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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죽음이 당신에게 미치는 영향 (93)화 (93/183)

내 죽음이 당신에게 미치는 영향

93화

“하나야?”

내가 입을 다문 채 굳어 있자, 이곤이 나를 불렀다.

그 소리에 지원에게서 시선을 뗐다.

아마 내게 가방을 전해 줄 때, 가방 안의 서류를 본 거 같았다.

가방에 들어 있던 서류는 다영에게 얻은 연구실 사고 사망자와 실종자 명단이었다.

이곤과의 대화에 혹여라도 필요한 일이 생길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챙겨 온 것이었는데…….

지원의 상태가 이상했다.

이름 외엔 모든 것이 모자이크 처리돼 그것이 정확히 무슨 자료인지도 알 수 없을 텐데 말이다.

“…….”

“무슨 문제 있어?”

나는 잠시 주저하다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그러고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말을 이었다.

“이번 출장에서는 별일 없었어? 너 요즘 출장이 잦았잖아.”

얼굴색 하나 바뀌지 않고 대화의 방향을 틀자 이곤은 찰나의 의구심도 잊은 듯 활짝 웃었다.

“약간 피로했었는데, 하나 네가 걱정해 주니 쌩쌩해지는 것도 같고.”

“오버는.”

“정말인데. 나는 네가 조금 더 날 걱정하고 신경 써 줬으면 좋겠어.”

장난처럼 하는 말인데 오늘따라 묘하게 끈적하게 느껴졌다.

단둘이 있는 것도 아니고 우신과 지원도 있는데 그의 눈에는 마치 나밖에 보이지 않는 듯했다.

나는 그가 무슨 헛소리를 더 할까 싶어 얼른 주제를 돌렸다.

“이번에 합류한 거면 곧 있을 합동 훈련은. 참가하는 거야?”

다영에게 들었던 합동 훈련에 관해 묻자, 이곤은 내가 그런 것을 신경 쓰는 게 의외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조 배정은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집공 팀 합류하고 첫 행사인데 참여해야지. 너도 있고.”

부담스러운 시선에 “그래, 조심하고.”라는 말을 남기고는 말을 맺으려는데, 불쑥 우신이 끼어들었다.

“나한테는 할 말 없습니까?”

그는 나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나는 당황한 나머지 잠시 이곤과 지원을 힐끗 쳐다봤지만 모두의 시선이 내게로 향해있다는 걸 깨닫고 입을 열었다.

“……제가 강우신 가이드에게요?”

“네.”

그 의뭉스러운 한마디에 순간 많은 생각이 스쳤다.

서초 게이트 관련 일부터 병실에서의 일까지 수만 가지의 의문이 머릿속을 떠다녔지만 나는 결국 담담한 얼굴로 고개를 저어 보였다.

“글쎄요, 딱히 없습니다만.”

말 그대로 이 자리에선 그에게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이곤은 내 대답이 우신에게 선을 긋는 거라고 생각했는지 대놓고 웃음을 터트렸다.

우신은 그는 안중에도 없는 듯 그럼 됐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 좋은 사이라고 이렇게 앉아 있습니까, 일하러 왔으면 일이나 하죠.”

그렇게 말을 덧붙이고는 지원의 어깨를 잡고 일어나라 눈치를 줬다.

지원이 나를 힐끔 쳐다보길래 고개를 한 번 끄덕이자 그제야 안쪽 가이딩실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예약한 방이 빈 모양이었다.

나는 가이딩실로 들어가는 우신과 지원의 뒷모습을 쳐다봤다.

원래는 오늘도 내 방에 갈 생각이었으나, 우신이 단호히 거절했다.

지원의 가이딩하는 건 자신이니 제가 최적의 장소를 고르겠다고 말이다.

나는 이게 정식 가이딩도 아닌데 도대체 무슨 최적의 장소가 필요하냐고 따져 묻고 싶었다.

설마 지원을 데리고 그의 집에 갈 생각인 건가 싶었는데, 우신은 용케도 가이딩실 이용을 정식 허가받았다.

그 모습에 새삼 S급이 좋긴 좋다는 생각을 했다.

“하나, 너는 여기에 왜 온 거야?”

내가 두 사람이 들어간 가이딩실 문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자, 맞은편에 앉아 있던 이곤이 그렇게 물었다.

나는 그제야 그에게로 고개를 돌리고는 적절한 말을 골랐다.

“지원 헌터가 에너지 운용에 문제를 겪고 있거든.”

“그런데?”

이곤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그게 너와 무슨 상관이냐는 얼굴로 되물었다.

나는 잠시 이곤의 얼굴을 바라보다 나직하게 답했다.

“지원 헌터는 강우신 가이드의 도움이 필요해. 그런데 알다시피 강우신 가이드는 지금 내 전담 가이드잖아.”

“아…….”

이곤은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낮은 탄성을 뱉곤 임시 전담이었지, 하는 말을 덧붙였다.

“나도 마침 그게 궁금했는데, 잘됐네.”

“궁금했다고?”

“응.”

이곤은 테이블 가까이 몸을 기울이더니 비밀 이야기를 하듯 얼굴을 가깝게 들이댔다.

그러고는 작은 소리로 물었다.

“혹시 강우신 가이드가 옛날 일에 앙심을 품고 널 협박하고 있는 건 아니지?”

“뭐?”

상상치도 못한 어처구니없는 물음에 헛웃음 쳤다.

이곤은 그런 내 표정이 보이지 않는지 말을 이었다.

“그렇잖아, 그게 아니고서야 네가…….”

“아니니까, 소설 쓰지 마.”

내가 딱 잘라 말하자, 이곤은 탐탁지 않은 얼굴로 눈을 가늘게 뜨고는 말을 이었다.

“그럼 그게 사실이야? 매칭률이 100%라는 거.”

바로 직전에 엉뚱한 짐작을 하던 게 거짓말처럼 정확한 정보를 짚어 냈다.

미간이 저절로 구겨졌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그게 중요해? 그런 말도 안 되는 수치가 나올 리가…….”

“중요해. 매칭률은 어디까지나 당사자와 담당자 그리고 연구진 사이의 암묵적 비밀이야. 그걸 삼자인 네가 알고 있다면 그 룰이 깨진 거니 큰 문제지.”

단호하게 말하자 이곤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순간 그를 너무 몰아세운 건가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잘못된 건 정확히 짚고 넘어가야 한다.

양하나의 유일한 친구라는 생각 탓에 지금까지 늘 그에게 무르게 행동했다.

덕분에 이곤에게 도움을 많이 받았지만, 은연중에 그에게 묻지 않고 넘어간 것도 분명 있었다.

양하나의 기억 속에서 본 이곤과 양하나의 관계 같은 것 말이다.

저절로 눈에 힘이 들어가는데, 멍하니 내 얼굴을 들여다보던 이곤이 입을 열었다.

“그런 얼굴 진짜 오랜만에 보네.”

“그런 얼굴?”

“너 그때 게이트에서 암석 맞고 기절한 이후로 영 딴 사람 같았잖아.”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가장 모른 척하고 싶은 부분을 찔러 댔다.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내가 딴 사람 같았어?”

긴장감에 훅 튀어나온 걱정스러운 진심이었다. 이곤은 눈치채지 못한 듯 계속 말을 이었다.

“뭐, 오히려 옛날 생각이 나기도 했지. 너가 아직 이모네 댁에 들어가기 전의 모습에 가까웠으니 어떻게 보면 옛날로 돌아온 거 같기도 했어.”

이모네 댁 이전의 관계를 회상하는 이곤의 말에 나는 가장 묻고 싶었던 말을 물어볼 뜻밖의 기회에 서둘러 입을 열었다.

“이모네 댁에 들어가기 전이라면, 우리…….”

그간 함께한 이곤이라면 대충 그때의 일에 대해 언급하거나 말의 포문만 열어 준다면 주저 없이 대화를 이어갈 사람이었다.

그런데 내가 그렇게 말하며 말끝을 흐리는 순간 이곤은 난생처음 보는 표정이 되어 있었다.

정확히는 그 얼굴 위로 어떤 감정도 녹아 있지 않았다.

입술을 굳게 닫은 채 그저 내 입에서 이어질 다음 말에 모든 감각을 집중하고 있었다.

그게 나를 주저하게 했다.

과거 연구실 일을 물어보기는커녕 본능적으로 모르는 척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불러일으켰다.

내가 침묵하자 무거운 공기 속 이곤의 입술이 열렸다.

“뭐라도 기억난 거야?”

높낮이 없는 물음이 어쩐지 섬뜩하게 느껴졌다. 분명 비슷한 물음을 과거에도 들었었다.

양하나가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성시현 헌터에 대해 처음 물었을 때 말이다.

짧은 침묵 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냥 우리가 옛날에는 조금 더 가까웠던 거 같다고.”

내 말에 이곤은 고개를 갸웃하더니 싱겁긴, 하고 답했다.

미묘한 긴장감이 감도는데 이곤은 언제 그랬냐는 듯 태연하게 턱을 괴며 말을 이었다.

“뭐, 하여튼 그렇게 정색할 거 없어. 이번에 집공 팀에 들어오면서 소명 담당자님이라 하게 됐는데, 그때 상담실 책상 위에 네 프로필이 있더라고. 그래서 살짝 좀 들춰 봤어.”

“그런 걸 함부로 보면 안 되지.”

“그래, 미안. 하지만 네 사진이 떡하니 보이는데 어떻게 내가 모르는 척해. 네 일을.”

눈을 날카롭게 빛내며 그는 그게 마치 타당한 이유라도 된다는 듯 말했다.

“그런 게 이유가 될 수 없다는 건 알지?”

내 말에 이곤의 표정이 허물어지더니, 민망한 듯 웃어 보였다. 그러고는 팔짱을 끼고 새침하게 말을 이었다.

“진작 말해 줬으면 좀 좋나. 그거 보고 솔직히 좀 서운했어. 그래서 나도 비밀로 한 거고.”

“집공 팀에 들어오기로 한 걸 말이야?”

“그래.”

“…….”

오늘 낮에 소명이 불쑥 그를 소개할 때, 어쩐지 불길한 기분을 감출 수 없었다.

그런데 그가 툭 터놓은 진실은 어이없을 정도로 가벼웠다. 덕분에 어쩐지 마음이 조금 놓이는 듯했다.

그때, 우신과 지원이 들어가 있던 가이딩실 문이 벌컥 열렸다.

저절로 그곳에 시선이 향했다.

지난번과는 다르게 흐트러짐 없는 우신의 단정한 차림에 무슨 문제가 생겼나 싶어 그를 쳐다봤다.

우신은 아무 말 없이 내 쪽으로 저벅저벅 걸어왔다. 그러고는 내 앞에 서서 입을 열었다.

“이만 갑시다.”

“네? 가이딩은 어쩌고요.”

“다 끝났습니다.”

우신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볼이 홀쭉해진 지원이 벽을 짚고 모습을 드러냈다.

지난번에는 정신을 잃었는데, 이번에는 그때보다 버틸 만했던 모양이다.

그늘에서 우신이 지원을 가지고 협박해 올 때가 생각나 조금 걱정하기도 했는데…….

나는 우신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역시, 그럴 사람이 못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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