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죽음이 당신에게 미치는 영향
59화
그래서 더 독하게 훈련했다.
에너지 총량이 달라졌을 뿐, 근육량이나 유연성, 탄력 모두 거의 현역 때와 비슷하게 키워 놨다.
그러니 어느 정도 몸이 마음처럼 따라 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유제이의 주먹이 정확히 급소로 날아들었다.
두 팔을 세워 공격을 막아 봤지만 내 무게가 가벼운 터라 그대로 공중으로 몸이 떠올랐다.
살이 터지듯 펑 소리와 함께 몸이 땅바닥을 볼품없이 굴렀다.
나는 믿을 수 없는 통증에 밭은 숨을 토해 냈다.
지원을 상대할 때와는 차원이 달랐다. 유제이는 나를 얕보고 있지 않았다.
지원에게 제대로 데인 듯 처음부터 진심으로 일격을 가했다. 생각보다 복부를 강하게 맞아 숨쉬기가 불편했다.
나는 나가떨어진 자리에서 그대로 몸을 웅크렸다. 유제이는 몸을 둥글게 만 내 모습을 바라보다 옅은 실소를 뱉어 냈다.
“뭐야, 이 형편없는 실력은. 너무 고평가된 거 아니야?”
유제이의 도발에도 나는 좀처럼 일어날 기색 없이 옹송그린 채 몸을 떨며 계속 기침을 했다.
덧니를 내보이며 낄낄거리던 유제이의 표정이 이내 서늘하게 변했다. 그러고는 나직하게 읊조렸다.
“이러면 실망인데.”
관리자가 다가오려 하자, 유제이가 한 손을 들어 보이고는 한 걸음씩 천천히 내 쪽으로 걸어왔다.
느린 걸음이 무료한 그의 기분을 그대로 내비쳤다.
어느덧 그의 그림자가 내 몸 위에 드리웠다. 그는 트레이닝복 주머니에 한 손을 찔러 넣고는 발로 툭툭 나를 건드렸다.
“야, 쇼하는 거면 이쯤에서 그만두는 게 어때. 이러면 더 괴롭히고 싶어지니까.”
“…….”
기침은 멈췄지만, 도무지 고개를 들려고 하지 않는 내 모습에 유제이는 질린다는 듯 표정을 찡그렸다.
이내 그는 내 상태를 확인하려는 듯 가까이 다가와 허리를 숙였다.
“내 말 안 들…….”
그 순간 나는 허리를 틀며 빠르게 그의 얼굴이 있을 자리를 향해 손을 휘둘렀다.
내 오른손에는 날이 시퍼렇게 선 단검이 들려 있었다.
짧은 손잡이에 비해 날이 길고 좁아 근접 공격에서 유리한 무기였다.
유제이는 내 기습 공격을 재빠르게 몸 전체를 뒤로 눕히며 피했다.
그건 유연하다고 말하기도 민망할 정도로 말도 안 되는 자세였다.
그럼에도 분명 무언가 칼에 베이는 감각이 느껴졌다.
나는 빠르게 자세를 고쳐 잡고 그와 거리를 벌렸다.
대인전은 관리자의 허가만 받는다면 무기를 사용해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물론 나는 유제이의 방심을 끌어내기 위해 처음에는 맨손으로 경기에 임했다.
무기를 소매에 숨겨 일부러 타이밍을틈을 만들어 낸 것이다.
그럼에도 유제이는 어렵지 않게 내 공격을 피해 냈다.
“…….”
나는 아직도 통증이 느껴지는 복부를 매만졌다.
유제이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이내 그는 한 손을 천천히 얼굴 쪽으로 올리더니 아무 말 없이 제 뺨을 닦아 냈다.
그 손가락에 묻어나는 것은 분명 피였다.
유제이의 얼굴이 보기 좋게 구겨졌다.
“이런 미친X이.”
유제이의 이마 위로 실핏줄이 솟아올랐다.
칼을 휘두른 타이밍이 완벽하다 여겼는데, 뺨을 얕게 그은 게 전부인 모양이었다.
혀를 차는데, 유제이의 눈동자 색이 변했다.
에스퍼는 힘을 사용할수록 에너지의 영향을 받아 머리칼과 눈동자 색이 변하니 유제이의 붉은색 역시 그것의 연장선이라 여겼다.
그런데 흥분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는 유제이의 눈동자가 은은하지만 노란빛을 띠기 시작했다.
붉은색에 섞여 명확하진 않았지만 내가 그 변화를 감지한 순간 유제이는 지원과의 경기에서 그랬듯 털이 쭈뼛 설 만큼의 강렬한 에너지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먼발치에서 이 에너지를 봤을 땐 그저 상상을 초월하는 힘이라고는 생각했는데, 어딘가 달랐다.
묘하게 익숙한 노란빛의 에너지.
일순 에스퍼들의 말이 떠올랐다.
“어떻게 유제이만 번번이 신기록 갱신이 저렇게 쉬워.”
이상하리만큼 거듭 신기록을 세우는 에스퍼. 묘한 기시감이 드는 에너지.
그는 분명 발전 가능성이 희박한 에스퍼였고 초기 성적도 별 볼 일 없었다.
그런 그가 지금 같은 평가를 받기 시작한 것은 분명…….
나는 강우신이 준 파일에서 본 유제이의 기록을 떠올렸다.
한때 괴롭힘 타깃이었던 그는 지원이 팀에 합류할 때쯤부터 비약적으로 강해지기 시작했다.
‘뭐가 뭔지는 몰라도 이상해.’
나를 본능적으로 경기장으로 이끈 힘. 그걸 직접 확인해야겠다는 충동이 일었다.
유제이에게 닿을 수만 있다면 이 충동을 진정시킬 수 있을 거 같았다.
때마침 기묘한 에너지를 뒤집어쓴 유제이가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내게 걸어오기 시작했다.
지원과의 대결에서도 그랬지만, 압도적인 에너지를 발산하는 대신 속도가 급격히 느려지는 모양이었다.
충분히 피할 수 있는 공격이지만, 나는 이를 악물었다.
어딘가 신체 한 부분이 잘려 나갈 각오를 한 채 다가오는 그의 공격을 바라보았다.
유제이가 나를 공격하는 순간, 그와 접촉해 수상한 에너지의 정체를 직접 확인할 생각이었다.
그렇게 유제이의 주먹이 코앞까지 다가온 그때, 일순 그의 붉은 눈동자가 떨렸다.
무언가에 시선을 빼앗긴 듯 유제이는 공격을 멈추고 가만히 섰다.
머지않아 식은땀을 흘리는 모습에 그가 겁에 질렸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었다.
“…….”
도대체 무엇에 질겁한 것인지 짐작조차 하지 못하는 그때, 경기의 끝을 알리듯 타이머가 울렸다.
어느덧 3분이 모두 지나 있었다.
관리자는 경기장 위로 올라와 서둘러 우리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아 섰다.
“경기 끝났습니다. 서로 떨어져 주세요.”
관리자의 말에 내가 대꾸 없이 유제이를 눈짓하자, 관리자는 그제야 유제이의 상태를 확인한 듯 움찔 어깨를 떨었다.
“유제이 헌터, 내 말 들립니까?”
관리자가 조심스럽게 유제이의 어깨를 흔들었다.
나는 관리자의 어깨너머로 보이는 유제이를 묵묵히 지켜봤다.
희게 질린 얼굴. 초점을 잃은 듯한 눈동자.
나는 저 상태에 대해 알고 있었다.
내가 리더로 있을 때도 마음에 안 드는 놈을 저렇게 골탕 먹이는 놈이 있었으니까.
“수고하십니다.”
목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깔끔하게 머리를 넘기고 진녹색 슈트를 입은 민지민의 모습은 피가 낭자한 이곳과 상당히 대조적으로 느껴졌다.
그는 눈을 반달 모양으로 휘어 보이며 긴 다리로 휘적휘적 경기장 위에까지 올라왔다.
관리자는 민지민을 보고 놀란 듯 손을 앞으로 모았다.
“여긴 어쩐 일로…….”
“오늘 대인전이 있다는 말을 듣고요. 마침 센터에 있던 터라. 그런데 마침 재밌는 대결 중이었네요.”
민지민은 마치 나와 유제이가 대련 중이었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는 듯 과장되게 놀란 표정을 지었다.
가깝게 다가오는 민지민에 정신이 팔려 잠시 유제이에게서 눈을 뗐는데 어느덧 그의 초점이 똑바로 돌아와 있었다.
언제 이성을 잃었냐는 듯 유제이는 평온한 얼굴로 서 있었다.
그러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시선을 아예 돌려 버렸다.
민지민은 손수건을 꺼내 그에게 건넸다.
“제이는 자존심 많이 구겼겠는걸.”
“……오, 셨어요.”
존댓말이 익숙해 보이지 않는 유제이는 어울리지 않게도 제법 얌전한 태도로 손수건을 받아 들었다.
그것으로 제 뺨을 눌러 지혈했다.
그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는데 민지민과 딱 눈이 마주쳤다.
“나이프를 쓰는 줄 몰랐네요.”
“……제가 유제이 헌터를 상대하려면 뭐라도 해 봐야죠.”
“그런가요. 폼이 한두 번 사용해 본 거 같지 않던데. 볼 때마다 참 새로워요, 양하나 헌터는.”
이미 많은 정보를 쥐고 있으면서 모른 척 돌려 말하는 건 민지민이 가장 즐겨 쓰는 대화 방식이었다.
나는 질린다는 얼굴로 고개를 저어 보이고는 몸을 돌렸다.
“경기가 끝났으니 이만 내려가 보겠습니다.”
그리고 경기장 아래로 향하는데 민지민이 느긋한 걸음으로 따라붙었다.
모르는 척 아래로 껑충 뛰어내렸는데, 민지민은 꿋꿋이 내 뒤를 따라왔다.
나 역시 뻔뻔하게 바로 뒤에 붙은 그를 못 본 척 걸었다.
그러다 경기장을 빠져나가는 문 앞에 멈춰 섰다.
내가 멈춰 서자 민지민이 따라 멈췄다. 나는 낮은 한숨과 함께 민지민을 돌아봤다.
“저한테 볼일 있으신가 봐요.”
“네.”
민지민은 눈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귀찮다는 기색이 묻어난 얼굴을 한 번 문지르고는 물었다.
“말씀하세요.”
내 대답에 그는 잠시 주변을 둘러봤다.
바로 머리 위 관객석에서 아닌 척 우리 두 사람을 주시하던 에스퍼들이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민지민은 픽 웃더니 나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이렇게 얼굴 보는 것도 오랜만인데, 차 한잔 어때요?”
“전혀 구미가 당기지 않는데요.”
내 단호한 대답에 민지민은 큰 눈을 끔뻑이다 쾌활하게 웃어 보였다.
“양하나 헌터다운 좋은 대답이긴 하지만 너무 단언하지 말아요.”
그는 한 손으로 입을 가려 관객석에서 제 입 모양이 보이지 않게 한 다음 말을 이었다.
“저한테 양 헌터의 구미를 당기게 할 제안이 하나 있거든요.”
“…….”
표정을 보아하니 허투루 하는 소리 같지는 않았다.
내 구미가 당길 소리라니. 그건 돌려 말해 내가 원하는 걸 알고 있다는 소리기도 했다.
내 뒤를 캐고 다닐 거라고는 생각했는데, 어디까지 알아낸 걸까.
나 역시 그를 떠보고 싶었다.
“어디로 가면 되죠.”
내 물음에 그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답했다.
“집공 팀 사무실로 오세요.”
“사무실이라면…… 소 대리님이 계신 방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내 물음에 그는 왜 당연한 걸 묻느냐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