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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죽음이 당신에게 미치는 영향 (32)화 (32/183)

내 죽음이 당신에게 미치는 영향

32화

재빨리 드래곤의 꼬리에 맞은 팀원들을 눈으로 살폈다.

선두에 있던 에스퍼들은 직격타를 맞아 아예 널브러져 있었다.

가까이 가야 제대로 상태를 확인할 수 있을 테지만 몸을 미세하게 떠는 걸 보면 숨은 붙어 있는 것 같았다.

우신과 희민 역시 드래곤의 꼬리가 만들어 낸 강한 바람에 몸이 날아갔다.

벽에 부딪히기 전 다영이 만든 배리어가 완충 역할을 해 준 거 같지만 충격에 기절한 듯했다.

그들과 합류하고 싶어도 몸속이 텅 빈 것처럼 아무런 기력도 나지 않았다.

다영과의 정신 감응으로 가져온 에너지는 바닥난 지 오래였다.

나 혼자, 양하나의 몸으로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X발.”

입 밖으로 저절로 욕지거리가 새어 나왔다.

아주 멍청한 짓을 한 기분이었다.

정신 감응 때문에 성시현일 때와 같은 힘이 생겼다 착각을 한 모양이다.

종지부를 찍으려는 듯 드래곤의 몸은 계속해서 비대해져 갔다.

비정상적인 변이로 인해 몸집이 부글거리듯 빠르게 커지며 근육이 울긋불긋하게 솟았다.

갑작스러운 변화에 통증을 느꼈는지 드래곤은 날개를 펼쳐 요란하게 날갯짓했다.

그 바람에 드래곤과 가까이 있던 내 몸이 공중에 붕 떠 벽에 부딪혔다.

강한 충격에 입 안에 피가 고였다.

나는 몸을 웅크리고 신음을 삼켰다. 온몸이 산산조각 날 거 같았다.

내가 부딪힌 충격으로 벽면에 금이 갔다.

이 벽뿐 아니라 동굴 전체가 금방이라도 허물어질 것처럼 위태롭게 흔들렸다.

이대로면 변이한 드래곤 때문이 아니라 동굴이 무너져 죽을지도 몰랐다.

성시현의 몸으로도 모자라 양하나의 몸으로도 게이트의 암석에 깔려 죽을 운명이라니.

참 뭣 같은 엔딩이었다.

“…….”

무기력함에 몸이 점점 가라앉았다. 이대로 정신이 끊어지겠다고 여긴 찰나, 기침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감겼던 눈이 번뜩 뜨였다.

무거운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무더기로 쓰러진 사람들 속에서 우신이 옅은 신음을 뱉어 내는 게 보였다.

“…….”

나는 한 번 죽은 목숨이었다. 그것도 내 선택으로 말이다.

하지만 이들은 달랐다. 이벤트에 참가한 것도, 무리해서 게이트에 들어온 것도 모두 이기적인 나의 오만함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내게는 아직 남은 책임이 있어.’

입술을 너무 세게 깨문 탓인지 입 안에 비릿한 피 맛이 감돌았다. 덕분에 현실 감각이 또렷해져 왔다.

힘겹게 손으로 땅을 짚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절망적인 현실이 바뀌는 건 아니었다.

다영은 이미 모든 에너지를 다 사용했고 다른 에스퍼와 감응한다고 해도 유효한 타격을 만들 수 없었다.

그러니까 지금 여기에는 정신 감응을 시도할 상대가 없는 셈이었다.

상대.

정신 감응은 일시적으로 타인의 에너지를 내 그릇에 옮겨 오는 형태를 말한다.

그러나 능력이 발동되는 메커니즘은 생각보다 그리 간단하지 않다.

에너지를 안정적으로 옮기기 위해서는 상대와 직접 접촉하는 것이 좋다.

‘홍 반장과의 정신 감응이 수월했던 건 그 덕일지도 몰라.’

하지만 신체 일부를 맞대는 게 능력 사용의 필수적인 조건은 아니다.

내가 눈으로 보고 만져 본 적 있는 사람이라면 그 주체가 일정 범위 안에 산 채로 있는 한 정신 감응을 할 수 있었다.

이미 민지민이 마련한 게임을 하면서 배리어를 사용하는 에스퍼를 대상으로 시험해 보았다.

‘확실히 안정성과 효율이 떨어졌는데…….’

멀리 있는 상대의 에너지를 가져오기 위해서는 그 에스퍼의 에너지 흐름을 정확하게 알고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독극물을 마신 듯한 고통을 맛볼 수도 있다.

그러니까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멀리 떨어져 있는 상대와의 정신 감응은 사실상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하지만 어쩐지 언젠가 읽은 논문의 한 구절이 계속해서 머릿속을 맴돌았다.

‘에스퍼의 에너지는 육체에 머무는 것일까, 영혼에 머무는 것일까.’

아카데미 시절 에너지에 관한 논문을 본 적이 있다.

그 연구원은 에너지가 신의 산물이라는 가설을 증명하기 위해 에너지는 인간의 영혼에 머문다고 주장했다.

단지 가설의 근거로 사용된 주장일 뿐이지만 제법 흥미롭게 본 기억이 있었다.

그러나 얼마 전의 재각성 검사를 통해 그 논문의 주장이 틀렸다는 걸 깨닫게 됐다.

지금 이 육체는 양하나의 것이지만 영혼은 나, 성시현의 것이었다.

그럼에도 재각성 심사 기계는 나를 양하나로 인식했다.

그건 결국 에너지는 육체에 머문다는 이론을 입증한 꼴이지 않나.

“양하나!”

멍청하게 서서 그런 생각을 하는데 일순 우신이 목청이 터져라 나를 불렀다.

그 소리에 반사적으로 몸을 움직여 드래곤이 뱉어 낸 오물을 피했다.

눈이 휘둥그레져서 뒤를 바라보자 상체를 일으킨 우신이 거센 숨을 뱉어 내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희민도 정신을 차렸는지 에스퍼들의 가이딩을 시도하고 있었다.

그들은 이런 최악의 상황 속에서도 아직 포기하지 않고 있었다.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자 우신이 입술을 달싹이다 이내 참아 왔던 말을 토해 냈다.

“약속 지켜! 보란 듯이 함께 살아 나가기로 했잖아!”

“…….”

이렇게나 멀리 떨어져 있는데도 그가 한 글자씩 힘주어 말하는 문장이 기묘할 만큼 잘 들렸다.

나는 그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마른침을 삼켰다.

그러고는 기도하듯 양손을 모아 쥐고 양하나의 내면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이건 도박이었다.

논문의 주장이 단순 가설이 아니라면 분명 양하나의 육체 안 어딘가에 내 에너지의 초석이 있을 것이다.

나는 그걸 찾아내려는 듯 무의식의 내면으로 파고들었다.

그 속을 유영하다 보니 주변이 점점 어둠에 젖어 들었고 마침내 심연을 닮은 텅 빈 공간에 들어섰다.

광활한 공간 속, 아주 먼 곳에서부터 무언가 희미하게 피어나는 게 보였다.

그 빛을 보자마자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십사 년 남짓 내 외로움을 먹고 자라나듯 나와 함께한 황금의 불꽃.

나는 본능적으로 그것과 정신 감응을 시도했고 익숙한 에너지가 폭발적으로 몸 안에 가득 차올랐다.

넘쳐 나는 에너지가 비어 있는 몸 안의 그릇으로 밀려 들어왔다.

그릇을 모두 채우고도 남는 빛이 밖으로 흘러나왔다.

이윽고 내 눈앞의 상황이 선명하게 담겼다.

* * *

순식간이었다.

찢기고 긁힌 상처의 피가 멎고 근육이 팽창하는 게 느껴졌다.

온몸이 타 버릴 것같이 묵직하고 사나운 에너지가 느껴졌다.

한동안 잊고 있었던, 아주 익숙한 감각이었다.

타이밍 좋게 E형 드래곤은 성체로의 변이를 마쳤다.

화염 속성으로 변이한 드래곤은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쿠오오오-!

거대한 포효가 동굴 전체를 울렸다. 아까 전이었다면 기가 눌려 위축됐을 텐데 지금은 달랐다.

‘에너지가 막을 세워 날 지켜 주는 기분이야.’

E형 드래곤은 아슬아슬하게 A급으로 분류되지만, 변이 후에는 속성에 상관없이 S급이 된다.

드래곤의 목이 울렁거렸다.

몸속 깊은 곳에서부터 끓어오르는 불꽃을 뱉어 낼 셈인 듯했다.

예상대로 마그마 같은 오물이 빠른 속도로 날아왔다. 나는 본능적으로 날아올랐다.

사나운 에너지에 손끝이 저리고 주체하기 어려울 만큼 힘이 넘쳐 났다.

그런데도 지금 내 몸을 감싸는 에너지는 홍 반장이나 다영의 에너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부드러웠다.

타인의 에너지를 사용할 때 느꼈던 티끌만큼의 위화감도 없었다.

‘내 에너지라서 그런 건가…….’

드래곤도 강렬한 에너지에 반응하듯 쉽게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이제 양손에는 단검은 고사하고 아무것도 쥐어져 있지 않았다.

그러니 더더욱 침착해야 했다. 에너지에 중독돼 흥분하면 일을 그르칠 수도 있다.

지금은 팀원들을 안전지대로 옮기고 쓸 만한 무기를 구하는 게 먼저였다.

분명 머리로는 알고 있는데,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무리해서 드래곤의 품속으로 파고든 후였다.

나는 순식간에 드래곤의 이마 위에 내려앉았다.

그러고는 뜨거운 열기가 뿜어져 나오는 표피에 손을 얹고 에너지를 있는 대로 방출했다.

크아아악-

드래곤은 귀가 뜯겨 나갈 듯 포효를 내지르며 날아올랐다.

하지만 얼마 날지 못하고 동굴 천장에 부딪혔다.

그 충격에 천장이 갈라지며 바위 몇 개가 운석처럼 바닥으로 떨어졌다.

“피해요!”

나는 반사적으로 팀원들의 머리 위에 배리어를 만들어 피해를 최소화했다.

빠르게 뛰는 심장이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

막 각성한 에스퍼는 처음 취해 보는 거대한 에너지에 ‘에너지 중독 증세’를 보이곤 한다.

평범하게 살아오던 사람에게 에스퍼의 힘은 말 그대로 신의 산물같이 느껴진다.

덕분에 각성 직후의 에스퍼가 넘치는 에너지를 함부로 사용하다 큰 사고를 일으켜, 에스퍼의 각성이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기도 했었다.

신문 1면에서 그 보도를 봤을 때, 어리숙한 에스퍼들에게나 해당하는 이야기라고 생각했는데…….

나는 드래곤의 표피를 짚었던 손바닥을 들여다봤다.

손바닥이 붉게 부르터 살가죽이 찢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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