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죽음이 당신에게 미치는 영향
67화
지원은 몸을 웅크리고 쓰러진 양하나를 유제이가 발로 건드릴 땐 뭔가 큰일이 벌어질 거 같아 저도 모르게 숨을 참았다.
머지않아 양하나가 칼을 꺼내 들며 상황이 역전됐다.
지원은 저도 모르게 작게 환호성을 질렀다.
하지만 그때도 우신의 표정은 차갑게 굳어 있었다.
그저 단단히 화가 난 얼굴로 말없이 모든 상황을 지켜볼 뿐이었다.
지원은 문득 최근 센터에 도는 소문을 떠올렸다.
강우신이 낮은 등급 에스퍼의 임시 전담 가이드가 되면서 변했다는 것이다.
색안경을 쓴 사람들은 강우신이 에스퍼와의 관계의 우위를 선점해 유한 척 구는 것이라며 수군댔지만, 두 사람의 모습을 가까이서 본 지원의 생각은 달랐다.
그들은 각인을 앞둔 여느 파트너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분명 그렇게 생각했는데…….
그때 경기장에 민지민이 등장하면서 상황이 정리됐다.
멀어지는 민지민과 양하나, 두 사람의 뒷모습을 보고 우신이 굳게 닫혀 있던 입을 열었다.
“기어코 불구덩이 속으로 뛰어드는군.”
“…….”
지원은 일순 자신이 잘못 들은 게 아닌가 귀를 의심했다.
부드러운 눈으로 양하나를 바라보던 우신이 한 말이라고는 감히 상상하기 힘든 목소리였다.
지원은 들으면 안 될 걸 들을 사람처럼 안절부절못하고 있는데 멀리서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 고개를 돌렸다.
“한지원, 지민 선배의 호출이야. 집공 팀 대기실에 가 있어.”
권미래였다.
그 말만 남기고 사라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어두운 표정으로 바라보던 지원은 두 주먹에 잔뜩 힘을 주었다.
담요를 챙겨 문 쪽으로 걸음을 옮기려는데 불쑥 우신이 입을 열었다.
“양하나 헌터가 거기 있는지 제게 문자를 남기세요.”
“네?”
지원은 놀란 듯 걸음을 멈추고 우신을 쳐다봤다. 우신은 그제야 지원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만약 그녀를 만나면…….”
“…….”
“어떻게든 ‘그늘’을 알려 줘요.”
지원 역시 그늘이 뭔지 알고 있었다.
지금껏 우신의 날 선 분위기 때문에 그를 똑바로 보고 있지 못했는데, 제게 그렇게 말하는 우신의 모습은 어딘가 절박해 보였다.
그 때문일까, 지원은 어울리지 않게 용기를 내 입을 열었다.
“그늘이라면 늪을 말하는 게 맞나요? 왜 하필 거길…….”
지원이 질문할 줄 몰랐는지 우신의 눈이 일순 가늘어졌다.
그 모습에 지원은 제가 말실수한 건가 싶어 헙, 하고 재빠르게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우신은 일정한 톤으로 말을 이었다.
“민지민이 전처럼 또 그녀에게 뭔가 내기를 제안하려고 데려간 거라면 그늘로 가야지 그나마 승산이 있을 겁니다.”
“…….”
양하나 헌터는 정신계이니 만약 우신의 예상대로 정말 민지민이 내기를 제안한다면 그녀에게 그늘이 유리할 것이다.
하지만 가이드인 우신이 그늘에 대해 알고 있는 게 의심스러웠다.
아까 양하나를 바라보던, 심상치 않은 눈빛도 그렇고.
지원은 우신을 떠보듯 입을 열었다.
“……늪을 잘 아시나요?”
지원의 의심 어린 질문에 우신은 그와 눈을 마주하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어떻게요?”
“자주 갔으니까.”
늪을 자주 갔다고? 아카데미 조교도 아니면서 어째서?
더욱 의구심을 불러일으키는 대답에 지원은 두려움도 잊고 꼬치꼬치 캐물었다.
“그늘을요? 악몽 꾸는 취미라도 있어요? 뭐 볼 게 있다고…….”
“전 그늘에 갈 때마다 늘 같은 기억을 봐요.”
우신은 평소의 그답지 않게 제법 진중한 얼굴로 지원의 물음에 답해 줬다.
“같은 기억이요……?
“네. 매번 과거에 두고 온 사람이 나오니까요.”
지원은 그제야 우신의 말이 모두 진심임을 직감했다.
깊은 악몽을 꾸게 한다는 늪.
하지만 그곳을 우신처럼 그늘이라 부르는 이들이 있다.
과거를 생생하게 경험하게 해 준다는 건, 돌려 말해서 이제는 볼 수 없는 상황을 경험하게 해 준다는 거다.
예를 들어 더 이상 현실에서 만날 수 없는 사람을 볼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의 말마따나 현실을 힘겹게 살아가는 이들이 한여름에 잠시 쉬어 가는 그늘처럼 과거에 두고 온 이를 찾으러 그곳을 들른다고 한다.
지원은 우신의 답변에 알겠다고 대답한 뒤 2층 객석을 빠져나갔다.
우신에게 양하나가 집공 팀 대기실에 없다는 문자가 도착한 건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 * *
또다. 그늘을 다녀온 이후 잠들 때마다 계속해서 같은 꿈을 꾸곤 했다.
11살쯤으로 보이는 양하나의 모습을 한 내가 창 하나 없는 흰 복도를 제집처럼 돌아다녔다.
처음에는 병실인가 싶었지만, 어느샌가 자연히 이곳이 연구실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녀의 부모가 연구자라고 했으니 아마 부모님의 직장이지 않을까.
그렇게 퍼즐을 하나씩 맞춰 보았지만 풀리지 않는 가장 큰 의문 두 가지가 있었다.
왜 양하나가 환자복을 입고 연구실을 제집처럼 돌아다니는지, 또 그때 본 그 아이가 정말 지금 내가 알고 있는 이곤이 맞는지.
하지만 그늘에서처럼 꿈속에서 사람을 마주하는 일은 없었다.
어떤 방문을 열어도 흰 복도만 이어졌다.
아침이 밝기 밝을 때까지 꿈속에서 계속해서 흰 복도를 걷는 건 생각보다 더 끔찍한 일이었다.
번번이 나는 그 미로 같은 연구실을 혼자 뛰어다녔다. 그건 귀신이나 괴물은 나오지 않는 악몽이었다.
나는 알람 소리에 꿈에서 깼다.
“며칠째 같은 꿈인지.”
컨디션 관리에 힘쓰려고 운동도 적당히 하고 있는데, 정말이지 요새 컨디션이 최악이었다.
나는 부스스한 머리칼을 대충 쓸어 넘기며 핸드폰을 들었다.
[1시 대강당으로. 늦지 않게 참석할 것.]
이천 북부 게이트 입장을 앞두고 마지막 점검 및 스타팅 멤버 소개가 있는 날이었다.
민지민이 약속을 번복할 인물은 아니었으나 그가 리더로 있는 그룹에 속해 게이트에 입장하려니 걱정이 들었다.
이 게이트를 다녀오면 곧바로 발급되는 라이선스를 들고 정보실로 갈 수 있을 테지만…….
“어디까지나 게이트에서 살아 돌아온다는 전제하에서지.”
나는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열흘 전 출몰해 이천 북부를 집어삼킨, 일명 이천 게이트.
출몰과 동시에 탐사 팀이 파견됐고, 센터 소속의 탐사 팀이 돌아온 게 이틀 전이다. 들어갔던 7명의 탐사대원 중 돌아온 이는 5명뿐이었다.
“7일간 총 4번의 전투를 치러 놓고도 몬스터 계열조차 알아내지 못했단 뜻입니까?”
민지민은 비딱한 태도로 보고서를 책상 위로 툭 던졌다.
종이 몇 장이 바닥으로 흩어졌다.
탐사대장인 송대현은 짧은 머리칼을 손으로 한 번 쓸어 올렸다.
내 눈에는 그게 마치 화를 참는 행동으로 보였는데 민지민은 그 사실을 아는지, 아니면 모르는 척할 셈인지 계속해서 같은 자세로 말을 이어 갔다.
“입이 있으면 무슨 말이든 해 보시죠. 이럴 거면 탐사 팀을 뭣 하러 선 투입합니까?”
지민의 서늘한 어투에 회의실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나는 집공 팀과 탐사 팀원들 사이에 묘한 신경전이 오가는 걸 가만히 앉아 지켜보기만 했다.
스타팅 멤버로 이름을 올린 후 며칠 동안 머리가 복잡했는데, 단 한 번의 회의로 걱정이 박살 났다.
늦지 말라는 연락이 무색하게 회의는 1시간째 제자리걸음이었다.
탐사 팀은 대게 위험군에 속하는 게이트, 그중에서도 대규모거나 오픈 필드인 게이트에 선 투입되는 팀이었다.
이번 이천 게이트는 두 항목을 모두 아우르는 S급 게이트였다.
탐사 팀은 게이트 클리어에 필요한 위험 요소를 알아 오고, 때에 따라서는 클리어 루트를 발견해 오기도 한다.
스타팅 멤버가 아무 정보 없이 게이트에 들어간다면 최악의 경우 클리어조차 불가능해질 수 있다.
그래서 은신 능력이 높은 이들로 탐사 팀을 구성해 선 투입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번 탐사 팀은 이례적으로 팀원을 잃은 데다가 게이트의 주인은커녕 몬스터 계열조차 명확하게 분류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당장 내일 게이트에 입장해야 하는 스타팅 멤버들 입장에서는 매우 곤란한 일이었다.
때마침 송대현이 말을 이었다.
“다시 말하지만, 계열을 특정하지 못한 게 아닙니다.”
굳이 회의실에까지 전투복을 입고 온 그는 민지민이 던진 종이를 주우며 말을 이었다.
“고블린이나 골렘 같은 하등 몬스터부터 등딱지거미나 가시손오소리같이 처음 보는 동물형 몬스터까지. 조사를 통해 파악한 몬스터의 가짓수가 일반적이지 않습니다.”
송대현은 오른쪽 뺨을 가로지르는 큰 상처가 인상적인 사람이었다.
“다만 그보다 더 마음에 걸리는 건 동물형 몬스터의 종류가 다양한 것에 비해 능력치는 평균보다 한참 떨어진다는 겁니다.”
그의 말처럼 조사 기록을 살펴보니 한 게이트 안에 존재한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다양한 종의 몬스터가 등장했다.
‘은신에 능한 탐사대원이 둘이나 사망했다더니, 이유가 있었군.’
“또한 클리어 루트는 찾지 못했지만, 중심 도시 안에서 규칙적으로 피어오르는 연기를 확인했습니다. 그곳에 생존자가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는 지도 위 중심 도시의 외곽을 붉은 펜으로 따라 그었다.
“다만 도시는 몇 가지 구획으로 나누어져 있고 안쪽으로 진입하는 경계에 전기가 흐르고 있어 절연복이 없으면 부상을 당할 위험이 있습니다. 베이스캠프에 필요한 물품을 마련해 두었으니 픽업 후 이동하시면 됩니다.”
그는 지도의 핵심 구역과 베이스캠프를 설치한 장소 등을 다시금 손가락으로 짚어 보였다.
“어디까지나 이번 작전에서 가장 중요한 건 인명 구조이니까요.”
송대현의 두 눈이 이글이글 불타올랐다.
그의 말처럼 이번 게이트는 클리어만큼이나 중요한 게 인명 구조였다.
그것을 위해 협회와 협력하는 것이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