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죽음이 당신에게 미치는 영향
89화
이필엽은 방 안에 앉아 있는 센터 사람들을 훑어보다 입을 열었다.
“양하나 헌터는 아직 깨어나지 못한 건가요?”
그의 말에 민지민이 이필엽을 슬쩍 흘기고는 짧은 침묵 후 답했다.
“어제 정신을 차렸습니다.”
“그렇군요.”
이필엽은 작은 목소리로 다행이네요, 하고 덧붙였다.
“그런데 강우신 가이드님은 왜 안 보이십니까?”
두 사람의 대화를 듣던 김형도가 물었다. 그의 물음에 백건희가 답했다.
“양 헌터를 간호하느라 오늘 자리에는 참석하지 않으셨습니다.”
그의 말에 조이현은 알 만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긴 그렇게 필사적인 얼굴은 처음 봤습니다. 그 강우신이 그런 얼굴로 울다니, 여유가 있었다면 사진이라도 찍었어야 하는 거 아닌지…….”
조이현은 아깝단 말이죠, 하며 장난스러운 얼굴로 이필엽의 팔을 툭 건드렸다.
그의 말에 이필엽은 입꼬리를 당겨 웃더니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글쎄, 어쩌다 한 번 본 적이 있어서 그런가 크게 놀랍진 않더군. 그게 벌써 6년 전인가…….”
* * *
머릿속이 엉망이었다.
한 번은 이 팀장에게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정신계 에스퍼들이 가장 상담 센터를 자주 찾는다고.
그 이유는 간단했다.
남의 정신에 침투해야 할 일이 많은 그들은 업무 이후에도 타인의 생각과 감정에 동화돼 쉽사리 우울감에 빠질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정신계도 아니었거니와 그 계열에 별다른 흥미도 없었기에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넘어갔다.
그때는 내 일을 해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벅차고 힘들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이 근래는 눈만 감으면 번번이 하나의 기억과 감정이 내 것인 양 떠올랐다 사라지곤 했다.
그 탓에 깊이 잠든 게 언젠지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오랜 기간 잠을 설쳤다.
나는 산뜻한 향을 맡으며 서서히 눈을 떴다. 카모마일의 향이 병실에 가득했다.
고개를 돌리자, 우신이 차를 우리고 있었다.
그를 보며 무거운 눈꺼풀을 몇 번 끔벅였을 뿐인데, 내 시선을 느꼈는지 우신이 나를 바라봤다.
“일어났습니까.”
“오늘 수여식이 있다면서요. 왜 또 여기 계세요.”
우신은 천천히 다가와 내 이마에 손을 얹더니 옅게 미소 지었다.
“굳이 저까지 갈 필요가 없을 거 같아서요.”
“그래도.”
“그깟 표창장보다 양 헌터가 기운 차리는 걸 보는 게 더 좋습니다.”
우신은 에너지 파동이 거의 안정 범위로 돌아왔다며 다행이라 말을 덧붙였다.
내가 이렇게 회복하기까지 우신과 팀원들의 노고가 있음을 알고 있다.
전부 기억나지는 않지만, 수아가 만든 주인 방을 빠져나왔을 때 이미 몸속 에너지양이 감당할 수 있는 정도를 초월했다.
다 분출되지 못한 에너지가 양하나의 몸을 잡아먹고 있었다.
정신 감응을 멈추려고 해도 기력이 없는 탓에 몸이 마음대로 제어되지 않았다.
우신은 그런 나를 필사적으로 가이딩했다. 듣자 하니 형도가 옆에서 보조 가이딩을 맡았던 모양이다.
덕분에 게이트 아웃까지 폭주하지 않고 목숨을 간당간당하게 부지한 채로 병원까지 실려 왔다.
지금은 좀 나아졌지만, 어제 눈을 떴을 때만 해도 의사가 허겁지겁 달려왔을 정도로 상태가 심각했던 것 같다.
“현장에 강우신, 김형도 가이드, 권미래 헌터 중 누구 어느 한 사람이라도 없었다면 목숨을 잃었을 겁니다. 하늘이 도왔어요.”
의사의 말보다도 그 말을 옆에서 묵묵히 듣던 강우신의 표정이 잊히지 않았다.
끝내 수아가 죽고 아이들이 모두 안전하게 이송됐다는 말을 들었을 때 졸음이 물밀듯 밀려왔다.
나는 깨어나 밥을 먹고 약 기운에 다시 잠들기를 반복했고, 그동안 우신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묻고 싶은 게 산더미일 거면서 말이다.
“…….”
병실 가득 차오른 카모마일의 향이 흥분된 마음을 차분하게 만들었다.
차향의 효능 같은 게 아니었다.
레몬을 보면 저절로 침이 고이는 것처럼 카모마일의 향을 맡으면 마음이 진정됐다.
긍정적인 경험이 남긴 기억의 반사 작용 같은 거였다.
“나한테 물어볼 거 있지 않아요?”
결국, 참지 못하고 입을 연 건 나였다. 환기를 위해 창을 열던 우신이 뒤로 돌아 나와 마주했다.
나는 퍼석하게 마른 입술을 한 번 핥고는 말을 이었다.
임시라곤 하지만 그는 내 전담 가이드였다. 그러니 무모했던 내게 화낼 자격이 있었다.
“그렇게 아무 말 안 하는 게 더 답답해요. 하고 싶은 말 있으면 하고, 화내려면 화내요.”
제 발 저려 먼저 화내듯 말해 버리고 말았다.
내가 미간을 찡그리자, 그 모습을 멀뚱히 바라보던 우신이 천천히 다가와 검지로 구겨진 내 미간을 눌렀다.
“아직 아픈데 혈압 올라가면 안 좋습니다.”
“…….”
미열로 상기된 내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우신은 도무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화가 난 건지 실망한 건지.
얼마간의 정적이 흐른 후 우신의 입술이 열렸다.
“물으라고 하니 한 가지 물어보죠.”
우신은 그 말과 함께 침상 바로 옆에 놓인 간이 의자에 앉았다.
“정신을 잃은 채 누워 있는 양 헌터의 모습을 보며 여러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는 정면에 앉은 그를 똑바로 바라봤다.
“왜 몸에 이상이 있음에도 진작 나에게 솔직히 말하지 않았을까, 믿음을 못 준 스스로를 탓해 보고.”
“……그건!”
“당신 몸에 이상이 있다는 걸 전담 가이드인 나보다 김형도 가이드가 먼저 눈치챘다는 사실에 절망도 했습니다.”
나는 참지 못하고 그의 말을 잘랐다.
“내가 강우신 가이드를 못 믿어 말하지 않은 게…….”
“알고 있습니다. 저는 지금 양 헌터에게 화가 난 게 아닙니다. 스스로에게 화가 난 거지.”
우신은 쓴웃음과 함께 이마를 가리고 있는 앞머리를 쓸어올렸다.
“상기되어 있었거든요. 내 에스퍼, 드디어 지킬 내 에스퍼가 생겼다는 생각에, 게이트에서 누구보다 든든한 배경이 되어 줄 생각에 그런 기초적인 것도 놓칠 정도로 말입니다.”
이제 보니 우신의 눈가가 붉어져 있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생각 때문에 또다시 에스퍼를 잃을 뻔했습니다.”
“…….”
“양하나 헌터. 저번에 내가 한 말 기억합니까? 가이드가 되고 싶었다는 말이요.”
“역시 뭔가를 희망한 거라면, 저는 에스퍼보다는 가이드가 되길 바랐어요.”
“네, 기억합니다.”
내 대답에 우신이 쓰게 웃었다.
“그때 분명 이유를 물었었죠?”
나는 고개를 끄덕여 대답을 대신했다.
“예상했을지도 모르지만, 누구보다 가까이서 보좌하고 싶은 에스퍼가 있었습니다.”
“…….”
“내 손으로 그 사람이 내일을 살아갈 수 있도록 등을 밀어줄 수만 있다면 저는 그 어떤 직업보다도 가이드의 일이 가치 있다고 믿었었죠.”
그건 가장 힘든 팀으로 입사한 후배 강우신을 처음 봤을 때 내가 느낀 감상 그대로였다.
스무 살의 그는 가이드로서, 저만의 확실한 사명감이 있어 보였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가이드가 된 이후로는 번번이 후회하는 일만 가득합니다. 가이드가 되면 에스퍼를 지킬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우신이 마른 눈가를 쓸어내렸다.
“제가 가이드가 된 이후 가장 많이 한 일이 뭔지 압니까?”
“…….”
“피투성이가 된 에스퍼를 가이딩하는 일. 병원에 입원한 에스퍼를 문병 오는 일. 숨을 거둬 가는 에스퍼를 끝까지 가이딩하는 일.”
“…….”
“끊임없는 상실 속에서 제가 할 수 있는 건 가이딩이 아닌 무력한 기도뿐이었습니다.”
신속한 가이딩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게이트에 들어와 우리의 뒤를 지키던 가이드를 기억한다.
우신은 지금껏 잘 숨겨 오던 절박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렇게 오래도록 현장에서 일하면서도 끝내 할 수 있는 게 그것뿐이라는 사실이, 매번 저를 비참하게 만듭니다.”
나는 현장에서 오직 내가 해야 할 일만을 신경 썼다.
빠르고 안전하게 게이트를 클리어하는 것, 그 과정 속에서 가이딩을 받는 건 단순히 수명을 연장하는 일이라 여겼다.
이러다 언젠가 현장에서 숨지게 되더라도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리라 그렇게 여겼다.
감히 누군가 내가 돌아오기만을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우신은 침대 위에 아무렇게나 떨어져 있는 내 손을 쥐었다.
“그래서 이번에 양하나 헌터가 일어나 줘서 진심으로 기뻤습니다.”
“…….”
꿋꿋이 눈물을 흘리지 않은 우신은 그렇게 말을 마무리했다.
나는 그가 잡은 손을 내려다봤다.
틈틈이 잘려 나간 기억 속 선명한 몇 가지 중 하나가 바로 우신의 온기였다.
들끓던 에너지가 차게 식으며 몸이 얼음장처럼 변해 갈 때 뜨겁게 박동하는 우신의 심장 소리와 온기가 계속 내 몸을 데워 주었다.
나를 부르던 절박한 우신의 목소리가, 나 때문에 며칠을 가슴 졸였을 이 남자가…….
이제야 눈에 보였다.
눈시울이 붉어진 우신의 뺨을 쓸었다. 우신이 제 뺨을 훑는 손에 본인의 손을 얹었다.
따뜻했다.
그 순간, 피를 흘리며 내 가슴팍을 밀쳤던 작은 손이 떠올랐다. 누군가는 간절히 소망한 오늘이었다.
“강우신 가이드.”
나는 쥐고 있던 우신의 손을 가슴께에 얹었다.
“난 당신 덕분에 살아 있습니다.”
우신은 고요하게 요동치는 내 심장 박동에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느껴집니다.”
나는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니 이제 괜찮아요.”
“…….”
“그리고 미안해요. 무섭게 혼자 둬서.”
내 말에 우신의 눈동자가 마치 길 잃은 어린아이처럼 이리저리 흔들렸다.
그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다가 이내 눈매를 예쁘게 휘었다.
그러고는 대답 대신 천천히 고개를 숙여 입을 맞춰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