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죽음이 당신에게 미치는 영향
76화
“눈이 내리네요……. 그것도 아주 많이.”
어처구니없어하는 김형도의 말처럼 하수구 밖 세상이 온통 새하얗게 변해 있었다.
게이트는 현실과 다르게 시간이 흐르기 대문에 게이트 밖과 날씨가 다른 것 정도야 그리 놀랄 일이 아니다.
우리가 놀란 건, 게이트 안에서 구획이 나뉘어 날씨가 달라졌다는 점 때문이었다.
곽현주는 멍한 얼굴로 손바닥 위에 떨어지는 눈송이를 바라보며 말했다.
“도시 밖은 비가 내리긴 해도 봄 날씨였는데…… 지금 여긴 아무리 봐도 한겨울이네.”
“그래.”
멍한 얼굴의 곽현주와 유제이를 일깨우듯 민지민이 손뼉을 쳤다.
“뭘 구경하고 있어, 체온 떨어지기 전에 옷 입어.”
그 말에 나도 짐 가방 가장 바닥에 있던 바람막이를 꺼내 입으며 주변을 살폈다.
하수구 주위는 대부분 논과 밭밖에 없었다. 그 뒤로 삐죽 솟아 있는 회색빛의 건물들이 작게 보였다.
저곳이 생존자가 확인된 중심 도시일 것이다.
점퍼를 챙겨 입은 형도가 이 팀장에게 가까이 가 입을 열었다.
“조이현은 어디 있습니까.”
이 팀장과 함께 먼저 하천을 건너갔다는 팀원을 말하는 듯했다.
“이현이는 도시 초입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어. 마침 여러분께 드릴 말이 있습니다.”
점퍼의 지퍼를 목 끝까지 올린 민지민이 어서 말하라는 듯 이 팀장을 바라봤다.
이 팀장의 얼굴 위로 잠시 걱정의 빛이 흘렀다.
“생존자 무리가 어디 있는지 찾은 거 같습니다.”
그의 말에 우리는 놀라 서로 시선을 주고받았다. 민지민은 한 손을 들어 모두의 이목을 집중시키더니 물었다.
“정확히 말씀해 주시죠. 찾았다는 것도 아니고 같은 건 뭡니까.”
이 팀장은 침착하게 김형도에게 짐 가방을 건네고 그가 업고 온 박이설을 안아 들었다.
그러고는 뒤로 돌아 중심 도시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자세한 건 직접 보시는 편이 좋을 거 같습니다. 멀지 않으니 신속하게 움직이죠.”
* * *
우리는 도로를 따라 일직선으로 걸었다.
도심에 가까워질수록 길가에 엉망으로 세워진 차들이 늘어났는데, 개중에는 문이 열려 있거나 창이 깨진 것들도 있었다.
도로 위로 당시의 긴박한 상황이 고스란히 보이는 듯했다.
탐사 팀의 말에 따르면 중심 도시의 외곽을 따라 흐르는 강력한 전류는 모두에게 공평하게 작용하고 있다.
우리 같은 구조 팀에게도 장애물이지만, 돌려 말해 밖에서 도시 안으로 진입하려고 하는 몬스터들을 막는 방패가 된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걸 본 송대현은 전류가 게이트 주인의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게 중심 도시 안에 있는 생존자들을 고립시키는 동시에 보호하고 있다고 말이다.
기억을 되짚다 보니 어느새 도시 초입에 도착했다. 이 팀장은 제 팀원인 조이현이라는 자에게 무전을 했다.
머지않아 건물 틈 사이로 판초 우의를 입은 키 큰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작은 꽁지 머리를 한 남자는 낮게 손을 흔들며 이쪽으로 다가왔다.
그가 주차된 차를 피해 모습을 완전히 드러내자, 그를 따라온 웬 아이가 보였다.
롱패딩을 입은 새카만 머리칼의 여자아이가 멀뚱히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 팀장의 바로 옆에서 걷던 민지민은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걸음을 멈춰 세웠다.
“설마 생존자가?”
민지민의 물음에 이 팀장은 보는 대로라며 입을 열었다.
“네, 보시다시피 생존자입니다.”
초등학교 고학년 정도로 보이는 아이의 키에 민지민의 미간이 좁아졌다.
“발견 장소는요.”
“도시 초입부, 그러니까 우리가 서 있는 이곳에서 발견했습니다.”
이 팀장은 슬쩍 아이와 조이현을 등지고 말을 이었다.
“형도와 합류 전에 근처의 동태를 파악하기 위해 이 근방으로 거처를 옮기고 있었는데, 딱 마주쳤습니다.”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합니까?”
운이 좋다는 말로는 설명되지 않았다. 게이트가 열리고 열흘이 훌쩍 지났다.
그동안 어린아이가 혼자 살아남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몬스터의 위협만이 다가 아니다. 폭설이 내리고 있었다.
체온과 식사, 위생을 신경 써야 할 뿐만 아니라 사람도 조심해야 한다. 그런 악조건 속에서 아이가 혼자 살아남았다니.
“말이 안 되잖아요. 그래서 물어는 봤습니까?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지민의 말에 조이현이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입을 떼려는데, 불쑥 앳된 목소리 하나가 끼어들었다.
“생존자가 모여 있는 곳을 알고 있어요.”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든 건 다름 아닌 여자아이였다.
아이는 추위에 붉어진 제 손끝을 호호 불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을 이었다.
“혼자가 아니거든요. 여기 육 차선 도로를 따라 이동하면 중간에 샛길 하나가 나오는데 거길 따라 걷다 보면 보육원이 하나 있어요. 거기 생존자가 모여 있고요.”
“어린애가 무슨 길을 그렇게 빠삭하게 외웠대?”
아이의 말에 곽현주가 신기하다는 듯 말했다.
그녀의 말처럼 아이는 이런 상황 속에서도 당황하거나 두려워하는 기색이라곤 하나도 없어 보였다.
그런데 조이현의 얼굴이 거의 사색이 됐다.
그렇게까지 충격받는 것에 이상함을 느낀 찰나, 조이현이 곧장 입을 열었다.
“너 말할 줄 알았어?”
“말 못 한다고는 한마디도 안 했는데.”
“아니, 말을 못 한다는 게 아니라, 여태 말 한마디를 안 했잖아!”
조이현은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말했다.
이 팀장은 머리가 지끈거리는지 제 이마를 짚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민지민이 설명을 바라는 얼굴로 그를 쳐다보자 이 팀장이 말을 이었다.
“발견 당시 상태가 멀쩡했기에 당연히 주변에 이 아이를 돌본 생존자가 있을 거라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곧장 아이에게 인적 사항이나 주변에 어른들이 어디 있냐고 물었습니다만…….”
“아무런 대답을 안 했죠. 이름이 뭐냐고 물어봐도, 배고프냐고 물어봐도, 어디서 왔냐고 물어도 묵묵부답.”
조이현은 배신감을 느낀 사람처럼 헛웃음을 쳤다. 아이는 그런 두 사람의 반응을 개의치 않아 하는 듯했다.
그 모습에 지원이 어색한 미소를 짓자, 아이가 툭 말을 뱉었다.
“이름은 수아예요, 오수아.”
“…….”
수아는 그렇게 말하고는 센터 멤버들을 바라보았다. 한 사람 한 사람을 뜯어보는 아이의 눈빛이 어딘가 예사롭지 않았다.
이내 수아는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말을 이었다.
“합류를 기다린다는 사람은 이게 전부인가요? 종일 기다리길래 무슨 대단한 사람들이 오나 했는데.”
“뭐?”
유제이가 울컥하자, 옆에 서 있던 권미래가 그의 가슴께를 툭 치며 애가 하는 말에 왜 진심으로 열받아 하냐고 말했다.
나 역시 권미래와 같은 생각이긴 했으나 수아의 시선은 일반적인 ‘초등학생’이라고 말하기에는 어딘가 묘했다.
수아는 내 시선을 모른 척 불만족스러운 얼굴로 팔짱을 껴 보였다.
아이가 팔을 들어 올리자 그제야 롱패딩에 적힌 글자가 보였다.
“큰솔 녹음 보육원.”
내 말에 그제야 민지민도 그 글자로 시선을 돌렸다. 그는 가지고 있던 지도를 살펴보더니 재미있다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우리 수아가 이야기한 생존자가 큰솔 녹음 보육원에 모여 있나 보네. 수아도 거기서 나왔구나?”
“……네.”
“수아가 말한 그곳에서 여기까지 오려면 아무리 빨리 달려도 20분은 걸렸을 텐데. 몬스터와 사고 현장을 지나쳐 어떻게 혼자 왔을까. 아니지…… 왜 여기까지 나와 있었어?”
어느새 수아의 바로 코앞에 선 민지민이 그렇게 말했다.
꼿꼿하게 서서는 수아를 내려다보는 탓에 아이의 머리 위로 그림자가 졌다. 그 모습은 다 큰 어른이 봐도 위압적으로 보였다.
그럼에도 수아는 눈 한 번 끔뻑이지 않았다.
“아저씨는 겁쟁이라 잘 모르겠지만 별로 안 위험해요.”
“…….”
그 모습에 작은 실소가 났다. 겁을 주려고 해도 수아 앞에서는 그 어른의 꼴만 우스워졌다.
어려서부터 게이트에서 일한 투박한 놈들만 있으니 다들 아이에게 다가가는 일에 서툴렀다.
나 역시 그렇고 말이다.
그 순간 누군가 내 옆을 쓱 지나치더니 수아의 앞에 섰다.
“수아라고?”
아이의 이름을 부르는 낮은 목소리는 강우신의 것이었다.
나는 그 모습에 질겁하듯 눈을 크게 떴다. 이 중에서도 가장 수아에게 가까이 가지 않았으면 싶은 게 강우신이었다.
저 녀석이 웃을 때는 몰라도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목소리를 깔면 상당히 위협적이니 말이다.
“강우신 가이드?”
내가 그를 말리려고 한 발 떼는데, 강우신이 무릎을 굽혀 수아와 눈높이를 맞췄다.
“내 이름은 우신이야, 강우신. 눈이 많이 내리는데 수아는 안 추워?”
“응, 난 안 추워.”
“그래?”
우신은 그렇게 말하고는 제 호주머니에서 핫팩 하나를 꺼내 들었다.
척 보기에도 온기가 묻어나는 핫팩을 우신은 조심스럽게 내밀어 보였다.
“핫팩이야. 이렇게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할수록 더 따뜻해져. 근데 내가 손이 아파서…… 수아가 도와줄래?”
그는 정말 곤란하다는 목소리로 도움을 구했다.
아이는 탐탁지 않게 그 모습을 바라보다 어린애 취급하지 말라며 핫팩을 받아 들었다.
우신은 입매를 부드럽게 올려 웃어 보였다. 핫팩을 쥔 수아의 손끝이 붉게 부르터 있었다.
춥지 않다고 했지만 바깥 생활을 오래 해 체온이 많이 떨어져 있는 게 분명했다.
“왜 진작 핫팩을 안 줬어요?”
내가 조이현에게 그렇게 묻자, 그는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말했잖아요. 아무 말도 안 하고, 우리 주변을 맴돌기만 했다고. 그런데 저희가 주는 걸 받았을 거 같습니까? 주머니에 넣어 주면 제 얼굴에 집어 던졌습니다.”
대충 상황이 어땠을지 짐작이 갔다. 수아에게 핫팩을 건넨 우신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원래의 건조한 말씨로 말을 이었다.
“이틀 동안 머물렀던 캠프가 어디입니까. 우선 거기로 이동해서 마저 이야길 나누죠.”
“보육원이라는 키를 얻긴 했지만, 애 말만 믿고 전 인원이 움직이는 건 리스크가 있어요. 자리를 옮겨서 재정비하고 가죠.”
민지민은 우신이 한 말을 조금 정리해서 말하며 자신도 그럴 생각이었다는 걸 어필했다.
‘유치하기는.’
그러자 조이현이 모두 따라오라며 앞장섰다.
그는 수아의 손을 잡아 주려 했지만, 아이는 누가 제 몸에 손대는 게 진절머리가 나도록 싫었는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수아는 그저 우신에게 받은 핫팩만 주물럭거리며 조이현의 뒤를 따라 걸었다.
나는 얼마간 조그마한 아이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뒤를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