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죽음이 당신에게 미치는 영향 (56)화 (56/183)

내 죽음이 당신에게 미치는 영향

56화

비장하게 걸음을 옮기는 지원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옅은 웃음을 지었다.

‘너무 힘준 거 아니야?’

대인전이라고 해도 트레이닝복이나 캐주얼한 활동복을 입은 이가 대부분이었다.

결코 대인전을 만만하게 봤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게이트나 작전에 투입될 때처럼 작업복을 입지 않는 건, 일종의 허세였다.

이런 가벼운 마음으로 임해도 상대를 이길 자신이 있다는, 뭐 그런 거.

그래서 보호 장구까지 모두 착용하고 참가하는 이는 드물었다. 그런데 그 드문 일을 한지원이 해 보인 것이다.

지원이 그의 푸른 에너지를 닮은 짙은 청록색의 점프 슈트를 입고 훈련장으로 들어섰다.

그의 가슴께엔 집공 팀의 마크인 붉은 태양이 기하학 모양으로 새겨져 있었다.

내가 픽 웃어 보이는 그때, 유제이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지원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본인의 머리칼과 같은 새빨간 트레이닝복을 위아래로 입은 유제이는 반가운 친구를 만난 듯 활짝 웃어 보였다.

“용케도 왔네? 나는 또 네가 내뺀 줄 알았잖아.”

“꼭 그러길 바란 사람처럼 말하네.”

지원의 목소리는 조금 떨렸지만, 유제이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

유제이는 일주일도 안 되는 시간 동안 지원이 어딘가 변했음을 직감적으로 느낀 듯했다.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는 지원을 본 유제이의 표정이 빠르게 구겨 들어갔다.

“너 말이야…… 혹시.”

유제이는 본능처럼 지원에게로 서서히 손을 뻗었고, 그 모습에 내 표정이 굳었다.

그가 어떤 행동을 취하려는 그때, 그 모습을 지켜보던 관리자가 나직하게 유제이를 불렀다.

“유제이 헌터.”

그의 나직한 부름에 유제이는 고개를 돌려 관리자를 바라봤다.

그러고는 기다렸다는 듯 지원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한지원 헌터의 상대로 제가 나가면 좋겠는데…… 등급 차도 없고 능력 계열도 같으니, 괜찮죠?”

관리자는 경고하려는 듯했다.

하지만 빠르게 이어진 유제이의 물음에 잠시 유제이를 바라보다 상관없다고 답하며 돌아섰다.

그 모습에 유제이는 만족스럽게 웃어 보였다.

아무리 그의 등급이 높다고 해도 관리자가 너무 티 나게 유제이의 눈치를 보는 모양새였다.

‘정말이지, 여기고 저기고 부패한 냄새가 코를 찌르네.’

유제이는 기고만장해져서는 지원의 시선 따위는 벌써 전부 잊은 듯 웃어 보였다.

“그럼 우리가 멋진 오프닝 무대를 보여 주자고.”

유제이는 지원을 등지며 경기장 위로 향했다.

나는 그제야 한시름 놓았다.

이미 예상한 일인데도 막상 눈앞에서 벌어지니 진정이 안 됐다.

모두 강우신 말대로라서 더 놀라웠다.

* * *

“양하나 후배가 신경 쓰여 내 일을 못 하겠습니다. 그러니 이건 염연히 나를 위한 부탁이고요.”

그의 말에 쉽사리 대답하지 못하고 있는데, 안쪽 방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적어도 반나절은 잘 줄 알았더니 한지원은 금방 깨어났다. 예상 밖의 이른 기상에 강우신도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에 나는 지원을 보며 말을 이었다.

“깼어요?”

“네, 제가 오래 잠들어 있었나요? 분명 양하나 헌터가 일러 준 방식대로 운용 연습을 하다가…….”

그는 마치 약에 취한 듯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그를 부축하러 다가가려는데, 나보다 강우신이 한발 빨랐다.

“아, 감사합니다…….”

지원은 그의 팔을 거칠게 잡은 우신의 굵은 손마디에 그제야 잠들기 전 일이 생각났는지 사색이 돼서는 화장실로 뛰어 들어갔다.

곧바로 헛구역질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나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우신을 쳐다봤다.

“뭐예요? 도대체 방에서 무슨 일이 있었기에 애가 저래요.”

우신은 심드렁한 얼굴로 답했다.

“글쎄요, 친절하지 못할 거라고 경고한 만큼 힘줬을 뿐입니다.”

“…….”

지원이 퍽이나 못마땅한 모양이었다.

게다가 그걸 숨길 생각도 전혀 없어 보였다. 도대체 왜 감정이 상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고개를 저으며 그를 바라보는데 화장실 쪽을 보던 우신이 획 고개를 돌렸다. 덕분에 눈이 딱 마주쳤다.

“그리고 한지원 헌터입니다.”

“네?”

“애가 아니라 한지원 헌터.”

“아…….”

나도 모르게 지원을 그리 지칭한 모양이었다.

지원은 22살로, 양하나보다 나이가 많았다. 하지만 생긴 거나 하는 짓을 보면 한참 어린 막냇동생 같은 느낌이었다.

그 탓에 나도 모르게 애 취급을 해 버렸다.

우신의 표정이 진지했다. 이런 부분을 신경 쓸 줄은 생각도 못 했다.

나름 오랫동안 그룹 생활을 했으니 호칭에 예민한 면이 있는걸지도 모른다.

나는 대충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민망한 얼굴로 답했다.

“저도 모르게 말이 편하게 나갔네요.”

“그런 거라면 다음부터 저한테 그러시죠.”

“앞으로는 조심…… 네?”

순간 내가 그의 말을 잘못 들은 게 아닐까, 싶어 서둘러 우신을 올려다봤다.

이미 우신의 고개는 반쯤 옆으로 돌아가 있었다.

“부탁드릴 일에 대해서는 다음에 다시 이야기하기로 하죠. 둘이 있게 되면 말이에요.”

어쩐지 그의 두 뺨이 옅게 붉어져 있는 듯했다.

나는 내 착각이라 여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무렴 좋습니다.”

이어지는 침묵에 어색하게 그의 뒤통수만 쳐다보고 있는데, 우신은 잊고 있던 걸 떠올리듯 소파 위에 올려 둔 제 서류 가방을 열었다.

큰 체구에 어울리지 않게 쪼그려 앉아 서류 가방을 뒤지던 그가 말을 이었다.

“제가 뭐라고 하든 결국 양하나 헌터가 자기 좋을 대로 하겠지만 이 정도는 참견하게 해 주세요.”

마침내 찾던 것을 찾은 듯, 우신은 내게 철제 파일을 건넸다.

“뭐가 됐든, 양 후배가 제 에스퍼라는 건 변하지 않는 사실이니까.”

* * *

철제 파일에는 내가 구하지 못했던 집중 공격 팀, 특히 민지민 그룹에 속한 에스퍼들의 세부 프로필이 담겨 있었다.

그간의 실적과 평가서는 오랜 고참으로 집중 공격 팀에서 일한 우신이기에 구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흥미로운 내용이 반, 예상했던 내용이 반이었다.

관리자가 유제이를 제대로 통제할 수 없는 것, 그건 당연하게도 그의 뒤에 선 민지민 때문이었다.

내가 아는 민지민은 야망이 있던 이는 아니었다.

오히려 순수하게 강한 힘에 집착하던 쪽이었다. 덕분에 강우신과는 정반대의 시선으로 날 보았다.

부드러운 인상으로 쉽게 남들의 호감을 샀지만, 조금만 마음에 안 드는 게 보이면 바로 성질을 드러냈다.

그래서 아마 별명이 민또또, 민지민이 또 또라이 짓 한다는 뜻으로 내 직속 후배 에스퍼들이 그를 그렇게 부르곤 했다.

나는 종종 나를 자극하던 그의 섬뜩한 웃음을 떠올렸다.

민지민은 그런 애였다.

센터의 간판 에스퍼 성시현 헌터가 얼마나 강한지 몸을 부딪쳐 보고 싶어 하던 게이트 중독자.

하지만 강우신에게서 받은 실적 평가서 속 민지민의 행보는 내 예상과 조금 달랐다.

처음 감시과 사람이 왔을 때도, 끈 뺏기를 했을 때도 느낀 거였는데…….

‘전혀 몰랐어, 직접 상부의 개가 되었을 줄은.’

때마침 환호성과 함께 직사각형의 그라운드 위로 유제이가 나타났다.

평소에 대인술을 실습하던 곳들과는 확연히 다른 느낌이었다.

콜로세움을 연상케 하는 무대였다.

아무리 봐도 쇼에 가까웠다.

신이 난 유제이는 관중석을 향해 손을 흔들어 보이더니 아무렇게나 뻗친 머리칼을 대충 검정 고무줄로 묶었다.

그의 정반대 편으로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지원이 나타났다.

지원은 가슴께에 손을 올리고 최대한 에너지 운용에 집중하고 있었다.

우신은 재건축에 성공했고, 지원의 길은 확연히 넓어졌다.

다만 그게 바로 어제의 일이었다. 아직 익숙하지 않아 마음처럼 에너지 운용이 되지 않을 것이었다.

그에 비해 유제이는 이 순간만을 기다려 왔다는 듯 흥분한 기색이 역력했다.

유제이의 평가서를 살펴보니 그는 물리계로, 각성 당시 염력에 소질을 보였다.

다만 이상한 것은 입사 당시 그의 예상 성장치가 현저히 낮게 채점되었다는 것이다.

그건 발전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것으로 이런 평가가 크게 엇나가는 경우는 드물었다.

듣자 하니 근래 들어서는 매일 같이 모든 분야의 신기록을 경신 중이라고 했다.

그런 점이 마음에 걸렸지만, 우신이 내게 그 정보를 건넨 건 다른 이유 때문이었다.

“양하나 후배가 왜 지금 집공 팀에 들어왔는지 알고 계십니까?”

“그야, 빈자리가 생겨 소 대리님이 추천장을 써서…….”

“그러니까, 그 빈자리가 왜 생겼을까요.”

우신의 검은 눈동자가 나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나는 소 대리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임무 중 사망…….”

직접 소 대리의 말을 읊조리고는 머리를 한 대 맞은 것처럼 서둘러 우신이 건넨 철제 파일을 훑었다.

민지민의 그룹에게 괴롭힘을 당했던 에스퍼들의 사진이 차례대로 나왔다.

여러 에스퍼의 증명사진 위로 사망을 알리는 ‘데스’ 도장이 찍혀 있었다.

나는 아직도 그때를 생각하면 등골이 오싹해졌다.

내 앞에서 뻔뻔하게 괴롭힘을 주도하던 유제이는 한때 괴롭힘을 당하던 타깃이었다.

그러니 이 모든 건 괴롭힘의 대물림이었다.

경기장 중앙선에 관리자가 나타났다.

그가 두 사람의 상태를 확인하고선 들고 있던 컨트롤러를 조작하자 중앙 모니터 위로 타이머가 나타났다.

큰 부상을 방지하기 위해 주어지는 시간은 단 3분.

3분 안에 녹다운되거나 경기장 아래로 나가떨어지는 이가 패배하는, 아주 단순한 규칙을 지닌 경기였다.

단상 아래로 내려간 관리자가 호루라기를 입에 물었다.

그 모습에 흥분한 에스퍼들이 휘파람을 불고 방방 뛰기 시작했다.

파이트머니를 건 투기장과 다른 바 없는 광경이었다.

곧 대련의 시작을 알리는 호루라기가 높게 울렸다.

대련의 시작을 알리는 호루라기 소리에 화면의 숫자가 빠르게 줄기 시작했다.

그것이 괜히 마음을 조급하게 만들었다.

나는 지그시 두 사람을 바라봤다.

지원은 최대한 제 페이스를 유지하려는 듯 꿈쩍 않고 유제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제 이야기 나눈 작전대로였기에 놀랍지 않았다. 뜻밖인 건 유제이의 태도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