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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죽음이 당신에게 미치는 영향 (53)화 (53/183)

내 죽음이 당신에게 미치는 영향

53화

* * *

훈련장의 끝과 끝을 왕복하는 운동은 쉽고 간단하게 전신 능력치를 확인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다.

정신계는 통과 기준치가 높지 않아 별로 어렵지 않게 통과했다.

땀을 닦으며 물을 마시는데, 뒤쪽에서 기록을 재던 관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지원 에스퍼.”

다음 차례는 지원이었지만 대기 줄에는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관리자는 몇 번 더 지원을 호명한 뒤 들고 있던 기록표에 가위표를 하고는 다음 주자를 불렀다.

앞에서 물을 마시던 에스퍼들은 그 모습을 보다 저들끼리 떠들었다.

“벌써 6일째 아니야?”

“훈련은 몰라도 테스트 하나를 아예 포기하다니. 오래 버티나 했는데 결국 내뺀 모양이네.”

“무능한 자기 주제를 파악 못 하고 여기 온 것부터가 실수지.”

“그런 놈이 꼭 주기적으로 한 명씩 있는 게 문제지만.”

두 사람은 내가 뒤에 있는 걸 뻔히 알면서, 주제 파악이라는 단어를 힘주어 말했다.

시시덕거리는 웃음소리를 무시한 채 수건으로 땀을 닦았다.

삑-

때마침 다음 주자의 기록 측정이 끝난 듯 호각 소리가 들려왔다. 그 뒤로 에스퍼들의 웅성거림이 따라붙었다.

“신기록이네.”

“어떻게 유제이만 번번이 신기록 갱신이 저렇게 쉬워.”

왕복 100회차를 5분 만에 주파한 유제이는 땀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있었다.

그는 지루하다는 듯 기지개를 켜다 나와 눈이 딱 마주쳤다. 유제이가 씩 미소 지었다.

웃을 때마다 보이는 덧니가 사나워 보였다.

그는 깡충깡충 뛰듯 내게 다가왔다.

“한지원 헌터가 요즘 안 보이는데.”

“…….”

내가 그를 무시하고 탈의실 쪽으로 몸을 돌리자 제이는 보란 듯 내 앞을 가로막았다.

“냉정한 얼굴을 하고서는 제법 따뜻한 면이 있나 봐.”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지.”

“내 생각을 보더니 쪼르르 달려가서 말해 줬나 보지?”

제이는 고개를 숙여 귓가에 속삭였다.

“죽기 싫으면 도망가라고.”

내 표정이 딱딱하게 굳자 제이는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깔깔 웃었다.

“표정 풀어, 무섭잖아.”

“……이런 걸 원해서 나한테 그딴 걸 보여 준 거 아닌가?”

내 물음에 그는 저도 잘 모르겠다는 듯 제 아래턱을 매만지다 씩 웃어 보였다.

“그렇긴 한데, 정말 도망가면 곤란하다고……. 뭐, 어차피 걔는 다시 돌아올 테니 상관없으려나.”

다 들리게 혼잣말을 하던 유제이가 방긋 웃었다.

“집공 팀에 거머리처럼 붙어 있어야 할 이유가 있거든, 걔한테는.”

그는 그 말과 함께 자리에서 떠났다.

* * *

나는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은 뒤 머리를 덜 말린 채 숙소로 돌아왔다.

걸어오는 내내 6일간 무리한 탓에 뭉친 어깨를 두드렸다.

익숙한 걸음으로 숙소로 가 카드키를 찍고 방 안으로 들어섰다.

나는 신발을 벗기도 전에 보이는 거실의 풍경에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에너지 운용하는데 집을 이렇게 엉망으로 만들어야 하는 이유가 뭔가요?”

내 물음에 소파 뒤에 숨어 있던 지원이 고개를 빼 들며 민망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왔어요?”

나는 피곤한 얼굴을 쓸어내렸다.

“진척도는요.”

내 물음에 지원은 눈알을 데구루루 굴리더니 애매하게 답했다.

“그게 이제 좀 양하나 헌터가 했던 말이 뭔지 조금 알 것도 같고…….”

“그럼 몸 밖으로 방출해 봐요.”

“……모를 거 같기도 하고.”

지원은 내 눈치를 보더니 민망한 듯 웃었다.

정말이지 내가 판 무덤이라는 건 잘 알고 있다만, 생각보다 더 한지원은 에너지 운용에 재능이 없었다.

덕분에 6일 내내 시간을 쏟았는데도 지원은 좀처럼 감을 잡지 못했다.

* * *

“손은 왜요?”

손을 달라는 말에 지원이 경계심이 가득 담긴 얼굴을 했다. 나는 그의 표정에 어처구니없는 얼굴로 답했다.

“보니까 종합 평가가 C-가 떴던데. 평균값을 깎아 먹은 게 개인기 부분이었고요. 맞죠?”

“…….”

지원은 딱히 긍정하지도 부정하지도 않았다. 다만 그의 표정만큼은 투명했다.

나는 평가날 나눠 받은 등급 평가서를 떠올렸다.

지원은 가장 점수 따기 쉬운 개인기 항목도 점수가 낮았다.

처음에 그걸 보고는 어지간히 개인 능력이 형편없나 보구나,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게 쉽게 생각하자니 그가 이 팀에 있는 이유가 납득이 되지 않았다.

그러던 중 평가서 마지막 줄에 짧게 적힌 피드백이 내 눈길을 사로잡았다.

“능력 과다 사용 및 컨트롤 미숙.”

소 대리가 적은 피드백을 그대로 읊자 지원은 입술을 삐쭉거렸다.

“시비라도 걸고 싶은 겁니까? 집공 팀까지 와서 제 능력 하나 컨트롤하지 못한다고.”

지원은 이제 막 집공 팀에 올라온 내게 이런 소리를 듣는 게 제법 자존심 상하는 모양이었다.

“설마요.”

컨트롤 미숙은 결국 가장 기초가 되는 에너지 운용에 문제가 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 아이러니를 확인하고 싶어서 손을 달라고 말한 것이었다.

직접 만져 보는 것만큼 상대의 에너지를 확실히 확인할 수 있는 것도 없으니 말이다.

나는 먼저 손을 뻗어 보였다.

“제가 에너지 컨트롤이 미숙한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거 같다고 하면 믿어 볼래요? 손해볼 건 없을 텐데.”

지원은 잠시 내 손과 얼굴을 번갈아 보다 머리에 과부하가 온 듯 제 머리칼을 흐트러트렸다.

“손만 주면 되는 겁니까?”

그의 말에 씩 웃어 보이고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지원의 손이 내 손 위로 포개졌다. 나는 작게 심호흡하고는 정신을 집중했다.

그의 에너지 길을 살피는 과정은 정신 감응과 비슷했지만, 결코 함부로 그의 힘을 빼앗아 오면 안 됐다.

하지만 내부로 진입할수록 본능적으로 내 몸이 지원의 거대한 에너지를 욕망했다.

그가 집공 팀에 있는 것이 단순한 운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듯, 지원의 몸 안에는 아주 짙고 푸르른 에너지가 넘실거리고 있었다.

“읏.”

가이드가 아닌 에스퍼의 에너지가 제 몸 안을 훑는 것이 익숙지 않은 듯 그의 잇새로 버거운 신음이 흘렀다.

탐색 시간이 길어지면 지원은 물론 내 몸에도 부담이 올 것이다.

나는 최대한 에너지가 아닌 길에 집중했다.

그리고 이내 나는 문제의 원인을 찾을 수 있었다.

때맞춰 지원은 결국 참지 못하고 내 손을 뿌리쳤다.

기술이 서툰 탓에 맞잡고 있던 지원의 손이 불에 덴 듯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 모습에 나는 급히 사과했다.

“미안해요. 그럴 생각은 없었는데, 아직 능력이 미숙해서…….”

“괜찮습니다.”

지원은 내 사과를 잘라 내더니 조급한 눈으로 시선을 맞춰 왔다.

“그래서 ‘찾는다는 건’ 찾았어요?”

“…….”

잔뜩 경계한 주제에 용케도 손을 내민다 싶더니, 역시 가장 조급한 건 지원이었다.

A급 에스퍼이면서 제 능력을 제어하지 못한다는 건 큰 치욕이자 슬픔이었을 것이다.

기대와 두려움이 섞인 눈을 한 지원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네…… 찾았어요.”

“이렇게 쉽게요?”

찾았다는 내 말이 믿기지 않는지 그는 커진 눈으로 말을 더듬었다.

그 모습이 우스워 나도 모르게 웃어 버렸다.

거대한 바다 같은 푸르른 에너지를 가진 지원은 몸 안의 그릇 크기도 남달랐다.

하지만 그에 비해 에너지가 순환해야 하는 길이 아주 좁고 갈래가 많았다.

그렇게 되면 치명적인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에너지 운용의 첫 번째 단계가 바로 에너지를 빠르게 순환하는 것이다.

그런데 방대한 에너지에 비해 길이 좁고 갈래가 많으면 남들의 배에 달하는 힘을 운용에 쏟아야 겨우 에너지를 다룰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운용할 때마다 아팠을 거 같은데, 맞나요?”

내 물음에 지원은 정곡을 찔린 듯 어깨가 움찔 떨렸다.

“……그걸 어떻게.”

“에너지 길이 좁고 갈래가 많으니 당연하죠.”

내 말에 지원은 지난 고통을 떠올리듯 미간이 좁아 들었다.

예열 단계인 운용에서부터 몸이 찢겨 나가는 고통을 느끼면, 누구라도 쉽사리 능력을 제어할 생각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 상태로 집공 팀에 들어올 만큼의 실적을 쌓았다니.

나는 지원을 쳐다봤다. 순하게 생겼는데 대단한 근성을 가진 모양이었다.

“굳이 공격 1팀에 계속해서 남아 있는 이유를 물어도 될까요? 그 정도의 고통을 참아 가며 남아 있을 만큼 값어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데…… 1군에 소속되기만 해도 급여나 복지는 충분할 테고요.”

우려 섞인 목소리에 지원은 입술을 달싹이다 그늘진 얼굴로 답했다.

“그 질문에 꼭 답해야 하나요? 중요한 건 살아남는 거 아닌가요.”

“…….”

그의 몸 상태가 걱정돼 나온 물음이었다.

누구에게나 숨기고 싶은 비밀이 있기 마련이니 당연히 개인적인 이유라면 답하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다만 불안하게 흔들리는 그의 눈빛을 보고 있자니 실수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고개를 저어 보였다.

“대답하지 않아도 돼요. 지원 헌터의 말처럼 그보다 중요한 게 남았으니까.”

지원은 한시름 놓은 사람처럼 후,하고 숨을 내쉬었다.

“그보다 지원 헌터 의지가 어떻든 간에 앞으로 남은 두 테스트 모두 낮은 평가를 받으면 퇴출당하는 거 아닌가요?”

정곡을 찔린 듯 지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핸드폰으로 캘린더를 확인했다.

딱 일주일 뒤 유제이가 살인을 예고한 그날도 테스트가 잡혀 있었다.

“일주일. 테스트 하나를 포기하더라도 남은 시간은 그 정도인가.”

내 혼잣말에 지원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는 비장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일주일 안에 적어도 지금보다는 에너지를 운용하기 편하도록 만들어 줄게요. 이래 봬도 에너지 운용에는 자신이 있거든요.”

“……그걸 왜 양하나 헌터가 도와주나요?”

왜 도와주냐니.

의외의 질문에 나는 잠시 두 눈을 끔뻑이다 답했다.

“중요한 건 살아남는 거라면서요. 저 역시 그쪽과 같은 목표예요. 여기서 살아남기. 그러기 위해서는 이편이 저한테 이득일 거 같다고 생각한 것뿐이에요.”

살아남아야 하는 이유가 있다는 내 말에 지원은 미심쩍은 얼굴로 물었다.

“이유를 물어도…….”

“안 돼요.”

단호한 내 대답에 지원의 어깨가 축 처졌다. 그 모습에 나는 기다렸다는 듯 말을 이었다.

“대신 반드시 에너지 운용에 성공하도록 도와줄게요.”

내 자신만만한 미소에 지원은 내가 무슨 짓을 할지 감히 예감도 되지 않는다는 얼굴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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