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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죽음이 당신에게 미치는 영향 (36)화 (36/183)

내 죽음이 당신에게 미치는 영향

36화

그녀는 한 번도 사용해 본 적 없을 염동력을 다영보다도 잘 다뤘다.

드래곤의 포효에도 양하나는 일말의 동요도 보이지 않았다.

이런 일을 수백 번은 겪어 본 사람처럼 그저 신속하게 작전을 지시하고 군더더기 없는 움직임으로 드래곤의 약점을 공격했다.

그 모습을 보고 누가 감히 그녀가 C급 정신계 에스퍼라 생각할까.

꿈이라 해도 이상하지 않을 모습이었다.

하지만 E형이 변이를 시작했을 때 양하나는 힘을 다했는지 드래곤 앞에서 꿈쩍을 하지 않았다.

마치 바람 앞의 촛불처럼 서서히 꺼져 가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덩달아 우신의 마음마저 무너져내릴 거 같았다.

“양하나!”

말이 목구멍 밖으로 멋대로 쏟아져 나갔다.

“약속 지켜! 보란 듯이 함께 살아 나가기로 했잖아!”

그 순간 그가 할 수 있는 건 고작 그런 말뿐이었다.

우신의 목소리를 들었는지 듣지 못했는지, 양하나는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눈을 감았다.

그리고 이내 눈꺼풀 사이로 드러난 황금색 눈동자를, 우신은 똑똑히 기억했다.

눈을 끔뻑이는 찰나에 그녀는 이미 드래곤의 머리 위로 날아들었다.

스스로 발광하듯 환한 금색을 두르고 날아오르는 모습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우신은 물론 희민과 다영 역시 그 모습을 숨죽이고 바라봤다.

부드러운 움직임을 보고 있자니 누군가를 떠올릴 수 있었다.

“…….”

결국 드래곤은 C급 정신계 에스퍼에 의해 머리가 나가떨어졌다.

분명 죽음 끝에 놓여 있었는데 모두 생존했으며 게이트까지 클리어했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13번 팀 팀원들은 하나둘 굳은 몸을 움직일 수 있었다.

때마침 바닥에 두 발을 디딘 양하나는 가쁜 호흡을 내쉬다 그 자리에 쓰러졌다.

우신은 본능처럼 걸음을 옮겼다.

“양하나 헌터!”

하지만 그보다 먼저 양하나에게 향한 건 박희민 가이드였다.

박희민은 창백해진 얼굴로 양하나의 상태를 살폈다.

이내 제 점퍼를 벗어 바닥에 깔고는 그 위로 그녀를 눕혔다.

피를 뒤집어쓰고 있었지만, 전부 몬스터의 피였다.

양하나는 외상 하나 없이 멀쩡했다. 하지만…….

박희민이 양하나의 손을 잡고 신속하게 가이딩을 시도했다.

황금의 에너지가 소멸한 자리에는 마치 블랙홀처럼 깊이를 알 수 없는 그릇만이 남아 있었다.

그것은 희민의 에너지를 무섭게 잡아먹었다.

“윽!”

이내 희민의 입가에서 피가 흘렀다. 그 모습에 다영이 희민의 어깨를 잡았다.

“그만둬요! 그러다 그쪽이……!”

“하지만!”

“…….”

당연히 가이드의 에너지에도 한계가 있었다.

생명 에너지와 마찬가지였기에 급속도로 에너지를 쏟아부었다가는 고열을 동반한 탈수 증세가 나타나고 심하면 죽을 수도 있었다.

희민을 그걸 알면서도 미련하게 고집을 부리고 있었다.

우신은 나지막하게 희민을 불렀다.

“비키세요.”

희민은 자신의 몸 위로 드리운 그림자에 고개를 올려 우신을 바라봤다.

우신의 눈빛이 평소와 다르다는 건 그 자리의 모두가 느낄 정도였다.

뜨겁게 번뜩이는 시선은 어딘가 화가 나 보이기까지 했다.

희민이 주저하자, 우신은 그의 옆에 무릎 굽혀 앉더니 하나의 상태를 눈으로 살폈다.

“……박희민 가이드가 이대로 무리해서 가이딩을 이어 가는 건 에스퍼와 가이드 양쪽 모두에게 위험합니다.”

냉정한 우신의 말에 희민의 손에 서서히 힘이 풀렸다.

우신은 말없이 희게 질린 하나의 손을 천천히 쥐었다.

창백한 손을 잡는 순간 우신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

말도 안 되는 능력을 사용한다고는 생각했는데, 감히 C급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할 방대한 공간이 느껴졌다.

S급에 비견해도 전혀 부족할 것 없는 크기의 그릇이었다.

우신은 능숙하게 제 에너지를 흘러 넣으며 엉망이 된 에너지의 길을 다잡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내 가이딩을 우뚝 멈췄다. 같은 가이드인 희민은 그 사실을 어렵지 않게 눈치챘다.

“……강우신 가이드님?”

희민이 그를 부르는데, 우신의 낯이 창백하게 질렸다.

그 표정에 희민의 눈이 커졌다.

우신은 빠르게 평정을 되찾으려 했지만 아무리 애써 봐도 표정 관리가 되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모든 에너지를 소모한 듯 텅 빈 그녀의 몸에 미약한 황금의 에너지가 남아 있었다.

6년 만이었지만, 매일같이 그리던 것이었기에 우신은 단번에 확신할 수 있었다.

그건 그가 오래도록 찾아 헤맨 빛이라는 걸.

* * *

나는 1인용 소파 깊숙이 몸을 기대고 앉은 우신을 바라봤다.

상상하던 모습에 비하면 눈앞에 우신은 평온해 보였다.

그럼에도 창 하나 없는 방 안에 힘없이 갇혀 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좀처럼 온몸을 휘감은 불쾌한 기분이 가시지 않았다.

나는 입 안의 여린 살을 깨물며 소파 쪽으로 조용히 걸음을 옮겼다.

내 걸음 소리가 가까워지자 앉아 있던 우신이 입을 열었다.

“소 대리님입니까?”

“…….”

안대를 왜 씌워 놓았나 했더니, 그에게 내가 온다는 걸 말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뭐가 됐든 상관없었다. 아니, 오히려 이쪽이 더 마음 편할지도 몰랐다.

차라리 내 발로 직접 가이딩을 받기 위해 찾아온 걸 그가 몰랐으면 하는 심정이었다.

나는 우신과 발끝이 닿을 정도로 가깝게 다가섰다.

그 자리에 선 채로 침묵만 지키고 있자 우신이 먼저 입을 열었다.

“……누군지 말할 생각이 없나 보군요.”

끝이 살짝 갈라진 목소리가 피로하게 들렸다.

“누군지는 몰라도 에너지의 흐름이 불안한 게 여기까지 느껴집니다.”

냉정한 목소리는 여전했다.

우신은 여전히 내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자, 귀찮다는 듯 한 손을 내밀었다.

“대리님이 여기까지 들여보낸 걸 보니 여간 급한 게 아닐 텐데…….”

“…….”

“그만 뻗대고 손이나 주시죠.”

나는 굳은살이 곳곳에 박인 그의 손바닥을 내려다봤다.

각성한 이후 가이딩에 크게 의존해 본 적이 없었다.

그건 달리 말해 좋은 가이딩에 대한 면역이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천천히 움직인 손끝이 우신의 손바닥에 닿았다.

우신은 내 손끝이 닿자 일순 몸을 움찔거리다 이내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꽉 쥐었다.

깍지를 끼려는 모습에 놀란 나머지 한 걸음 뒤로 물러나려고 하자 우신이 바로 가이딩을 시작했다.

그와 닿은 피부가 뜨겁게 느껴졌다. 잊고 있던 우신의 에너지가 쉴 새 없이 몰아닥쳤다.

성시현이었을 때는 내 몸의 테두리를 떠돌다 그쳤던 우신의 에너지가 지금은 몸속 아주 깊은 곳에까지 달라붙었다.

청량한 감각과는 달리 아주 고집스러웠다.

정신이 녹아들 정도로 높은 효율의 가이딩을 받고 나면 에스퍼는 본능적으로 상대 가이드를 갈구하게 된다고 한다.

그건 자연의 섭리처럼 아주 당연한 것이라고, 각인을 앞둔 후배 에스퍼가 했던 말이 불쑥 떠올랐다.

“정말이지 끝내줘요.”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는 유난스럽게 호들갑을 떤다고 생각했다.

본능이나 섭리 같은 족쇄는 그저 그들의 사이를 더 극적으로 보이길 원해서 만들어 낸 핑계라 여겼다.

분명 그렇게 생각했는데…….

“그…… 그만.”

나는 꽉 잡힌 손가락을 꿈틀거리며 최대한 우신에게서 떨어지려 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그는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이내 에너지 길 구석구석을 끈덕지게 가이딩하던 우신은 다른 손을 안대 쪽으로 뻗었다.

“이런 걸 쓰고 있으면 제가 모를 거라고 생각한 겁니까, 양하나 헌터?”

우신은 나직한 말과 함께 안대를 벗었다. 그의 시선이 자연히 내게 닿았다.

나는 최대한 고개를 돌리려고 했지만 몸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결국 우신과 두 눈이 마주쳤다. 그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당황한 듯 입을 다물었다.

“…….”

지금 내 얼굴이 얼마나 엉망일지는 거울을 보지 않아도 알았다.

붉게 달아오른 두 뺨이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보지 마요.”

“…….”

“고개 돌리라는 내 말이 안 들립니까?”

나는 당황해서는 괜히 큰소리쳤다. 원래라면 우신의 손 따위는 쳐 내고도 남았다.

하지만 그에게 가이딩을 받은 직후인 탓인지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우신은 입술을 다문 채 그런 내 모습을 조용히 지켜봤다. 절대 손은 놓지 않은 채로 말이다.

이 방에 오고자 한 목적은 그의 상태를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그것뿐만은 아니었다.

소명 앞에서는 담담한 척했지만, 사실 강우신이 내 가이딩을 했다는 사실에 크게 동요했다.

성시현의 힘과 감응한 건 내게도 최후의 수단이었다.

아이러니하지만 살기 위해 죽을지도 모르는 방법을 택한 것이다.

힘을 모두 소진해 쓰러질 때는 어쩌면 이대로 다시 눈을 뜨지 못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놀랍게도 죽기는커녕 최고의 컨디션으로 다시 눈을 떴다.

그게 우신의 가이딩 덕분임을 알았을 때의 기분이란.

과거에도 그의 가이딩이 썩 기분 나쁘지 않고 가장 편했다는 게 떠올랐다.

그러자 마음속에 작은 호기심의 씨앗이 자라났다.

혹시 이번에야말로 내게 맞는 가이드가 나타난 게 아닐까. 그게 S급으로 재각성한 우신은 아닐까.

그런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렸지만 스스로를 진정하기 위해 괜히 이렇게 생각했다.

‘만약 그가 내가 찾던 가이드라 한들 변할 건 없어. 그저 그런 가이딩보다 조금 더 나은 수준이겠지.’

나는 겨우 힘주어 우신의 손을 뿌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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