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죽음이 당신에게 미치는 영향
84화
김형도는 죽이 절반쯤 남은 그릇을 쳐다봤다.
“속이 안 좋아서. 그 정도면 충분해요.”
“강우신 가이드가 한 소리 할 거 같지만 잘 둘러대겠습니다.”
곧장 일어날 줄 알았던 김형도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또 무슨 할 말이 남은 건가 싶어 시선을 피하지 않으니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사실 전 강우신 가이드에게 전담 에스퍼가 생겼다고 했을 때, 되게 놀랐어요.”
“…….”
“그 상대가 가이딩 적합도가 낮은 에스퍼라는 말을 듣고는…… 약간 걱정이 됐고요.”
“걱정됐다고요?”
“지금 강우신 가이드의 짝은 양 헌터니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모르긴 몰라도 강우신 가이드에게 성시현 헌터는 다른 에스퍼들과는 다른 의미였을 겁니다.”
“강우신 가이드가…… 날 성시현 헌터의 대체품으로 여기고 있단 말을 하고 싶은 건가요?”
내가 성시현이니 그 말이 그저 묘하게 느껴졌으나 일부러 목소리에 날을 세워 말했다. 김형도는 살짝 당황한 기색이었지만 머지않아 고개를 저어 보였다.
“아니요, 그런 뜻이 아닙니다.”
“…….”
“하지만…… 힘든 건 어쩔 수 없을 겁니다. 분명 다른 사람인데 자꾸만 떠나간 사람이 떠올라서요.”
어쩐지 이런 비슷한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들은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이곤에게서였다.
결은 다르지만 결국 같은 이야기였다. 죽은 성시현이 강우신의 목을 조르고 있다는 것이다.
“아, 죄송합니다. 생각이 많아져 괜한 오지랖을 부렸네요.”
김형도는 그 말과 함께 쟁반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런 말씀 드릴 처지가 아닌 건 알지만…… 아무리 뛰어난 가이드여도, 더 잘하고 싶다는 집념 때문에 당장 눈앞에 있는 것이 보이지 않을 수 있으니까요. 그러니 양 헌터가 그 손 잘 잡아 주세요.”
“…….”
“강우신 가이드에게는 잘 먹고 잠들었다고 하겠습니다. 푹 쉬세요.”
그는 멋쩍은 듯 웃어 보이고는 천막 밖으로 나갔다.
강우신이 내 전담 가이드인 걸 알면서도 가이딩을 권한 거였다니, 그 패기는 여전한 거 같았다.
나는 얼마간 형도의 마지막 말을 되뇌다 약을 먹고 깊은 잠이 들었다.
* * *
약 기운 탓인지 눈을 뜬 건 이미 팀원들이 출발 준비를 다 끝마친 때였다.
담요를 두르고 천막 밖으로 나가는데 마침 우신이 안으로 들어올까 고민 중이었는지 천막 앞을 서성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우신이 우연을 가장하듯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몸은 좀 어때요?”
그 모습을 보자니 괜히 어젯밤 형도의 말이 떠올랐다.
‘이런 모습으로 계속해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건가.’
내가 대답 없이 그를 빤히 쳐다보자, 우신이 조심스럽게 내 이마에 제 손등을 댔다.
“어제랑 비슷한 거 같은데…….”
걱정스러운 목소리에 문득 김형도의 말이 스쳤다.
“당사자가 본인의 상태를 있는 그대로 말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적합도뿐 아니라 접촉 방식에 문제가 있는 걸 수도 있으니까요.”
어째서인지 접촉 방식이라는 말이 계속 마음에 걸렸지만, 단순한 열 감기 때문에 그를 신경 쓰이게 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걱정스러운 눈을 한 우신을 바라보고는 안심하라는 듯 말을 이었다.
“아니에요, 사흘 동안 병간호해 준 덕분에 이제 거의 멀쩡해요. 오늘 전투에 참가할 수 있을 정도로요.”
내 말에 우신이 얼굴을 찌푸렸다. 나는 픽 웃으며 그의 미간을 살짝 눌렀다.
“표정 풀죠. 말만 그렇다는 거니까.”
“권미래 헌터가 다 나았다고 할 때까지는 몸 사려요.”
“강우신 가이드, 집합입니다.”
조이현의 부름에 우신은 작은 목소리로 다녀오겠다고 말하며 뒤를 돌았다.
어쩐지 뒤돌아선 그의 등을 보자니 이상한 마음이 들었다. 생각해 보니 여태까진 상황이 반대였다.
우신이 항상 이렇게 떠나가는 내 등을 보고 서 있었을 것이다. 그의 그늘에서 본 기억처럼 말이다.
위험한 곳으로 떠나는 사람을 무력하게 지켜만 봐야 일은 생각보다 더 마음을 무겁게 했다.
나는 불쑥 그의 손을 잡았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란 듯 우신은 몸을 꼿꼿이 세우고 나를 돌아봤다.
동그래진 눈이 나를 쳐다봤다. 나도 그 손을 왜 갑자기 잡은 건지 설명할 수가 없었다.
어제 그런 말을 들은 탓인지, 혹은 아직 남은 열 기운 탓인지는 모른다.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마른 입술을 혀로 축이고 입을 열었다.
“빨리 다 나을 테니, 다치지 말고 와요.”
내 말에 우신의 눈이 커졌다. 그는 이내 환하게 웃어 보였다.
“당연하죠. 양 후배의 말이면 그게 뭐든 들어 주겠습니다.”
장난스러운 어투였지만, 어쩐지 기뻐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팀원들이 마지막으로 정비하는 모습을 보고 있는데, 지민이 나에게 짧게 뒤를 부탁한다는 말을 남겼다.
팀원들이 떠나고 속이 따뜻해지는 죽으로 한 끼를 든든하게 먹고 나니 컨디션이 조금이나마 회복된 거 같았다.
나는 곧장 지원과 형도를 불러냈다. 직감대로 저수지가 진짜 클리어 루트라면 우리도 한가하게 있을 수만은 없었다.
“응급 천막만 두고 나머지는 모두 정리합시다. 저와 지원 씨가 천막을 걷는 동안 형도 씨는 아이들과 눈을 치워 주세요.”
모든 인원이 한꺼번에 꽁꽁 언 길을 걷다가는 사고가 날 수 있었다.
내 말에 두 사람은 힘차게 대답하고는 부지런하게 몸을 움직였다.
한 시간 뒤 강당의 천막 정리가 끝나갈 때쯤, 눈을 치우느라 손과 발이 꽁꽁 언 채로 형도와 아이들이 안으로 들어왔다.
나는 그 모습에 놀라 커다란 담요 여러 장을 가져왔다.
“눈을 어떻게 치웠기에 다 젖은 거예요.”
바지 밑단이 전부 젖은 모습에 인상을 찌푸리자, 형도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아이들을 쳐다봤다.
“애들이 쌓인 눈을 보더니 갑자기…….”
“갑자기?”
“눈을 뭉쳐 던져서, 정말 어쩔 수 없었어요.”
“아저씨도 던졌으면서!”
게이트 클리어 중이라는 긴장감은 찾아볼 수 없는 모습에 헛웃음이 났다.
아이들 중 수아의 손을 잡은 보영의 옷이 가장 많이 젖어 있었다.
“감기 들겠다. 옷 갈아입자.”
내가 보영을 데리고 가려 하는데 아이가 수아의 손을 잡고 놓아 주지 않았다.
수아도 패딩 안에 입은 옷의 소매 끝이 젖어 있었다. 나는 고심하다 입을 열었다.
“수아야, 미안하지만, 보영이랑 함께 옷 갈아입을까?”
내 말에 수아는 보영을 쳐다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로 다른 아이들을 살피려 뒤를 도는데 수아가 내 소매를 잡아당겼다.
돌아보니 수아가 방긋 웃어 보였다.
“무서운데 언니도 같이 가 주세요.”
수아의 입에서 아이다운 말이 나오는 건 처음이었다. 잠시 주춤거리다 김형도가 다른 아이들을 챙기는 모습을 보곤 알겠다고 답했다.
게이트 클리어 중이기에 수아의 마음도 싱숭생숭할 것이라 생각했다.
* * *
나는 아이 둘을 데리고 안쪽 놀이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얇은 이불로 가림막을 만들어 주었다.
“둘이서 옷 갈아입을 수 있지?”
“네!”
“바로 앞에 있을 테니까 도움이 필요하면 불러.”
나는 아이들이 옷을 갈아입는 동안 놀이방을 천천히 돌아보았다.
아이들을 보위하고 놀아 주는 건 주로 지원이나 다른 이들의 몫이었기에 첫날을 제외하고 놀이방에 오는 건 처음이었다.
놀이방을 담당했던 건 지원이었다. 그러고 보니 분명 책상에 인어공주 모형 세트가 있다고 했었다.
문득 그게 생각나 그쪽으로 걸음을 옮기니 바다를 재연했지만 크기가 작아 꼭 저수지처럼 보이는 장난감이 보였다.
그 모습에 옅은 미소를 짓는데, 순간 뒤의 책장이 눈에 들어왔다.
익숙한 책 제목이 보였다.
산사태에서 살아남기, 게이트 브레이크에서 살아남기.
지원의 말에 의하면 이 보육원 출신의 아이들이 시민들 눈 밖에 나며 후원이 서서히 끊겼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책장에는 근래 들어온 것으로 보이는 책이 한 권도 없었다.
대부분 많은 아이의 손을 탄 것처럼 지저분했고, 오래돼 책등이 해진 책도 있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그중에 한 권을 뽑아 들었다. 동물도감이었다.
도감에는 부분부분 모서리가 접혀 있는 장들이 있었다. 두더지, 개미, 거미, 오소리까지.
나는 마지막 장을 펴 보고는 손을 멈췄다. 책의 마지막 장에 독서 기록장이 있었다.
그곳엔 책을 읽은 아이들의 이름이 적혀 있었는데, 한 달에 한 번 이 책을 읽은 눈에 익은 이름이 보였다.
[오수아.]
나는 그 이름을 손으로 한 번 쓸어내리며 입을 열었다.
“수아야.”
내 나직한 부름에 가림막 너머에서 수아가 답했다.
“네, 언니.”
“올해 나이가 어떻게 되니?”
“13살이요.”
책의 발행일은 10년 전이었다. 책의 가장 첫 번째 독서 기록장에 적힌 첫 이름 역시 오수아였다.
“그러고 보니 비닐하우스에서 채소를 키우기 시작한 게 작년부터라며.”
식료품 창고에는 후원으로 들어왔다는 라면이나 통조림이 가득했다.
하지만 이곳에 온 지 사흘이 다 돼가도록 과자를 먹는 아이는 한 명도 보지 못했다.
“감자조림도 수아가 직접 키운 감자로 만든 거라며, 나이답지 않게 그런 걸 대해 잘 아네. 언니는 처음에 비닐하우스 문도 열 줄 몰라서 헤맸는데.”
“……저도 어른들 하는 거 보고 배운 것뿐이에요. 언니도 한 번 알려 주니 곧장 배웠잖아요.”
“그래, 맞아. 한 번 배우니 두 번은 어렵지 않았지.”
게이트 안에 들어온 첫날, 비닐하우스 형태를 한 베이스캠프에 들어갈 때였다.
비닐하우스 옆에 달린 도르래가 문손잡이인 줄 알고 돌려 괜한 곳의 문을 여는 실수를 했었다.
나는 그때를 생각하며 옅은 웃음을 짓다 말을 이었다.
“그런데 언니는 그 이야기한 적 없는데, 어떻게 알았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