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죽음이 당신에게 미치는 영향
90화
찰나의 순간이었다.
내게 다가오는 그의 모습이 느리게 보였다. 천천히 감기는 눈꺼풀과 긴 속눈썹의 그림자, 떨리는 옅은 숨소리까지.
나는 숨결이 느껴질 만큼 가까이 다가온 우신을 피하지 않았다.
그와 입술이 맞부딪혔다.
마른 입술이 따뜻한 온기에 덮였다. 마치 이 순간이 꿈처럼 사라질까 조심스러워하는 입맞춤이었다.
아랫입술에 이가 닿자 나도 모르게 어깨가 경직됐다. 우신은 그런 내 반응에 입술을 살짝 뗐다.
“힘 풀어도 돼요.”
나를 진정시키려는 듯 그렇게 읊조리지만, 말과 함께 흘러나온 숨이 되레 더 자극적으로 느껴졌다.
그 때문인지 두 뺨이 더욱 달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잠시만요.”
당황하여 고개를 돌리자 우신이 내 뒤통수를 조심스레 감쌌다.
“확신이 없어도 괜찮아요.”
“…….”
그는 내 마음을 전부 안다는 듯한 눈빛으로 나를 내려다봤다.
“모르겠으면 가이딩이라고 생각해도 됩니다. 핑계를 대도 좋아요.”
그렇게 말하는 그에게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우신은 내 눈빛에 응답하듯 다시금 입을 맞춰 왔다.
입술을 삼키듯 빨아들이고 좀처럼 떨어질 생각을 안 했다. 덕분에 흘러나오는 밭은 숨이 그의 안에 번졌다.
우신이 고개를 비틀자 코끝이 스쳤다.
왜인지 우신과 하는 것은 무엇 하나 이상하지 않은 게 없었다. 마음을 붕 뜨게 하고 몸을 뜨겁게 했다.
처음에는 그저 그가 내 첫 가이드이기 때문이라 생각했다.
우신이 하는 말이 유독 기억에 남는 것도 그의 눈물에 가슴이 아린 것도 그래서 그에게 힘이 되어 주고 싶다 생각하는 그 모든 게 말이다.
열린 창을 통해 여름의 습한 열기가 흘러들었다.
그런데도 그와 떨어지기 싫다는 생각만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나는 본능처럼 그의 목에 팔을 감았다.
* * *
병원 복도로 낮은 굽 소리가 울렸다. 한 손에 서류와 라이선스를 든 소명이 한 치의 흐트러짐 없는 모습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 뒤를 그의 수행원이 바짝 쫓았다.
“602호실입니다.”
곧 양하나가 입원 중인 병실 문이 보였다. 그 앞에 선 소명이 짧게 노크했다.
“양 헌터, 소명입니다. 들어갈게요.”
소명은 말을 끝내자마자 답도 듣지 않고 문을 벌컥 열었다.
“…….”
소명은 잠시 휘둥그레진 눈으로 방 안을 살폈다. 그녀가 깨어났다는 소식은 들었지만 퇴원한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그런데 하나는 이미 사복으로 갈아입고 잘 갠 환자복을 침상 위에 올려 두고 있었다.
“벌써 퇴원이라도 하나 봐요.”
소명의 나직한 물음에 하나가 그녀를 돌아봤다.
“……네. 컨디션이 회복돼서요.”
그렇게 답하는 하나의 얼굴이 묘했다. 소명은 언뜻 상기된 듯한 하나를 바라봤다.
게이트가 클리어되자마자 센터와 오델리아 길드가 주축이 돼 이천 게이트를 클리어했다는 소식은 정보망을 타고 빠르게 퍼져 나갔다.
소명은 집공 팀의 현장 담당자로서 늦지 않게 게이트로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현장은 피해 규모가 크지 않다는 보고와 달리 엉망이었다.
급히 실려 가는 하나를 보고 이후 추가 보고를 확인하니 뜻밖의 말이 적혀 있었다.
가이딩 적합도 문제를 보이던 양하나가 1차 접촉만으로는 가이딩 효과를 온전히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기에 깨어나면 임시 전담 가이드인 강우신과 함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소명은 한쪽 입꼬리를 씩 올리더니 입을 열었다.
“강우신 가이드가 일주일 내내 상주해 있었다더니 막상 퇴원하는 날엔 어디 갔나 봐요.”
소명의 말에 짐 가방의 지퍼를 잠그던 하나가 멈칫하더니 소명을 힐끔 쳐다봤다.
“낮에까지 있다가…… 급한 호출이 있어 현장으로 갔습니다.”
“그렇습니까?”
소명은 흥미롭다는 듯 웃다가 수행원의 헛기침에 그제야 제 용건을 떠올렸다.
소명은 손에 쥐고 있던 것을 하나에게 내밀었다.
“이게 뭡니까?”
하나의 물음에 소명이 건조한 눈빛으로 답했다.
“민지민 헌터가 당신이 이걸 급하게 찾을 거라고 하더군요.”
그건 양하나의 집공 팀 라이선스였다. 건방진 민지민은 양하나가 찾는 물건을 가지고 있다며, 이것을 전해 주고 그녀의 반응을 살펴 달라는 귀찮은 부탁을 했다.
어차피 병원으로 가는 길이었기에 소일거리를 맡아 주었다.
그런데 라이선스를 확인한 양하나의 눈빛이 일순 뜨겁게 일렁였다.
그녀는 곧장 라이선스를 품 안에 넣으며 잘 전달 받았다, 답하고 서류에 사인했다.
사인을 마치고 펜을 넘기던 하나는 잠시 주저하다 입을 열었다.
“그런데 강우신 가이드에겐 따로 정해진 휴식기가 없는 겁니까?”
“그게 무슨 말이죠.”
“분명 이천 게이트 투입조 모두 휴식기라고 알고 있었는데, 호출에 응답하길래요.”
“직접 물으면 될 거 아닙니까.”
“…….”
소명의 냉소적인 답에 하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소명은 라이선스만을 지급하러 온 게 아니었다.
민지민이 제출한 게이트 일지를 확인하니 주인 방에 들어간 이는 단 한 명, 양하나뿐이었다.
민지민은 주인 방 안에서의 일은 양하나의 일지를 따로 받아야 할 것이라 말하며 서류에는 쓰지 않은 개인적인 견해를 흘렸다.
“어디까지나 이건 제 추측이지만, 양 헌터는 게이트 클리어를 주저한 것 같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죠? 설마 양 헌터가 보스 몹의 감정에 동화하기라도 했다는 뜻입니까.”
“글쎄요.”
지민은 탁상을 검지로 툭툭 치다 묘하게 웃었다.
“그런 거창한 감정이 아니더라도, 같잖은 동정심 같은 게 들었을 수는 있죠.”
하나가 건넨 펜을 받아 든 소명이 말을 이었다.
“저번에 나눈 대화 기억합니까.”
“대화요?”
“내가 충고했죠. 분수에 맞지 않는 왕관을 쓰면 그 무게를 견디기 힘들 거라고.”
“아…….”
소명의 말에 하나 역시 그때의 기억이 떠오른 듯 작은 탄성을 내뱉었다.
소명은 병실을 잠시 둘러보다 익숙한 향을 맡았다.
“카모마일인가 봐요.”
하나는 어떻게 알았냐는 표정을 지었다. 소명은 그런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처음 양하나의 존재를 의식한 건 어디까지나 강우신 가이드 때문이었다.
그가 관심을 두는 에스퍼라니. 어떻게 궁금하지 않겠나.
강우신은 시현 선배의 죽음 이후 에스퍼에게 벽을 치고 사적인 감정을 보이지 않은 것으로 센터 내에서 유명했다.
그 모습을 가장 가까이서 봤다.
그가 재판장으로 끌려가던 차 안에 소명 역시 타고 있었다.
‘그런 강우신 가이드가 다시 마음을 준 사람.’
처음에는 호기심 때문에 양하나에게 관심이 갔으나, 보면 볼수록 저도 모르게 그녀의 행보를 눈으로 좇고 있었다.
소명은 경계심 어린 눈을 한 하나를 보고는 말을 이었다.
“지난번에 성시현 헌터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말했죠. 이런 말이 어떻게 들릴지는 모르겠지만 양 헌터는 그 사람을 닮은 거 같습니다.”
양하나의 한쪽 눈썹이 움찔 떨렸다.
“그 명언 같은 말도 그 사람이 해 준 거예요. 그녀는 전부를 가질 힘이 있는데도 이 좁은 센터에 스스로를 가뒀습니다. 그게 누군가를 돕는 일이라는 안일한 생각으로요.”
소명의 말에 하나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 말이라면 저번에도…….”
“사실 난 그게 제법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센터에 들어온 후 소명은 열등감 때문에 힘든 나날을 보냈다.
자기 잘난 맛에 살던 그녀가 새로운 환경에서 잘 적응하지 못해 우울해하고 있을 때, 성시현이 먼저 다가와 줬다.
현장을 보조하는 협력팀 막내보다 헌터인 그녀가 더 힘들 게 분명한데도 어색하게 명언 비스름한 위로를 툭 던지고 갔다.
그게 처음에는 의미심장하기만 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은근히 힘이 됐다.
센터는 그녀를 품기에 너무 작은 곳이었지만 시현은 개의치 않고 자신이 구할 수 있는 눈앞의 생명을 살리기 바빴다.
힘든 내색 할 줄 모르는 그녀가 결국 게이트 안에서 생을 마감했을 때, 소명은 울지 않았다.
직장에서 만난 융통성 없는 선배의 최후는 생각했던 그대로였으니까.
‘그때까지 버틴 게 용한 거지.’
닿지 않을 말을 웅얼거렸다.
“그거야말로 왕관의 무게에 어울리는 사람의 선택이지 않을까.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하지 못하는 선택을 해낸 게 아닐까.”
“…….”
“미련하긴 하지만 그게 멋있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툴툴거리면서도 그 팀에 남아 있었던 거고요.”
소명은 말하다 말고 제 손목시계를 확인하더니 하나가 사인을 마친 서류를 챙겨 들었다.
그러고는 아직 앉아 있는 하나를 내려다봤다.
“그런데 알다시피 양 헌터는 시현 선배와 다릅니다. 그렇게 행동하다가는 가까이 있는 걸 모조리 놓칠 수 있다는 걸 알고…….”
소명은 하고 싶은 말을 다 하고 미련 없이 떠날 생각이었다. 그런데 제 말을 듣는 하나의 표정이 묘했다.
“무슨 표정입니까, 그건.”
어딘가 장성한 제자를 보는 듯한 묘한 눈빛이 거슬려 그렇게 묻자, 하나가 답했다.
“아닙니다. 충고 새겨듣겠습니다.”
소명은 몇 마디 더하고 싶었지만, 이내 무슨 뜻인지 알아들었으면 됐다는 말을 하고는 병실을 빠져나갔다.
병실을 향할 때와는 다르게 소명의 걸음이 빨라졌다.
그 뒤를 따라 발걸음을 옮기던 수행원은 병원을 빠져나오자 입을 열었다.
“왜 대리님답지 않게 그런 말을 하신 겁니까.”
소명과 양하나의 대화를 전부 듣고 있던 수행원의 말에 소명은 세단 앞에 멈춰 섰다.
“필사적이었지.”
“네?”
소명이 게이트 앞에 도착했을 때, 상황 자체는 보고 받은 것처럼 긍정적이었다.
센터 팀이 사망자 없이 게이트 클리어의 주역이 되었으니까.
모두가 안도하며 웃고 있는 현장에서 유독 눈에 띄는 건 단연 강우신이었다.
누구의 것인지 모를 피를 뒤집어쓴 채 정신을 잃은 양하나를 업고 뛰어가는 그의 모습이 어쩐지 계속 기억에 남았다.
“그렇게 말해야지, 생각이 좀 덜 날 거 같아서.”
소명은 그 말과 함께 차 뒷좌석 문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