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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죽음이 당신에게 미치는 영향 (80)화 (80/183)

내 죽음이 당신에게 미치는 영향

80화

나는 기지개를 켰다. 도로를 건너올 때 너무 긴장한 탓인지 몸이 무거웠다.

축 가라앉은 게 꼭 에너지를 방출하고 가이딩을 오랫동안 받지 못한 몸 같았다.

그러니까 꼭 시현이었을 때의 내가 생각났다. 나는 맞은편에 앉아 있는 우신을 쳐다봤다.

‘바로 어제 그런 가이딩을 받았는데 그럴 리가 없지…….’

그때의 일을 떠올리니 우신의 뜨거운 손의 온기가 되살아나는 거 같았다. 나는 잡생각을 떨쳐 내듯 고개를 좌로 저었다.

때마침 강당 문이 열리면 수아가 고개를 내밀었다.

“아저씨들, 골치 아픈 문제가 있나 봐요. 얼굴색이 어두운 게.”

유제이가 수아 쪽으로 걸어갔다.

“뭐야, 초딩. 혼자 움직이지 말라는 말 못 들었어? 조이현 걔는 뭐 하길래…….”

그때 문이 활짝 열리며 조이현이 한쪽 눈썹을 꿈틀거리며 서 있는 게 보였다.

“여기 있습니다만.”

수아의 등 뒤로 앞치마를 두른 조이현과 지원, 아이 몇몇이 서 있었다.

그들 사이에는 음식이 담긴 은색 카트가 있었다. 조이현이 우리 쪽을 바라보며 목소리를 높였다.

“아이들이 밥을 나눠 먹고 싶다고 해서요.”

그 말과 동시에 아이들이 배식 카트를 밀며 강당 안으로 들어왔다. 형도는 놀란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 무거워 얘들아? 내가 밀게.”

유제이는 상황 잘 돌아간다며 생존자들, 그것도 애들한테 식량을 나눠 받는 건 또 처음이라고 실없이 웃어 보였다.

나는 무거운 어깨를 주무르며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는데, 일순 카트를 밀며 들어오는 한 아이에게 시선이 닿았다.

유독 수아에게 껌딱지처럼 붙어 있던 보영이라는 어린 여자아이였다.

보영은 푸른빛의 천을 헤어밴드처럼 착용하고 있었는데, 그 천이 어딘가 낯익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 * *

아이들이 끌고 온 배식 카트에 커다란 국 통이 있었다.

옆에 있는 다른 통의 뚜껑을 열자 따뜻한 김이 쏟아져 나왔다. 그 안에 감자조림이 가득 담겨 있었다.

수아 언니와 큰오빠의 솜씨라며 웃어 보이는 보영이는 근래에 아랫니가 빠진 듯 발음이 샜다.

나는 보영이에게 다가갔다.

“고마워. 큰오빠라면 안경 쓴 남자아이를 말하는 거니?”

“네! 큰 오빠 요리 대박 잘해요.”

아까 내게 식량 창고를 보여 준 아이를 말하는 모양이었다.

나는 보영의 헤어밴드에서 잠시 시선을 떼고는 감자조림을 보며 크게 감탄했다.

“진짜 맛있어 보이는데? 이걸 이모랑 삼촌들 나눠 줘도 괜찮아?”

어울리지 않게 목소리를 반 톤 올린 탓에 삑사리가 났다. 나는 어색함에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어느새 내게 가까이 다가온 강우신이 그런 나를 보고 쿡쿡, 자그맣게 웃더니 나직하게 물었다.

“뭘 원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물으면 아이가 뒷걸음질 치지 않을까요?”

나는 민망함에 얼굴이 붉어져 그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툭 쳤다.

“누구 좀 따라 했더니 이 모양이네요.”

“설마 그 누구가 저는 아니죠?”

대답 대신 그를 째려보자, 우신이 웃으며 보영과 눈을 마주했다.

“고마워, 잘 먹을게.”

제법 부드러운 미소가 자연스러웠으나, 원체 큰 덩치 때문인지 보영은 놀란 듯 밥차 뒤에 몸을 숨겼다.

그 모습에 나는 겨우 웃음을 삼키며 말했다.

“아무래도 저번 일은 수아가 대단했던 거 같네요.”

“…….”

그런 우리 두 사람을 보다 못한 지원이 식판을 들고 배식을 시작한다고 외쳤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한 명씩 줄을 서서 음식을 받아 갔다.

우리는 배식받으며 아이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한마디씩 덧붙였다.

덕분에 보영의 표정이 한결 좋아졌다.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아이에게 말을 걸었다.

“보영아.”

“응?”

“이모가 밥 먹을 때 이렇게 머리카락이 흘러내리는데 어떻게 하면 좋을까?”

내 물음에 보영이는 의기양양한 얼굴로 답했다.

“묶으면 되지!”

“보영이 엄청 똑똑하구나, 그런데 언니가 머리 끈이 없는데 혹시 보영이 걸 언니 밥 먹는 동안 빌려줄 수 있을까?”

내 물음에 보영이는 주저하듯 미간이 찌푸려졌다.

“이거 수아 언니가 준 건데.”

보영이는 식판을 앞에 두고 먹지 못하고 있는 내 모습에 결심이 선 듯 헤어밴드를 벗어 건넸다.

꼭 돌려줘야 한다고 말하는 보영이에게 고맙다고 인사하고는 곧장 밴드를 살폈다.

“역시.”

* * *

조이현이 천막을 젖히며 안으로 들어왔다.

“수아 데려왔어요. 들어오라고 할까요?”

민지민이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자, 수아가 안으로 들어왔다.

천막 안에는 민지민과 이 팀장 그리고 강우신과 한 손에 푸른 천을 들고 있는 내가 있었다.

수아는 내 손에 들린 천을 보자마자 자신을 왜 불렀는지 알아챈 것 같았다.

나는 그걸 확인하고는 천을 책상 위에 올려 두며 말을 이었다.

“보영이 말을 들어 보니 수아 네가 이 천을 줬다면서.”

“네, 주웠거든요.”

“어디서?”

“…….”

“거짓말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수아, 네가 영리한 아이라는 거 알고 있어. 그러니 이 중에 네 거짓말을 어렵지 않게 알아낼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걸 수아도 알고 있겠지?”

수아는 내 말에 어떤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나는 침착한 얼굴과는 달리 목이 탔다.

그 천은 이번 게이트 참가 길드에게 나눠 준 것이었다.

우리 팀에겐 황금색 천이, 오델리아 팀에게 청록색 천이 각각 쥐어졌다.

천 끝에 미세하게 박힌 심벌 모양의 자수가 그 증거였다.

돌아오는 길에 수아가 묶어 둔 푸른 천을 하나씩 회수했다.

그때마다 미묘하게 길이가 달랐던 천들은 보영이 머리에 두른 것과 똑같았다.

보영이 밴드로 쓰고 있던 천만 길이가 길었는데, 잘리지 않은 끄트머리에 자수가 새겨져 있었다.

육 차선 도로에 헌터에게 당한 듯 단번에 처리된 몬스터의 사체가 있었지만 소복이 쌓인 눈 때문인지 헌터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그런데 그들의 흔적이 이 게이트 안에서 가장 안전해 보이던 보육원 안에서 나왔다.

팀원들에게 이 사실을 전하자마자, 민지민은 수아를 불러와 머릿속을 확인해야겠다고 답했다.

“어려운 일도 아니잖아. 괜히 시간 낭비하지 말고 바로 시행하지.”

나는 그의 말에 얼굴을 굳혔다.

그의 말처럼 에스퍼도 아닌 어린아이의 정신을 훑는 것쯤은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는 말에는 동의한다. 하지만 그가 한 가지 말하지 않은 사실이 있다.

어린아이의 정신을 살피는 일은 위험했다. 잘못하다가 정신 세계를 침범하면 인격이 완전히 무너질 수도 있었다.

낮은 확률이긴 했으나, 여긴 게이트 안이었다. 그런 사고가 일어나면 손쓸 수가 없게 된다는 말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의 말에 곧장 반대했다.

“능력을 쓰지 말자는 소리가 아닙니다. 기회를 주자는 겁니다. 아이에게 물어봐서요.”

내 말에 민지민은 주저 없이 이 팀장을 돌아봤다.

“길드장님, 부탁드리죠.”

“민지민 헌터.”

“선배님. 그게 양 헌터가 날 부르는 호칭으로 마땅하죠. 호칭 좀 똑바로 불러 주면 좋겠는데.”

그는 내가 마음에 안 드는지 괜히 엄한 것으로 물고 늘어졌다.

조금만 더 신경을 긁었다가는 사고 칠 얼굴이었다. 내가 조용해지자 그는 이 팀장을 종용했다.

“피차 게이트에서 한시라도 빨리 나가야 이득인데, 어떠세요.”

“…….”

나는 말없이 이 팀장을 바라봤다.

이 팀장은 정이 아닌 정보로 움직인다. 그의 판단을 가늠하기 힘들었다.

일순 이 팀장과 눈이 마주쳤다. 그의 눈이 묘하게 가늘어지더니 결정이 선 듯 말을 이었다.

“우선 양 헌터 말처럼 수아를 불러 대답을 들어 봅시다. 원하는 답이 안 나오면 그때 제가 아이의 정신 속으로 침입하겠습니다.”

“…….”

그의 말에 민지민은 못마땅한 얼굴이 됐다.

이 팀장은 수아의 대답이 또 다른 정보를 줄지도 모른다고, 두 마리의 토끼를 잡는 일이라며 그를 진정시켰다.

민지민은 수아가 조금이라도 거짓말하거나 답하길 거부하는 순간 주저 없이 능력을 써 달라고 말했다.

덕분에 나는 답을 고르는 수아의 모습에 심장이 뛰었다.

수아가 아무리 영리하다 해도 거짓말로 이야기를 꾸며 내려 한다면 이 팀장은 곧장 알 수 있었다.

그때 수아의 달싹이던 입술이 열렸다.

“인어.”

“응?”

“인어가 사는 저수지가 있어요.”

“…….”

나는 말없이 이 팀장을 바라봤다. 이 팀장은 그것이 거짓말인지 아닌지를 확인하기 위해 제 손바닥 위에 살짝 닿은 수아의 손끝에 눈을 맞추고 있었다.

이내 사실이라는 걸 확인한 듯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안심한 듯 말을 이었다.

“저수지라면 샛길을 따라 안쪽으로 들어가면 나오는 곳을 말하는 거니?”

지난밤 지도를 모두 숙지한 덕에 수아가 말하는 저수지가 어딘지 머릿속에서 그릴 수 있었다.

내 물음에 수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서 그 천을 주웠다는 거야?”

“네.”

“사람은.”

불쑥 민지민이 끼어들었다. 그는 차가운 눈으로 수아를 내려다보며 단호하게 물었다.

“네가 그 저수지에서 본 게 그 천뿐이야?”

“…….”

이 팀장은 수아의 말과 호흡에 집중했다. 짧은 정적에 주변의 공기가 무거워졌다.

그리고 수아가 눈을 내리깔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저수지엔 가방이나 천 같은 거밖에 없었어요. 그전에 언니, 오빠와 비슷한 복장을 한 사람들이 그 저수지 쪽으로 가긴 했지만…….”

“뭐?”

나는 이마를 짚으며 되물었다.

“저수지로 갔다는 건, 이 보육원을 지나갔다는 건데. 왜 남아 있는 사람이 없어?”

“한 사람도 안 남고 모두 저수지로 갔으니까요.”

나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이 팀장을 바라봤고, 그 역시 암담한 표정이 되어 고개를 끄덕였다.

수아의 말이 전부 사실이라는 의미였다.

우리보다 먼저 이 어린 생존자를 발견한 팀이 있었으며, 그 팀이 생존자보다 다른 무언가를 우선시했다는 것까지도 말이다.

“너는 그 저수지를 왜 갔던 거지?”

예상치 못한 말에 각자 조용히 생각을 정리하고 있을 때, 우신이 나직하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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