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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죽음이 당신에게 미치는 영향 (73)화 (73/183)

내 죽음이 당신에게 미치는 영향

73화

우신의 말을 들었을 땐 그의 말이 조금도 와닿지 않았는데, 처지가 바뀌고 나니 그가 한 말이 이해되는 거 같았다.

“민지민이 거절하기 힘든 걸 제안하며 합류하도록 했겠죠. 고민할 시간도 없었을 테고요. 저하고 상의하지 못한 거야 당연해요.”

“그럼, 왜.”

“제가 뭐라고 했어요.”

“네?”

“마지막 날 제가 가르친 2가지, 기억하죠.”

“네.”

“하나는 주변에 무슨 일이 있어도 운용에 집중하는 것이었고 나머지 하나는…….”

내 물음에 지원은 눈썹이 휘어져서는 답했다.

“도망가야 할 때는 도망가라.”

“맞아요. 민지민이 뭘 내걸었는지는 몰라도 제가 보기에 지원 헌터는 도망갈 차례였어요. 관리자들 앞에서도 당신을 죽이려고 했던 사람과 오픈 필드에 들어오는 건 자살행위나 다름없는 거 아닌가요?”

“그러는 양하나 헌터는요.”

“네?”

조금 딱딱한 어조로 말을 건네자 예상외의 답변이 돌아왔다. 지원은 비쭉 튀어나온 입술로 투덜거리듯 말했다.

“내가 말했죠. 더 이상 미안해하고 싶지 않다고.”

지원은 땅만 쳐다보던 시선을 내게로 옮겼다.

“나 때문에 양 헌터가 그늘에 들어가고 이천 게이트에 참가한 거 같아서 마음이…… 종일 불편했어요. 이미 충분히 빚졌다고 생각했는데 양 헌터를 위해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그 말에 번뜩 소명의 말이 떠올랐다.

“그런 이들과 합 한 번 제대로 맞춰 보려고 하지 않았던 건 성시현 헌터였고요.”

그때의 내 결정이 최선의 것이었다 한들, 내 눈치를 보고 마음 졸인 이가 있다면 그게 과연 최고의 선택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 의문은 그늘을 다녀온 이후로 더 깊어졌다.

내가 아무 말 없이 그를 가만히 쳐다보고만 있자, 지원은 허둥지둥 말을 돌렸다.

“탓하려는 건 아니에요. 단지 양 헌터에게도 말 못 할 이유가 있는 것처럼 저도 도망만 갈 수 없는 이유가 있어요.”

저번에 이야기한, 집공 팀에 남아 있어야 하는 이유를 말하는 모양이었다.

“그 이야기라면…….”

그가 숨기고 싶어 하는 이야기일 게 뻔해 말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하려는데 지원이 내 말을 툭 잘랐다.

“제가 필사적으로 집공 팀에 남아 있으려는 이유를 궁금해하셨죠.”

“괜찮아요. 말하기 어려운 이야기면 굳이 하지 않아도.”

“여동생이 한 명 있어요.”

여동생?

나는 우신에게 건네받은 파일 속에서 보았던 그의 약력을 떠올렸다. 형제자매에 대한 건 보지 못했는데.

하지만 여동생에 대해 말하는 지원의 눈빛이 평소와는 다르게 단단해 보였다.

“여동생도 저와 같은 에스퍼고요.”

그럼 더더욱 이상했다. 왜 내가 몰랐지. 근래 각성을 한 건가?

그러나 그의 말이 거짓은 아닌 듯해 어쩌면 내가 놓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나지막하게 입을 열었다.

“……왜 나한테 이런 말을 해 주는 거예요.”

“그건, 양 헌터라면…….”

“한숨이라도 붙여야 내일 일정을 무리 없이 소화해 낼 텐데요.”

인기척도 없이 들려온 목소리에 깜짝 놀란 지원과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짝다리를 짚고 서 있는 이는 지민이었다. 그는 크게 하품을 하더니 눈을 비비며 태평하게 우리를 바라보았다.

“……그쪽이야말로 안 자고 뭐 합니까.”

“나야, 불침번 교대하려고 일어났죠. 그런데 침낭이 세 곳이나 비어 있잖아.”

지민은 손가락으로 우리를 한 명씩 가리켰다.

“두 사람이랑…… 강우신이랑.”

“강우신 가이드요?”

“그래요. 여기 오는 길에 마주쳤는데 두 사람이랑 같이 있던 거 아닌가요?”

“하천에는 제가 먼저 와 있었어요.”

나는 지원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저 거짓말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말이 사실이면 내가 하천으로 오는 내내 느낀 뜨거운 시선이 누구의 것인지 말하지 않아도 뻔했다.

지민은 그만 떠들고 자라며 우리를 끌고 천막 쪽으로 향했다.

* * *

권미래는 눈 밑이 퀭했다.

그녀가 치료를 마치고 천막을 나온 건 동이 틀 무렵이었다. 백건희는 날뛰는 그녀의 에너지를 다잡기 위해 세수도 하지 못하고 가이딩을 시작했다.

그 덕분에 에너지는 많이 안정된 거 같지만 큰 힘을 쓴 탓에 얼마간은 제 발로 걷는 게 전부일 거다.

“그럼 확실시된 건가.”

민지민을 중심으로 빙 둘러앉은 우리는 그의 손끝에 시선을 집중했다.

지민은 지도의 여백에 비뚠 글씨로 무언가 적기 시작했다.

[곽현주, 유제이, 양하나, 한지원]

나는 조용히 나열된 이름을 바라봤다. 우리 팀의 핵심 인력이었다.

“하천을 따라 딱 스무 걸음만 이동하면 하수도가 나오는데…… 그 스무 걸음이 관건이네.”

곽현주의 말에 민지민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을 이었다.

“환자와 가이드를 우선적으로 이동시킬 겁니다. 그러니까 이 멤버는 선발과 후발로 나눠 호위를 맡아야 해요.”

말이 좋아 호위지, 후발대는 주먹거머리의 미끼나 다름없었다.

“왜 민지민 헌터의 이름은 쏙 빠져 있는 거죠?”

내 물음에 민지민은 권미래를 가리키며 웃어 보였다.

“우리 같은 비전투계는 오히려 이런 문제에서는 빠져 주는 게 낫거든.”

비전투계인 건 나도 매한가지였으나, 여기까지 오는 동안 보인 것이 있기에 이제 와 태세를 전환할 수는 없었다.

오는 동안 민지민이 웬일로 가만히 있나 의심스러웠는데 힘을 아끼고 후방 포지션에 있기 위한 밑밥이었던 모양이다.

‘여우 같은 놈.’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지민은 눈을 휘며 얄궂게 웃어 보였다.

“그럼 선발과 후발을 가를 제비뽑기라도 할까요?”

민지민은 미리 만들어 둔 제비를 꺼내다 말고 떠오른 게 있다는 듯 연극적으로 말을 이었다.

“거머리들이 후발대의 미끼에 한눈팔려 있을 때 선두에 있는 적은 수의 거머리는 현주가 발을 묶어 줬으면 하는데 어때.”

“어렵지 않을 거 같긴 한데.”

곽현주는 힐끗 우리 쪽을 쳐다봤다. 민지민이 말하는 후발대의 미끼는 어제 세운 작전을 말하는 거였다.

* * *

권미래가 천막 안에서 치료에 집중할 때, 우리는 수프를 먹은 후 모닥불 주변에 둘러앉았다.

가장 먼저 입을 연 건 우신이었다.

“거머리는 생명력에 반응하지만, 그보다 더 본능적으로 갈구하는 게 피입니다.”

우신의 말에 유제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역시 처음에 나온 작전대로 가시손오소리를 토벌해 와서 냅다 미끼로 던져 넣으면 되는 거 아닌가.”

“하지만 높은 가능성으로 몬스터의 피에 반응하지 않을 수도 있어.”

강을 건너기 위해서는 주먹거머리가 한눈팔게 할 미끼가 필요했다.

생명력이나 사람의 피에 반응하는 주먹거머리의 특성을 노려 미끼를 무엇으로 할지 정해야 했다.

침묵이 감도는 순간, 곽현주가 궁금하다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런데 이미 강을 넘었다는 다른 팀원은 어떻게 저 물길을 건너간 겁니까?”

눈을 끔벅이며 묻는 말에 김형도는 난감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 방법은 못 씁니다. 지금 천막 안에 있는 이설 헌터의 능력이거든요.”

부가 설명 없이도 알 만했다.

천막 주변에 가득 자라난 풀처럼, 박이설 헌터가 식물을 이용해 팀원들을 강 너머로 보낸 모양이었다.

그러니 박이설 헌터가 저런 상태가 된 이상 오델리아 팀이 사용한 방법은 쓸 수 없었다.

결국 남은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곽현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답 나왔네. 해가 밝는 대로 주위에 있는 시체들 긁어 와.”

“…….”

모두가 어려워하던 말을 곽현주는 일말의 주저함 없이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유제이는 눈알을 데구루루 굴리며 사람들의 눈치를 봤고 나는 동요하지 않은 채 팔짱을 끼고 앉아 있었다.

곽현주는 답답하다는 듯 언성을 높였다.

“우리가 여기 소풍 왔어? 이미 다 죽고 얼굴도 뭉개진 시체에 죄책감을 느껴서 뭐 할 건데? 선배, 한마디 해 줘요!”

곽현주가 고개를 돌려 민지민을 바라봤다. 그러나 그는 곽현주가 아닌 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곽현주 헌터의 제안이 최선인 거 같은데 우리 신입들 표정이 탐탁지 않으니 내 마음이 안 좋네요.”

그렇게 말하며 멤버들의 얼굴을 쓱 훑던 지민은 손가락을 꿈지럭거리던 지원을 보고 돌연 얼굴을 굳혔다.

“그런 표정을 할 때는 당연히 다른 의견이 있어서 그런 거겠죠? 의견도 없으면서 혼자 선량한 척하는 거면 굉장히 별로인데 말이야.”

“…….”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곽현주의 작전이 현재로서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조금 비도덕적으로 느껴질 수 있으나 이런 게이트 안에서 일어난 일을 추궁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또한 이 방법으로 길이 열리고 아직 살아 있는 사람을 구할 수 있다면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다만 이것이 정말 제일 나은 선택인지, 작전에 임하기 전까지 조금만 더 생각해 보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때 내 옆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던 우신이 힐끔 뒤를 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에 개의치 않고 생각을 이어 가는데, 뒤에서 작은 고함 소리가 들렸다.

“이거 놔 줘요!”

소란스러운 소리에 뒤를 돌아보자 우신이 박이설의 허리춤을 잡아 공중에 띄우고 있었다.

천막 안에서 얌전히 자고 있어야 할 사람이 붕대가 칭칭 감긴 다리로 천막 밖으로 기어 나오려 했나 보다.

그 모습에 놀란 내가 물었다.

“뭐 하는…….”

그 순간, 우신의 반대 손에 들린 짐이 보였다.

“그거 제 짐 아닙니까?”

“맞아요. 오델리아의 헌터는 손버릇이 좋지 못한 거 같네요.”

나는 내 짐 가방과 박이설을 번갈아 바라봤다.

“……별로 탐낼 만한 건 들어 있지 않을 텐데.”

내가 말끝을 늘이자 박이설은 잔뜩 붉어진 얼굴로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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