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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죽음이 당신에게 미치는 영향 (37)화 (37/183)

내 죽음이 당신에게 미치는 영향

37화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무섭게 두어 걸음 떨어졌다.

울렁이던 에너지가 모두 제자리를 찾아가긴 했으나, 근육이 이완된 것처럼 몸을 제대로 움직이기가 어려웠다.

나는 겨우 손을 들어 얼굴을 감싸 쥐었다.

“…….”

손바닥에 달아오른 얼굴을 묻은 채 좀처럼 진정되지 않는 숨을 골랐다.

후배는 거짓말쟁이였다.

이런 걸 고작 끝내주게 좋다는 말로 퉁 치려 했다니.

이건 그 정도의 수준이 아니었다. 정말이지 순간 이성을 잃을 뻔했다.

만약 우신이 내 손을 놓는 게 1초라도 늦었다면, 나는 당장 그의 몸을 끌어당겨 가까이 다가섰을 것이다.

상상만 해도 아찔했다.

몸을 녹이다 못해 뇌가 달콤한 무언가에 푹 담긴 듯 우신 말고는 무엇도 생각할 수 없었다.

나는 손 틈새로 우신을 힐끗 내려다봤다.

괜히 S급 가이드가 아니었다.

마음만 먹으면 웬만한 에스퍼 정도는 제 마음대로 쥐고 흔들 정도의 능력이었다.

그의 힘에 새삼스레 감탄하면서도 상위 에스퍼와 일대일의 상황에 놓일 우신이 걱정됐다.

나 정도 되니 빠르게 정신을 차린 거지 만약…….

망나니 같은 에스퍼가 이런 가이딩을 받는다면, 상상하기도 싫은 일이 발생할지도 모른다.

그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자 저절로 몸에 힘이 들어갔다.

“…….”

그러나 지금 내 꼴을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다.

붉어진 얼굴을 어쩌지 못해 쩔쩔매고 있는 주제에 도대체 누굴 걱정하고 있는 건지.

나는 여전히 얼굴을 반쯤 가린 채 입을 열었다.

“……이 정도면 충분합니다.”

일단은 이 자리를 벗어나야 했다. 겨우 그렇게 말하고는 뒤를 도는데, 우신이 입을 열었다.

“여긴 어떻게 들어왔습니까.”

“…….”

무시하고 갈 법도 했는데, 그의 목소리에 저절로 몸이 멈췄다.

머리가 어지럽고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나는 그를 등진 상태로 나직하게 답했다.

“소 대리님께 말하고 들어온 거니 신경 쓰지 마세요.”

그렇게 말하고는 무거운 걸음을 옮겼다. 발을 내디딜 때마다 온몸이 울렸다.

가이딩 직후 온몸의 에너지 길이 열린 듯 감각이 예민했고, 그 날 선 감각이 등 뒤에 있는 우신을 의식하게 했다.

가이딩받기 전까지만 해도 그를 이렇게까지 의식한 적도, 존재감이 크다고 여긴 적도 없었다.

그런데 우습게도 단 한 번의 가이딩만으로 이렇게 됐다.

어떻게 지금껏 저렇게 어마어마한 존재감을 모를 수 있었는지 신기할 정도였다.

힘겹게 문을 향해 걸어 나가는데, 소파에 앉아 있던 그가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큰 보폭으로 다가오더니 주저 없이 내 팔뚝을 붙잡아 날 돌려세웠다.

“……도대체 그런 얼굴로 어딜 가겠다는 건지.”

우신의 눈동자에 비친 나는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고 있었다.

그는 작게 혀를 차더니 마치 종이 인형 다루듯 나를 들어 그가 앉아 있던 1인용 소파에 앉혔다.

“안 건드릴 테니, 진정될 때까지 앉아 있다 가요.”

내 상태를 정확히 진단한 듯 우신은 두 걸음 정도 나와 거리를 두고 섰다.

“…….”

확실히 서 있을 때보다 속이 조금 편해지는 거 같지만, 정면에 선 그가 보내는 시선이 너무 뜨거웠다.

애써 눈을 피하는데 우신이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불편하면 눈을 감아도 좋습니다.”

“…….”

“그 대신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그는 계속해서 나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에게 가이딩 말고는 다른 능력이 없을 텐데, 어째선지 내 안을 들여다보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나는 결국 쫓기듯 눈을 감았다. 대답을 하지 않았지만, 우신은 자연스레 말을 이었다.

“돌려 말하는데 소질도 없고, 지금은 그러고 싶은 기분도 아니니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습니다.”

“…….”

“양하나 헌터.”

우신의 목소리가 텅 빈 공간에서 울렸다.

“그쪽이 어떻게 그 힘을 쓰는 겁니까.”

“…….”

그의 물음에 자연히 눈을 뜰 수밖에 없었다.

휘둥그레진 내 눈에도 우신은 말을 물릴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 힘이라니.

나는 이상 게이트에서 감응한 황금빛 에너지를 떠올렸다.

설마 우신은 그걸 이야기하고 있는 걸까?

뭔가 알고 하는 말인 걸까, 아니면 단순히 나를 떠보는 걸까.

어떤 것이든 내가 할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나는 단호하게 답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내 대답에 우신은 눈매가 가늘어졌다.

“거짓말을 할 생각이라면 조금 더 성의 있게 하는 게 어떨까요.”

“…….”

우신은 한 걸음씩 천천히 다가왔다. 잠시 잠잠해졌다고 생각한 울림이 거세졌다.

빠르게 뛰는 심장 소리가 그에게까지 들릴 거 같았다.

이내 우신은 내 앞에 섰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내 눈은 피할 수 없습니다.”

정말 뭔가 알고 있는 눈치였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질려 갔다.

나는 시선을 돌려 겨우 입을 열었다.

“……그저 그건 제 능력일 뿐이겠죠.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생사람 잡는 겁니다. 실수하시는 거라고요.”

혓바닥이 움직이는 대로 아무 말이나 내뱉었다.

내가 생각해도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건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그러자 우신은 더 이상 못 들어 주겠다는 듯 허벅지 위에 놓인 내 손을 조심히 그러쥐었다.

서둘러 그의 손을 쳐 내려 했지만, 그 짧은 찰나에 우신은 제 에너지를 흘려 넣었다.

그는 사색이 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고개를 숙여 작게 속삭였다.

“무작정 잡아떼기에는 시현 선배와 에너지의 파동이 너무 닮았습니다. 양하나 헌터.”

“…….”

나만 우신의 에너지를 기억하고 있는 게 아니었다.

그 역시 내 에너지를 기억하고 있었다.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뜨거웠다. 당장에라도 어떤 대답을 해 주길 바라는 얼굴이었다.

그리고 그 대답에 따라 우신의 단단한 가면이 순식간에 형태를 바꿀 것이다.

평소처럼 태연하게 대답하면 되는데, 헛소리 말라고 밀쳐 내면 될 뿐인데…….

심연을 닮은 그의 검은 눈동자를 마주하고 있자니 계속 속으로만 삼켜 온 말이 목구멍을 간지럽혔다.

그도 그럴 게 설마 그가 먼저 내 이름을 말할 줄 몰랐다.

“……그게.”

저지할 수 없는 진실이 쏟아져 나오려는 순간,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열렸다.

“10분 지났습니다.”

나와 우신의 시선이 그곳으로 향했다. 문턱 너머에는 나를 처음 이 방으로 안내한 에스퍼가 서 있었다.

“…….”

열린 문밖에서부터 희미하게 바람이 불어왔다.

머리가 멍했던 건 이 방의 공기가 부족했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급히 입을 다물고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우신은 잠시 나를 내려다보다 결국 끝까지 모르는 척하겠다는 거군요, 라는 말과 함께 몸을 틀어 길을 터 줬다.

나는 아무런 대답 없이 문 쪽으로 향했다.

그 방을 어떻게 빠져나왔는지 정확히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빠르게 그의 곁을 벗어났다.

* * *

게이트는 현실과 분리된 또 다른 공간이다.

그래서 게이트 안과 밖의 시간이 다르게 흐를 수도 있다는 건 헌터들에게 기본 상식이었다.

게이트 안에서의 몇 시간이 현실에서의 며칠일 수 있었다.

하지만 대체로 그 시차는 크지 않아 아주 기본적인 사실이지만 곧잘 간과해 버리곤 했다.

13번 팀의 돔 안에 생긴 이상 게이트가 바로 그런 케이스였다.

이상 게이트 안에서 13번 팀원들은 몇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게이트 클리어 후 밖으로 나왔을 땐 이미 돔 이벤트가 끝난 것은 물론 사흘이나 흘러 있었다.

센터는 이상 게이트를 확인하자마자 급히 입장문을 발표했다고 한다.

[모든 팀원에게 동등한 기회를 주기 위해서 이벤트 심사의 결과는 추후 발표할 예정입니다]

언뜻 보면 사고에 휘말린 13번 팀을 위하는 듯했지만 그건 돌려 말해 13번 팀의 사고로 인해 결과 발표가 미루어진다는 것과 다름없는 말이었다.

이 이벤트에 사활을 건 이들이 많았다.

발표가 기약 없이 미루어지는 건 그들에겐 고문과도 같았다.

처음 그 입장문이 발표됐을 땐 주제도 모르고 참여한 팀 때문에 괜히 다른 이들이 피해를 본다며 수많은 비난의 화살이 날아들었다.

하지만 머지않아 이야기는 다른 국면에 접어들었다.

이상 게이트의 등급이 A급이었으며 게이트 주인이 E형 드래곤이었다는 사실이 알려졌기 때문이다.

재수도 없다며 낄낄대던 에스퍼들은 13번 팀이 사망자 없이 A급 게이트를 클리어했다는 말에 입을 다물었다.

그 사실이 어디서 새어 나갔는지 모르겠지만, 덕분에 이젠 센터의 모두가 아는 사실이 됐다.

그러니까 이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

나는 건조한 눈으로 고개를 뒤로 젖혀 취조실의 천장을 올려다봤다.

C급 에스퍼의 A급 게이트 클리어라는 전례 없는 사건은 감시과에서 나를 회부하기에 충분했다.

그래도 그렇지, 퇴원한 지 두 시간도 안 된 사람을 잡아다 이 좁은 취조실에 앉혀 놓을 줄은 몰랐다.

“그만큼 조급하다는 거겠지…….”

그렇게 나직하게 읊조리는데, 타이밍 좋게 감시과 직원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지난번 심문 때 봤던 최강혁 감시관이었다. 그래도 두 번째 보는 거라고 묘하게 반가운 거 같기도 하고.

그가 맞은편에 앉고서야 나는 자세를 고쳐 앉았다.

“다시 뵙네요, 양하나 헌터.”

표정이 거의 없다시피 한데 그 말을 건네는 최강혁의 얼굴이 묘하게 신나 있는 것같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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