게도 하나는 그 외의 길을 선택했다.
미처 생각해 본 적 없는 일이기에 믿을 수 없었지만, 그녀를 직접 본 순간 알 수 있었다.
A급 에스퍼들을 골탕 먹였다든지 B급 게이트를 클리어했다든지 하는 어처구니없는 소문은 사실이라고.
그녀는 눈빛부터가 딴 사람처럼 바뀌어 있었다.
다영이 하나를 돕는 건, 은인에 대한 고마움이기도 하지만 방관자였던 과거의 죄악감에서 나온 것이기도 했다.
“완전히 똑같지는 않지만, 저도 그쪽이 말하는 게 뭔지…….”
그를 바라보는 순간, 지원이 단호하게 말을 잘랐다.
“고개 숙여요.”
“네?”
그 말과 함께 삽을 쥐고 있던 지원의 손이 푸르게 빛나더니 다영과 제 사이를 빠르게 가로질렀다. 바닥에 삽이 꽂히면서 모래가 벽을 만들듯 높게 치솟았다.
순식간에 그녀의 눈앞이 모래바람에 휩쓸려 엉망이 됐다.
놀란 다영은 본능적으로 뒷걸음질 쳤다. 그리고 눈을 질끈 감고 호흡기를 막았다.
올라오는 기침을 참으면서도 다영은 본능적으로 지원을 찾았다.
겨우겨우 눈을 뜬 채로 주위를 살폈지만 모래바람 속에 짙고 큰 그림자가 언뜻 비치더니 순식간에 사라졌다.
다영은 모래바람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뒷걸음질 쳤다. 완전히 그 권역 밖으로 나와서야 기침을 쏟아 냈다.
“이게 뭐 하는 짓이에요!”
겨우 호흡이 돌아온 다영은 화를 내며 지원이 서 있던 곳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곳에는 그가 쥐고 있던 삽만 덩그러니 떨어져 있을 뿐 지원은 온데간데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