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죽음이 당신에게 미치는 영향
26화
“양하나 헌터님이 제게 먼저 부탁하는 날이 올 줄은 몰랐네요.”
뭐가 그리 좋은지 희민은 눈을 초승달 모양으로 휘었다. 나는 팔짱을 끼고 앞만 쳐다봤다.
내키지 않지만 이런 메리트 없는 부탁을 들어줄 가이드를 찾아보니 이놈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워낙 제멋대로인 녀석이기에 일종의 도박이라 생각했지만,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마감 기한에 딱 맞춰 승낙했지만 말이다.
덕분에 마감 바로 직전에 13번 팀으로 참가 자격을 얻었다.
급조되긴 했으나 팀이라는 명목하에 여섯 명이 함께 한 테이블에 둘러앉았다.
팀원끼리 얼굴을 맞대는 것이 처음이라 어색한 와중에도 주변의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우리를 제외한 열두 개의 팀은 모두 A급 에스퍼를 중심으로 꾸려졌다.
그중에는 얼마 전 제1 훈련장에서 마주친 에스퍼들도 몇 명 섞여 있었다.
열심히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희민이 입을 열었다.
“역시 쟁쟁하네요.”
“…….”
“7번 테이블에 있는 머리를 노랗게 탈색한 A급 에스퍼 이름이 뭐였더라…… 하여튼 성격 더러워 보이는 저분이 양하나 헌터님을 뚫어지게 쳐다보는데 무슨 원수졌어요?”
해맑은 희민의 질문에 조용히 하라고 눈치를 줬다.
때마침 화려한 복장을 한 사회자가 홀 안으로 나타났다. 그는 싱글벙글한 미소를 띠며 단상 위에 올라섰다.
그가 마이크를 툭툭 치자, 삐익- 하는 기계음이 들렸다.
-아아, 반갑습니다. 이번 이벤트 심사의 사회를 맡은 이공팔입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사회자의 소개에 다리를 꼬고 삐딱하게 앉아 있던 에스퍼 몇 명이 성의 없게 손뼉을 쳤다.
약육강식에 익숙한 에스퍼의 기세에 보통 일반인은 기가 죽기 마련인데, 사회자는 그런 기색 하나 없이 말을 이어 갔다.
이미 공지한 사항을 설명하는 사회자의 말이 슬슬 지루해질 때쯤 사회자가 변환점을 주듯 힘주어 말했다.
-자! 이번 이벤트에서 가장 중요한 시간이 다가왔습니다. 각 팀의 일곱 번째 팀원 추첨, 마지막 구원 투수는 누가 될지!
그 말에 눅눅하게 처진 분위기가 반전되며 모두 흥미롭다는 눈빛으로 단상을 주목하기 시작했다.
-지금 바로 만나 보시죠!
사회자의 마지막 말과 함께 앞문이 열리며 사람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일자로 줄지어 들어오는 자들은 대부분 1군 소속의 A급 에스퍼였다.
그들은 들어온 순서대로 사회자 뒤에 마련된 간이 의자에 앉았다.
“…….”
나는 한 명씩 그들을 살폈다.
이미 최고의 몸값을 자랑하는 이들이 어째서 이런 이벤트에 참여한 건지 알 수 없었다.
게다가 전혀 예상치 못한 인물들이 보였다.
제1 훈련장에서 내 팔을 부러트린 S급 에스퍼와 민지민이었다.
다영은 기가 죽은 듯 어깨를 움츠렸고 희민은 내게만 들릴 만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거 생각보다 규모가 더 큰데요.”
“…….”
S급 에스퍼가 참여하는 것은 예상 밖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모습을 드러낸 13번째 인물에 더 놀랄 수밖에 없었다.
13번째로 입장한 사람은 다름 아닌 강우신이었다.
굳은 표정으로 계속 우신을 바라보자 희민이 한마디 얹었다.
“강우신 가이드 얼굴 닳겠어요.”
“……조용히 하시죠.”
희민은 어깨를 한 번 으쓱해 보이곤 입을 닫았다.
-자, 그러면 1번 팀부터 순서대로 두근두근 추첨을 진행하겠습니다.
사회자는 그 말과 함께 상자에 손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상자 안에서 손을 몇 번 휘젓더니 흰색 공을 들어 올렸다. 공에는 파란 글씨로 이름이 적혀 있었다.
-1번 팀과 함께할 구원 투수는 황주웅 에스퍼입니다.
사회자의 말에 처음으로 박수 소리와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나는 그 모습을 지켜보며 머리를 굴렸다. 일이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거 같았다.
누구든 우리 팀에 들어오는 걸 달가워하지 않을 게 뻔했다.
그렇다면 조금이라도 다루기 쉬운 사람이 들어오는 게 계획에 차질을 주지 않을 것이다.
조심스럽게 단상 위에 앉은 이들을 훑다 민지민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마치 내가 있을 줄 몰랐다는 듯이 놀라는 척하더니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나는 미간을 팍 좁히며 시선을 돌렸다.
그 옆자리에는 강우신이 앉아 있었다.
한 달 만에 보는 얼굴은 전과 다름없이 무표정했다.
그래서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 심사에 참여한 건지 짐작하기 어려웠다.
그와 엮이면 항상 일이 꼬였다.
언뜻 그날 병실에서 본 우신의 얼굴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내 이름을 그렇게 충동적으로 꺼내는 게 아니었는데 말이다.
실타래가 꼬여도 단단히 꼬인 기분이 들어 마음이 불편해졌다.
“…….”
문득 다루기 쉬운 사람이고 뭐고, 강우신과 민지민, 딱 저 두 사람하고만 같은 팀이 되지 않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확률상 저 중 한 사람과 같은 팀이 되기는 힘들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것도 잠시, 내 표정은 점점 어두워졌다.
추첨이 이어질수록 구원 투수 인원이 서서히 줄어들더니 끝내 강우신과 민지민밖에 남지 않게 됐다.
절망적이었다. 누가 들어와도 몸과 마음, 둘 중에 하나는 반드시 피곤해질 거였다.
-벌써 두 분밖에 남지 않았는데요, 그럼 12번 팀의 선수를 뽑겠습니다.
12번 팀의 구성원이 정해지면 자연히 남은 사람이 우리 팀으로 들어오게 된다.
심장이 쿵쿵 뛰었다.
민지민과 같은 팀이 될 바에는 차라리 다음 이벤트를 노리는 게 좋지 않을까.
이마를 짚고 고민하던 그때 책상이 미세하게 흔들리는 게 느껴졌다.
원인을 찾기 위해 고개를 돌리니 불안한 듯 다리를 떨고 있는 다영이 보였다.
“…….”
우리가 이 자리에 모인 이유는 각자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떠올리니 금세 마음이 차분해졌다.
이렇게 된 거 운명을 똑바로 마주하는 수밖에 없었다.
-잡았습니다! 12번 팀과 운명을 함께할 분은!
사회자가 뽑은 공을 확인하더니 밝게 웃으며 소리쳤다.
-민지민 에스퍼입니다! 자연히 강우신 가이드가 13번 팀에 합류하게 됩니다.
사회자의 말과 함께 강우신과 눈이 딱 마주쳤다. 그의 얼굴에도 묘한 당혹감이 스쳤다.
-네, 그럼 모두 삼 일 뒤 이벤트 돔에서 다시 만나요!
* * *
남은 삼 일간 훈련장에서 합을 맞춰 보는 팀도 있었지만, 우리 팀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다영은 그게 못내 걱정되었는지 전화로 우리 팀의 작전을 물었고, 나는 이렇게 답했다.
“오래 합을 맞춘 팀도 짧은 시간 내에 좋은 작전을 짜기는 힘들어요. 그러니 이번 심사에선 각자 쌓아 온 스타일에 집중하는 것으로 하죠. 다만 다영 씨는…….”
이유는 그럴듯했지만 사실상 삼 일이란 시간 동안 B, C급 에스퍼의 합을 기대하는 건 어렵다는 뜻이었다.
다영은 나 대신 다른 사람에게도 내 뜻을 전해 주었다.
덕분에 우리가 다시 모인 건 삼 일 뒤 오래된 체육관 앞에서였다.
언뜻 보기에도 값나가는 보호구나 무기로 무장한 다른 팀과는 달리 우리는 조촐한 모습으로 어색하게 모여 있었다.
팀장으로서 팀원들의 컨디션을 확인하는 도중 문득 한 발짝 물러서 있는 우신에게 시선이 닿았다.
“…….”
작전이 없는 게 작전인 우리 팀에 변수가 있다면 그건 강우신이었다.
게이트 규모가 점차 커지면서 헌터들의 폭주 빈도가 높아졌고, 결국 가이드들을 게이트에 투입하는 일이 잦아졌다.
행동 요령은 알고 있겠지만 가이드가 게이트에 들어가는 것은 여전히 위험한 게 사실이었다.
내가 아는 우신은 게이트에서 안절부절못하던 스무 살의 모습이 전부였다.
그랬던 그가 어떻게 변했을지 궁금하면서도 동시에 걱정됐다.
내가 가만히 우신을 보고 있자 희민이 말을 붙여 왔다.
“눈빛이 너무 애틋한 거 아닌가요?”
희민을 돌아보자 그가 음흉하게 미소를 지었다.
잠시 잊고 있었는데 희민 역시 우신과 같은 가이드였다. 같은 가이드인데 분위기가 하늘과 땅 차이인 건 왜일까.
나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그에게 고개를 까딱 숙여 인사하는 거로 대답을 대신했다.
눈치 빠른 희민은 지금 속으로 자신을 욕하지 않았냐며 귀찮게 달라붙었다.
그런 그를 한 손으로 밀어내던 중 우신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잠시 나를 바라보다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돌렸다.
저번부터 한 번씩 눈이 마주치는데 좀처럼 먼저 인사하는 법이 없었다.
마치 병실에서 그를 내보낸 일로 삐지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나는 하, 하고 한숨을 뱉어 냈다.
의도치 않은 곳에서 문제가 생길 것만 같아 벌써 피곤한 기분이 들었다.
* * *
각 팀의 구성원들이 모두 모이자 현장 담당자가 돔까지의 길을 안내해 주었다.
나는 뒤따라오는 팀원들을 살폈다.
비교적 연차가 높은 희민과 다영은 침착해 보였지만, 나머지 에스퍼들은 좀처럼 긴장을 풀지 못하는 거 같았다.
그리고 앞사람과 거리를 두고 걸어오는 우신은 여전히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얼굴이었다.
나는 내 두 뺨을 가볍게 쳤다. 나라도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했다.
우리는 13번 팻말이 꽂힌 돔 앞에 섰다.
돔이라고 해서 반구형의 커다란 공간을 떠올렸는데 눈앞에 보이는 건 사각 컨테이너뿐이었다.
돔 입구에는 현장 담당자처럼 보이는 검은 양복을 입은 사내가 경직된 자세로 서 있었다.
우리가 일렬로 서자 그가 이어셋을 나눠 줬다.
나는 받자마자 능숙하게 그걸 귀에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