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죽음이 당신에게 미치는 영향
47화
그의 모습을 힐끔거리다 눈이 마주쳤다. 놀라 급히 시선을 피하는데 우신이 말을 걸어왔다.
“컨디션은 어때요. 마지막 가이딩 때 거의 회복되긴 했었지만, 그때 보니 몸 상태가 엉망이던데.”
우신은 마치 일을 하러 온 사람처럼 사무적으로 물어왔다. 나는 그의 물음에 미간을 좁히며 답했다.
“……대답해야 하는 건가요?”
날 선 내 물음에 우신은 말하다 말고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더니 부드럽게 답했다.
“그럴 이유 없죠. 단지 조금 더 몸을 소중하게 다루라는 말이었습니다.”
“…….”
가이딩 직후 그를 등지고 방을 빠져나올 때만 해도 분명 우신이 화가 나 있는 것 같다고 느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그 이후로 한 번씩 내게 부드러운 미소를 내비쳤다.
꼭 날 통해 다른 사람을 보는 듯 말이다.
나는 숨겨 둔 비밀을 들켜 제 발 저리는 사람처럼 날카롭게 답했다.
“그러니까 강우신 가이드가 왜 제 몸 상태에 대해 그렇게까지 신경 쓰는 건지 모르겠네요. 전담 가이드도 아니고…… 주제넘은 걱정이지 않나요?”
모질게 나간 말에 나는 그의 시선을 피했다.
하지만 정작 우신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 제 아래턱을 매만지며 나직하게 읊조렸다.
“……전담 가이드면 해결되는 문제였나요?”
“네?”
이상한 방향에 꽂힌 듯 우신의 눈빛이 진지했다. 잘못 대답했다가는 복잡한 일을 만들 것 같은 얼굴이었다.
나는 당황해서는 급히 화제를 바꿨다.
“그런 이야기를 하려고 온 게 아니지 않나요?”
나는 손목시계를 확인하며 말을 이었다.
“저도 곧 복귀해야 해서요. 본론만 말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러자 우신은 마치 잊고 있었다는 듯 작은 탄성을 내뱉고는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말을 이었다.
“그럼 양하나 헌터님께서 바쁘신 거 같으니 본론만 말하겠습니다.”
“네, 좋아요.”
우신은 본론만 말하겠다더니 제 앞에 따라 둔 차를 마셨다. 나는 그 여유로운 몸짓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리고 마침내 묘한 기류 속에서 우신은 찻잔을 내려 두며 입을 열었다.
“우리 각인합시다. 양하나 헌터.”
“……네. 네?”
나는 놀란 나머지 크게 되물었다. 그는 상관없다는 듯 말을 이었다.
“양하나 헌터에게는 전혀 나쁠 거 없는 일일 겁니다. 이 몇 달 사이 체질이 변하면서 가이딩 적합도가 급격히 낮아져 웬만한 가이드와는 가이딩에 문제가 있으시잖아요.”
“…….”
“에스퍼에게 가이딩이 어떤 의미인지는 저보다야 양하나 헌터가 더 잘 아실 테고. 매칭률이 세 자리가 뜨는 건 듣도 보도 못한 것이니, 앞으로의 활동에 분명 제가 필요하시…….”
“잠깐만요.”
나는 속사포처럼 말을 뱉는 우신을 막았다.
평온한 표정으로 폭탄 발언을 해서 하마터면 아침 인사 하듯 넘어갈 뻔했다.
누구는 각인하자는 말을 하기까지 별의별 고심을 다 하던데 이 남자는 뭐가 이렇게 간단한건지.
이런 건 냅다 집으로 불러다 차 마시며 할 이야기는 아니지 않나?
나는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쁘건 나쁘지 않건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내 말에 우신은 두 눈을 끔뻑이며 이상한 소리를 들은 사람처럼 물었다.
“그럼 뭐가 중요합니까?”
“……몰라서 묻는 거예요?”
박희민이나 민지민이나 주변에 원체 나사 하나 빠진 놈들이 수두룩하긴 했으나, 이제 보니 가장 무서운 놈이 여기 있었다.
각인은 돌려 말해 평생의 반려를 맞이하는 일이기도 했다. 단순한 파트너 같은 게 아니었다.
그런데 그런 중요한 문제를 이런 식으로 결정 내리다니.
게다가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와 사이가 좋지도 않았으면서 말이다.
안 본 사이 성숙해진 줄 알았더니 아직도 애가 따로 없어…….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불쑥 거대한 그림자가 날 덮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확 젖혔다.
“……머리칼이 엉망이라서요.”
우신은 단순히 엉망이 된 내 머리칼을 정리해 주려 손을 뻗은 것뿐이었다.
“…….”
가이딩하려던 것도 아니었는데 그가 가깝게 다가오자 나도 모르게 몸이 반응했다.
마치 본능적으로 그와 닿는 게 위험하다 여긴 것처럼 말이다.
지금껏 미동 없던 우신의 눈매가 일순 가늘어졌다.
“참 이상하네요.”
“…….”
“사실 이런 제안을 먼저 해야 할 사람도, 매달려야 하는 것도 모두 양하나 헌터 아닌가요?”
안 그래도 낮은 목소리인데 고저 없이 말하자 한없이 냉소적으로 들려왔다.
“이상 게이트에 제가 없었다면 양하나 헌터가 어떻게 됐을지 알고 있겠죠……. 폭주 직전이었으니까.”
그는 어쩐지 몹시 화나 보였다. 이내 우신이 시선을 진득하게 맞춰 왔다.
“그건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그런데 그걸 알면서도 저를 피한다는 건 역시…….”
“…….”
“죽고 싶기라도 한 겁니까?”
우신에게 이런 말을 듣게 될 줄 몰랐다.
그리고 왜 하필 이런 순간에 이곤의 말이 생각나는 걸까.
“모르긴 몰라도 현 상황만 보면 강우신 가이드에게 성시현 에스퍼는 좋게 쳐줘도 배신자 정도가 아닐까.”
“덕분에 성시현 에스퍼가 하던 센터의 개 노릇을 재각성한 강우신 가이드가 오롯이 떠맡게 된 거잖아.”
나는 입 안의 여린 살을 꽉 깨물었다. 함부로 튀어나올 말들을 누르고 눌러 겨우 운을 뗐다.
“……그러고 보니 저번에 그런 말을 했었죠?”
“…….”
“어떤 이유에서건 강우신 가이드를 지키려 하지 말라고.”
그때 충동적으로 그 이유가 성시현 때문이냐고 물었고, 대답은 결국 듣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이라면 조금 다른 대답을 들을 수 있지 않을까.
우신의 검은 눈동자는 깊은 심연을 닮아 도무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속내를 알기 힘들었다.
그저 침묵이 긍정을 대신한다 생각하며 나는 나직하게 말을 이었다.
“강우신 가이드의 말이 전부 맞습니다. 에스퍼에게 가이딩은 목숨과 직결된 문제고 그쪽이 제안한 것 역시 제게 전혀 나쁠 거 없죠. 하지만.”
나는 찻잔을 양손으로 감쌌다. 아직 남아 있는 온기가 전해져 왔다.
“강우신 가이드가 보신 대로 저는 삶의 미련이 많지 않아서요.”
“…….”
“그러니 저와 거래를 하고 싶은 거라면 다른 걸 주세요. 예를 들어 강우신 가이드님의 과거 같은 거요.”
내 말에 우신의 눈이 흥미롭다는 듯 커졌다. 나는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갑자기 태도가 돌변한 이유도 좋습니다. 원래 저를 싫어했잖아요?”
그가 빠져나갈 퇴로를 전부 막았다. 나는 내 제안 절대 물리지 않을 거란 얼굴로 그를 빤히 쳐다봤다.
우신은 얼마간 가만히 나를 바라보다 낮은 한숨과 함께 말을 이었다.
“양하나 헌터랑은 뭐 하나 쉬운 게 없네요. 물론 그 점이 마음에 드는 거지만.”
“…….”
“질문에 대답하기 전에 이거 하나는 확실하게 해 두죠.”
우신은 내 쪽으로 고개를 들이밀고 단호하게 말을 이었다.
“먼저 저를 건든 건 양하나 헌터였습니다. 그리고 이미 제 과거를 봐 놓고 다시 알려 달라고 하는 것도 참 이해하기 어렵군요.”
우신은 난감하다는 듯 이마를 쓸어 올렸다. 반듯한 이마가 보였다.
“태도가 돌변한 건 단지 호기심이 일었을 뿐입니다.”
“호기심이요?”
“네. 제가 봤던 에너지의 빛이 누구의 것인지 말이에요.”
아직 의심을 버리지 않은 모양이었다.
내가 입을 꾹 다물자, 우신은 내 폐부를 찌른 것에 만족한 듯 미소 지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옛이야기를 꺼내기만 하면 쉽게 흔들렸던 주제에 이제는 그걸 무기로 쓸 수 있게 되었나 보다.
나는 결국 꼬리를 내리듯 말을 이었다.
“어차피 각인은 상부의 결정에 따를 수밖에 없는 거 아닌가요? 우리 두 사람의 결정을 상부가 가만히 두고 볼 리도 없고.”
“그런 거 상관없이요.”
“네?”
“양하나 헌터 마음은 어떠냐는 질문입니다. 주변의 걸림돌이 없다면 양하나 헌터는 저와 각인하고 싶습니까?”
반질반질한 검은 눈동자가 나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어딘지 오싹한 시선에 나는 급하게 고개를 저었다.
“사양하겠습니다.”
“…….”
“저한테 S급 가이드는 부담스럽거든요.”
너무 직설적으로 말한 모양이었다.
일순 우신은 기가 죽은 듯 어깨가 내려갔다. 우신이 새초롬한 어투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양하나 헌터는 위로 올라가고 싶은 거 아닌가요? 그렇다면 분명 제가 필요해질 겁니다.”
강한 자신감을 드러내는 모습이 새삼 과거의 후배 강우신을 떠올리게 했다.
‘그때부터 자신감 하나는 대단했지.’
괜히 옅은 웃음이 새어 나왔다.
우신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자, 재빨리 웃음기를 지우며 답했다.
“괜찮습니다. 오히려 강우신 가이드가 아는 척하면 더 피곤해질 거 같으니까요.”
나는 그 말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대충 제 뜻은 전부 전했으니 가 보겠습니다. 차 잘 마셨어요.”
우신은 입술을 달싹이다가 날 잡기를 포기한 듯 데려다주겠다고 했다.
나는 어차피 코앞이니 됐다고 정중히 사양하고는 그곳을 빠져나왔다.
양하나의 몸으로는 우신과 좀처럼 대화다운 대화를 나누지 못했었는데, 오늘은 옛날처럼 편하게 대화했다.
그게 제법 기분 좋은 탓인지 수확 없이 돌아가는 걸음이 가벼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