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죽음이 당신에게 미치는 영향
75화
몸이 앞으로 꼬꾸라지는 건 한순간이었다. 김형도는 박이설을 놓친 채 물살에 쓸려 그대로 넘어졌다.
우신이 빠르게 박이설의 옆구리 사이로 두 손을 넣어 그녀를 건져 냈지만, 그 과정에서 상처 부위가 물에 닿았다.
그리고 그것이 신호탄이 됐다.
멀리서 느껴지는 뜨거운 살기에 나는 주먹거머리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피가 묻은 바위는 어디에도 없었다. 바위 주변을 유영하던 주먹거머리들이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한지원!”
내 부름에 지원은 본능적으로 전투태세를 갖췄다.
약속대로 내 뒤에 포지션을 잡은 그는 경이로운 속도로 에너지 운용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연습이 부족한 지원이 강한 물살을 버티며 에너지를 똑바로 운용하기는 아직 역부족이었다.
나는 물밑에서 감응한 지원의 에너지로 빠르게 물살을 가르며 다가오는 주먹거머리를 반으로 갈랐다.
주먹거머리는 깔끔하게 갈라졌으나, 바로 뒤에서 떼거리로 몰려오기 시작했다.
숫자가 너무 많고 빨랐다. 거머리를 아무리 베어 내도 끝이 보이지 않았다.
뒤에 서 있던 지원이 외쳤다.
-거의 다 하수도 위로 올라갔어요! 이제 저희도 가야 해요, 양 헌터!
“…….”
말이 쉽지, 몸을 조금이라도 틀면 바위를 밟고 미끄러지거나 주먹거머리에게 잡힐 거 같았다.
지원과 감응한 힘 역시 바닥을 보였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힘이 더 필요했다. 더 강하고 손에 붙는 힘이 말이다.
이 갈증을 해결하기 위해 지원의 에너지를 있는 대로 끌어왔다가는 지원이 혼절할 거였다.
그렇다면 답은 이미 정해져 있는 거나 다름없었다.
내 원래 에너지와의 감응을 피한 이유는 딱 하나였다.
민지민에게 모든 패를 보이지 않기 위해서. 하지만 이런 곳에서 죽어 버리면 그게 다 무슨 상관이 있느냔 말인가.
나는 이를 악물고 동굴에서의 감각을 떠올렸다. 게이트 안에 들어와 처음 지원과 감응할 때부터 느꼈다.
강우신의 가이딩 덕분에 그 어느 때보다 몸이 가볍다고.
나는 감은 눈을 서서히 떴다.
일순 쿵 하며 온몸이 뜨거워지는 게 느껴졌다. 담기 힘든 거친 에너지가 몸 안에서 자라나는 거 같았다.
“양 헌터!”
거머리가 코앞에 올 때까지 꿈쩍 않는 내 모습에 지원이 급하게 뛰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 순간 눈을 뜬 나는 주저 없이 손바닥으로 물을 밀어내듯 쳤다.
물 안으로 번개가 치듯 황금빛이 번쩍였고 칼로 베어 낸 듯 물살이 갈라졌다. 이내 하천의 바닥이 드러나며 주먹거머리들은 물과 함께 밀려났다.
뒤를 돌아보자 때마침 하수도 위로 올라선 이들이 휘둥그레진 눈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중 유일하게 동요하지 않은 우신만이 살벌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물살이 돌아옵니다, 서둘러요.
그 말에 정신을 차린 지원이 내 손목을 낚아챘다.
* * *
나와 지원이 차례로 하수도에 올라선 순간 밀어냈던 물살이 커다란 파도가 되어 우리가 서 있던 자리를 덮쳤다.
지원은 그 모습을 보고는 헉, 하고 육성으로 소리를 내뱉었다.
조금이라도 판단이 늦었다면 거머리와 함께 물살에 휩쓸렸을 거다.
나는 주먹거머리들을 상대하느라 머리끝까지 젖어 버렸다. 물에 젖은 무거운 몸으로 고개를 숙인 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지원은 하천에서 최대한 멀어지려고 안쪽으로 기어 들어갔다. 물에 들어가기 전부터 거머리를 질색하더니 정말 끔찍한 모양이었다.
겨우 숨을 고른 내가 무릎을 짚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우신이 손을 내밀었다.
“고마워요.”
그런 우신의 손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그가 불쑥 나를 껴안았다.
나는 사고가 멈춘 사람처럼 그의 가슴께에 얼굴을 기댄 채 눈을 끔뻑였다.
한쪽 팔로 내 어깨를 그러잡은 그의 온기가 강한 물살처럼 몰려들었다.
“강우신 가이드?”
“…….”
이름을 불러 봐도 그는 더 힘주어 나를 끌어안을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당황한 내가 더 거세게 몸을 움직이는데 그의 등 너머에서 지민의 목소리가 들렸다.
“문제 있어요?”
“네. 양하나 헌터가 어지러운 모양입니다.”
“어지럽다고요?”
가까이 다가와 묻는 지민의 목소리에 내가 나서서 입을 열려는데 내 어깨를 잡은 우신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이내 우신은 지민의 물음에 긍정했다.
“네. 아무래도 제가 가까이 있어 줘야 할 거 같은데…….”
그의 가슴께에 얼굴을 묻고 있는 탓에 우신의 표정이 보이지는 않았으나,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대충 알아들었으면 자리를 비키라는 듯 한쪽 눈썹을 추켜세웠을 게 분명했다.
지민은 탐탁지는 않지만, 별수 없다는 듯 수고했다는 말을 남기고 멤버들 쪽으로 걸음을 돌렸다.
지민의 발걸음 소리가 멀어질 때쯤, 나는 그만 들을 수 있는 작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듣는 귀도 없겠다. 이유는 말해 주고 이러죠.”
“잠깐만 이러고 있어요.”
“따뜻해서 좋긴 한데 보는 눈도 있으니…….”
“잠깐이면 됩니다. 눈 색이 원래대로 돌아올 때까지만요.”
“…….”
난 그제야 성시현의 힘에 감응하며 내 눈 색이 바뀌었다는 걸 깨달았다.
동굴에서도 그렇고, 시간이 지나면 원래 색으로 돌아가지만 다른 이가 본다면 분명 의아하게 생각할 일이었다.
하고 싶은 말이 많을 텐데,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얼마간 나를 품 안에 안고 있었다.
* * *
시간이 지나자 눈동자를 가득 채우던 황금빛이 사라졌다.
하지만 우신은 나를 제 옆에 둔 채 감기에 걸리겠다며 담요를 덮어 주었다.
김형도와 민지민이 앞장서 우리의 머릿수를 확인하고는 하수도를 따라 안쪽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물이 찰박이는 소리가 하수도를 울렸다.
몬스터를 상대한 직후에는 꼭 이런 적막감이 감돌았다.
특히 오픈 필드에서의 싸움은 그 끝을 확신할 수 없기에 매번 기약 없이 목숨을 연장하는 느낌이었다.
팀 내에 환자가 발생한 경우는 긴장감 같은 것이 맴돌았다.
앞서 걷던 유제이가 적막을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그래서 그 잘난 댁네 남은 팀원들은 어디에 있다는 거야? 설마 이 고생을 시켜 놓고 그것도 거짓말이었다거나 그런 건 아니겠지?”
유제이의 말에 김형도에게 업혀 있던 박이설이 그를 힐끔 째려봤다.
날카로운 시선에 유제이는 어이없다는 투로 이 쪼그마한 게 누굴 노려보냐며 위협적으로 굴었다.
김형도는 둘을 중재하려는 듯 서둘러 입을 열었다.
“이 하수도 끝에 있을 겁니다. 방금 통신 기기를 통해 마중 나오겠다는 말을 전했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보이네요.”
형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지민이 나직하게 읊조렸다.
그 말에 모두의 시선이 하수도 끝으로 향했다. 밖에서 들어온 빛 뭉텅이 아래로 사람의 실루엣이 보였다.
행렬의 가장 끝에 서 있는 나는 눈을 찌푸리고 흐트러짐 없이 반듯한 그 실루엣을 바라봤다.
짝다리 하나 짚지 않고 서 있는 몸은 내가 알고 있는 그 사람의 것이 맞았다.
“……여전하네.”
내가 작게 중얼거리는 순간, 박이설도 상대를 확인하고는 얼굴이 환해져 김형도를 재촉했다.
형도는 못 말린다는 얼굴로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오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이 팀장이 입가까지 올리고 있던 터틀넥을 내리며 우리를 반겼다. 민지민은 그가 내민 손을 마주 잡으며 인사했다.
“센터 1팀의 대표, 민지민입니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길드장 이필엽입니다.”
이 팀장은 정중하게 인사한 뒤 형도의 등에 업혀 있는 박이설의 상태를 확인하고는 형도를 격려했다.
나는 그 모습을 멀리 떨어져 조용히 지켜봤다.
오랜만에 이 팀장의 얼굴을 보니 그날로부터 6년이 지났다는 게 더욱 실감 났다.
세월은 못 속인다고 그의 눈가 주름이 제법 선명해졌다.
물론 달라진 게 눈가의 주름만은 아닌 듯했다.
형도와 박이설에게 둘러싸여 있는 모습이 제법 제대로 된 길드의 길드장처럼 보였다.
그 모습을 나도 모르게 너무 빤히 쳐다봤는지 이 팀장과 눈이 딱 마주쳤다.
이 팀장은 자연스럽게 민지민의 안내를 받아 센터의 멤버들과 인사를 나눴다.
일자로 나란히 서 사람들과 차례로 악수를 하더니 거의 끝에 서 있는 내 앞까지 다가왔다.
“형도에게 상황 전해 들었습니다. 주먹거머리를 묶어 두셨다고요.”
이 팀장은 그 말과 함께 한쪽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 손을 힐끔 쳐다보고 고개를 숙여 인사를 대신했다.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지원 헌터의 도움도 컸고요.”
“그런가요? C급 정신계라고 들었는데.”
이 팀장의 눈매가 묘하게 가늘어졌다.
나는 속으로 이를 갈았다. 이 늙다리를 오랜만에 봐서 일순 반가운 마음이 들었는데 긴장을 풀면 안 된다는 생각이 바짝 들었다.
어쩌면 그 누구보다도 위험한 게 이 팀장일지도 모른다.
그는 A급 정신계인 동시에 타고난 감 자체가 뛰어난 사람이었다.
그의 관심이 슬슬 부담스러워지려는데 바로 옆에 서 있던 강우신이 덥석 이 팀장이 내민 손을 잡았다.
놀란 이 팀장의 시선이 그에게로 옮겨 가기 무섭게 우신이 입을 열었다.
“센터 소속 가이드, 강우신입니다.”
딱 봐도 적대적인 그의 인사에 이 팀장은 헛웃음을 지어 보였다.
“오랜만입니다, 강우신 가이드.”
“네, 오랜만에 뵙네요.”
마주 잡은 손에서 좀처럼 힘을 빼지 않는 두 사람 사이에 묘한 기류가 흘렀다.
내 옆에 서 있던 지원이 그 모습을 보고 당황해서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해가 있을 때 움직여야 하지 않을까요? 생존자들의 위치도 찾아야 하고.”
그의 말에 우신의 손을 놓은 이 팀장이 말을 이었다.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민지민은 무슨 문제가 있는 거냐며 빠르게 이쪽으로 걸어왔다.
이 팀장은 우선 이곳에서 나가는 게 좋겠다고 말한 뒤 우리를 데리고 하수도 밖으로 향했다.
그렇게 한 명씩 차례대로 하수도 밖으로 나간 순간, 모두 당혹감을 지우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