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죽음이 당신에게 미치는 영향
79화
조이현은 B급 물리계 에스퍼였다.
등급은 낮지만 능력 컨트롤을 자신의 강점이라 자부한 만큼 꽤 실력이 있는 사람인 듯했다.
그는 제 의견을 피력하는 데 주저함이 없으며 묘한 신뢰감까지 주었다.
아마 그의 단단하고 일정한 목소리 톤 때문인 거 같았다.
“수아를 처음 발견한 것도 이 도로였습니다. 열 걸음에 한 번씩 멈춰 서는 모습에 몬스터가 아닐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그게 표시를 남기는 모습이었나 봅니다. 그러니 되돌아가는 길을 알고 있다는 말은 거짓말이 아닐 겁니다.”
수아는 조이현의 말이 맞는다는 듯 입을 꾹 다문 채 우리를 둘러봤다.
“여러분이 오길 기다리는 동안 수아는 제 지시를 묵묵히 따라 줬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게이트 안에서 이 주 가까이 살아남은 아이입니다.”
입고 있는 패딩은 엉망이었지만 수아는 크게 다친 곳 없이 멀쩡했다.
“어린 나이지만 우리 모두 나이가 중요한 게 아닌 걸 알잖아요.”
수아의 말을 믿어 보자는 말이 생략됐지만, 그의 의견은 충분히 전달되었다.
민지민과 이 팀장을 바라봤다. 이제 결정은 그 두 사람의 몫이었다.
“수아가 표시해 놓은 길을 따라가 보죠. 단체로 이동하되 조는 나누어 1조가 안전을 확보하면 2조에 사인을 주는 식으로요.”
이 팀장은 이미 결정이 선 듯 그렇게 말했다. 이제 남은 건 민지민뿐이었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민지민은 잠시 고민에 빠진 듯 제 아래턱을 매만지다 입을 열었다.
“되도록 빠르게 움직이도록 하죠.”
* * *
조는 편의상 민지민이 속한 선발과 조이현이 속한 후발 팀으로 나뉘었다.
선발팀은 수아가 남긴 표식을 보고 즉각적인 판단과 대응이 가능한 사람들로 구성했다.
표식을 확인할 수아를 포함해야 했기에 민지민과 유제이, 이 팀장, 한지원 등 주요 팀원이 선발에 들어갔다.
민지민은 나 역시 선발에 서길 원한다고 말했다.
이유는 물을 필요도 없었다.
하수도 입구에서 내가 주먹거머리를 밀어내는 걸 본 후 태도가 돌변했다.
민지민은 어떤 재미있는 상황이 일어나길 바라는 얼굴로 주야장천 나와 지원을 붙여 뒀다.
한지원은 티 내지 않으려 하지만 안색이 어두운 게 기가 죽어 있었다.
“제가 하천에서 그랬죠.”
“네?”
“어제 나눈 대화는 어제에 묻어 두고 오라고.”
지원은 그제야 그 말이 생각난 듯 작은 탄식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 사실 저도 들은 말입니다.”
한 소리 들을 줄 알았는지, 내 고백에 지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누가 그러더라고요. 나눴던 마음과 말은 어디까지나 지난 일이라고.”
강우신이 내게 건넨 그 말이 나도 모르는 사이 제법 마음속에 깊이 자리매김한 듯했다.
그렇게 베테랑다운 말을 할 줄이야. 나는 그럴듯하게 그 말을 흉내 낸 것뿐이었다.
“그러니까 현재에 최선을 다하라고요. 내가 있으니까.”
지원은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여 답했다. 눈빛을 보아하니 마음의 짐을 조금 덜어 낸 모양이었다.
그 이후 선발과 후발은 100m 거리를 두고 걸음을 옮겼다.
지난밤 폭설과 강한 바람이 휘몰아쳐 표식이 없어지지 않았을까, 걱정했는데 다행히도 눈에 띄었다.
하얀 눈에 뒤덮인 풍경 속에서 긴 푸른색 천이 너풀거렸다.
큰 도로를 따라 어지럽게 즐비한 자동차의 사이드 미러나 전봇대 등에 수아는 아주 단단하게 푸른 천을 묶어 놓았다.
이 팀장은 그 천을 가까이에서 확인하고는 수아에게 옭매듭을 누구에게 배웠냐고 물었다.
수아는 보육원에 있는 모든 아이는 그 매듭을 묶을 줄 안다는 두루뭉술한 답을 주었다.
안전하다는 아이의 말은 절반만 맞고 절반은 틀렸다. 천을 따라 걸어오는 동안 트랩이 없는 건 사실이지만, 몬스터가 없던 건 아니었다.
다만 그것들은 이미 모두 죽어 있었다.
무언가 날카로운 것에 단번에 급소를 찔린 듯한 몬스터의 사체를 쳐다보며 나는 작게 입을 열었다.
“아무리 봐도 아마추어의 솜씨는 아니죠.”
내 나직한 말에 이 팀장이 나를 힐끔 쳐다보다 몬스터의 사체로 시선을 옮겼다.
“그래요. 적어도 훈련받은 헌터의 실력입니다.”
“그렇다는 건.”
“네. 아마 이 길을 이미 다른 팀이 지나갔다고 생각하는 게 맞겠죠.”
우리의 눈앞에 어느덧 육 차선 도로의 중간 샛길이 보였다.
샛길은 오르막길이었는데 구불구불한 산길을 얼마간 오르자, ‘큰솔 녹음 보육원까지 200m’라는 표시판이 세워져 있는 게 보였다.
* * *
“자자, 두 줄로 서 볼까요? 거기 친구도 이리로 와야지요, 자꾸 어딜 가!”
“…….”
아이들을 통제하겠다고 나선 곽현주는 줄을 이탈하는 아이를 잡겠다고 보육원을 뛰어다녔다.
그 탓에 정신이 없었다.
수아는 영리한 아이였다. 자신이 원하는 것은 똑바로 말하면서도 답하기 곤란한 질문을 받으면 알아듣지 못하는 척했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있으면 아이의 안에 들어 있는 게 사실은 서른 살쯤 된 여자가 아닐까 싶었다.
그럼에도 보육원에서는 자신이 가장 언니라는 수아의 말을 크게 귀담아듣지 않았다.
게이트 안에서 한 달을 생존한 생존자 무리의 리더가 어린아이라니.
그저 보육원에 가면 아이들을 통솔하고 있는 어른이, 하다못해 수아보다는 나이 많은 아이가 있을 거라 막연히 생각했다.
그렇기에 보육원에 도착한 우리는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다.
그곳엔 정말 수아의 또래 혹은 더 어려 보이는 아이들만 열 명 가까이 있었다.
때마침 보육원 안을 둘러보고 온다던 지원과 백건희가 돌아왔다. 둘은 당혹감에 물든 얼굴로 고개를 저어 보였다.
“정말 여기 있는 아이들이 전부예요.”
그 말에 나는 민지민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에요?”
“글쎄요, 이건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라서.”
민지민의 표정 위로 당황스러운 마음이 비쳤다. 나도 비슷한 마음인데 그는 오죽할까. 나는 수아를 살폈다.
하나 다행인 점이 있다면 아이들의 표정이 밝다는 것이다.
게이트 속에서 만 14세 미만의 아이들이 살아남는 데는 천운이 필요하다.
그만큼 희박한 확률인데 여기 있는 아이들은 표정까지 밝아 보였다.
왁자지껄한 보육원의 정경만 보면 여기가 게이트 안이라는 걸 잠깐 잊게 될 정도였다.
아이들 몇몇이 수아의 품 안에 안겨 들었다.
“언니 말 잘 듣고 있었어요.”
아이들의 상태를 확인한 권미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건강 상태도 아주 양호해요.”
권미래의 말에 누구도 쉽게 말을 잇지 못했다. 묘한 기류가 흘렀다. 보다 못한 조이현이 손뼉을 쳐 분위기를 환기했다.
“일단 다행이라고 생각합시다. 아이들이 이렇게나 많이 살아 있으니 다행이죠. 안 그렇습니까? 어떻게 된 일인지는 천천히 알아보는 거로 하자고요.”
“하지만 애들이 지나치게 밝은 거 아니야?”
유제이가 삐딱하게 말했다.
“게이트에 휩쓸리면서 이 주변이 초토화가 됐어. 중심 도로가 그 모양이 된 걸 우리 모두 걸어오며 봤잖아. 그런데 어떻게 여기만 이렇게 아무 일 없는 것처럼 평온할 수 있지? 일단 나는 납득 못 해.”
유제이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었지만, 그렇게 물고 늘어져도 조사해 보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
여기서 목소리를 높이는 건 불안감만 조성할 뿐이다.
수아를 보고 진정됐던 아이 몇몇이 이쪽을 힐끔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일단은 여길 베이스캠프로 지정하고 조사 들어가자고.”
조이현이 질린다는 표정으로 그렇게 말했다.
유제이와 그가 미묘한 신경전을 벌였지만, 이 팀장과 민지민이 각각 제 팀원을 데려가며 상황은 종료됐다.
나는 수아 주변에 모여든 아이들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 모습에 권미래가 다가와 입을 열었다.
“아이들이 편안해 보이는 건 다행이지만, 유제이 헌터의 말처럼 어딘가 묘한 건 사실이에요.”
그녀의 말에 나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편안해 보인 다라……. 그것보다는 꼭 뭐에 홀린 거 같네요.”
권미래가 계속해서 나를 쳐다보는 게 느껴져 어디까지나 기분 탓이라고 말을 맺어 버렸다.
궁금한 점이 한두 개가 아니었지만, 가장 궁금한 건 식량 문제였다.
수아 또래 정도로 돼 보이는 남자아이가 우리 주위를 지나가길래, 그에 대해 묻자 주방으로 안내해 주었다.
주방 뒷문으로 나가면 보이는 식료품 창고에는 라면이나 통조림, 견과류 같은 보존 식품이 가득했다.
“이게 전부 뭔가요?”
내 물음에 아이가 무표정한 얼굴로 답했다.
“비정기적으로 후원 용품에 식자재가 섞여 오거든요.”
그러니까 아이의 말을 정리하면 이랬다.
운이 좋게도 게이트가 터지기 직전, 식자재 대신 보존 식품을 후원받았고 그것들을 알맞게 소분해 먹고 있었다는 거다.
그 말을 듣고 어딘가 꺼림칙한 마음으로 복도를 걷는데, 보육원 입구 게시판에 걸린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이사장으로 보이는 어른을 중심으로 어린아이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사진 하단에 찍힌 날짜를 보니 10년 전 사진이었다.
나는 그것을 물끄러미 쳐다보고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 * *
저녁이 되자 아이들이 수아를 이끌고 식당으로 향했다.
그 모습을 본 지원과 조이현이 도와주러 가겠다며 아이들의 뒤를 따라갔다.
나머지 인원은 식당과 복도로 이어진 강당에 천막을 치고 각자의 짐을 정리했다.
식량 창고를 다녀온 내가 남자아이의 말을 그대로 옮기자, 둘러앉은 팀원들은 더 묘하다는 표정이 됐다.
배식뿐만 아니라 보초, 전방 감시 등 보육원에는 엉성하지만 체계라는 게 잡혀 있었다.
복도에 묶인 빨랫줄에 빨래를 널던 아이에게 이런 건 누구에게 배웠냐고 물어보니…….
나는 아까의 일을 떠올리며 책 한 권을 꺼내 보였다.
<산사태에서 살아남기>
“이런 시리즈의 책이 놀이방에 잔뜩 있어요. 화재 예방 수칙, 겨울 작물 관리 수칙 그리고 자매품으로 게이트에서 살아남기 등등.”
10년 전에 발행돼 지금은 절판된 책들이었다.
유제이는 헛웃음 쳤다.
“이런 걸 보고 배워서 애들끼리 멀쩡히 살아남았다는 걸 믿으라고? 차라리 우리가 단체로 최면에 걸렸다는 게 더 믿음 가겠다.”
모두 비슷한 생각뿐이지만 굳이 말로 내뱉진 않았다.
알아보면 알아볼수록 혼란한 마음만 커질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