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죽음이 당신에게 미치는 영향
24화
문 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제 몸만 한 과일 바구니를 든 박희민이 서 있었다.
그는 병실 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눈알만 이리저리 굴렸다.
그리고 눈썹을 꿈틀대며 흥미로운 걸 발견했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이거 제가 괜히 눈치 없이 끼어든 게 아닌가 싶네요.”
희민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내가 서늘한 목소리로 물었다.
“여기에는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내 냉담에 반응에 그는 의기양양하게 말을 이었다.
“우리 양 헌터님께서 얼마나 급했으면 시간 있는 가이드면 누구든 상관없다는 요청을 했다고 센터에 소문이 파다해요.”
나는 이를 악물었다. 보나 마나 이곤의 짓일 게 뻔했다.
만약 강우신이 안 되면 그 차후의 선택을, 차후의 가이드가 안 되면 또 그 차후를 만든답시고 여기저기 연락을 돌린 듯하다.
‘현재 양하나 헌터가 도움의 손길을 절실히 필요로 합니다’ 따위의 게시글을 무한정 올렸을 모습이 눈에 훤했다.
최악이었다.
생각만으로 머리가 지끈해 이마를 짚는데 희민은 무슨 대단한 결심을 했다는 듯 말했다.
“하나같이 가기 싫다고 하는데 제가 저희의 지난 추억을 생각해 온 거 아니겠습니까?”
지난 추억 같은 소리 하네.
지금 눈앞에 우신만 없었어도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드롭킥을 날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희민은 그런 내 마음을 조금도 짐작하지 못한 듯 눈동자를 굴려 우신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이렇게 대단한 손님이 먼저 와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희민의 눈이 가늘어졌다.
“두 분이 제 생각보다 훨씬 가까운 사이셨나 봅니다.”
우신은 희민이 들어왔는데도 형식적인 인사말 하나 건네지 않았다.
그저 앉은 자세 그대로 굳은 사람처럼 꼼짝없이 제 손끝만 바라봤다.
당당히 경고할 때는 언제고 모든 게 불편해 보였다.
희민은 바람 빠지는 웃음을 뱉어 내고는 다시 문손잡이에 손을 얹었다.
“오늘은 먼저 와 계신 분이 있으니 눈치껏 빠져 드리…….”
“아니, 그쪽이 해요.”
내 말에 동상처럼 앉아 있던 우신이 놀란 듯 고개를 들었다. 나는 그에게 속삭이듯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런 상태로는 가이딩하기 힘들잖아요.”
우신은 평소 모습 그대로였다. 그러니까 이건 어디까지나 내 직감이었다.
그가 울 거 같다는 것도, 이곳에서 벗어나고 싶어 한다는 것도.
나는 이 상황에 마침표를 찍듯 희미하게 웃으며 말을 맺었다.
“강우신 가이드, 마음은 고맙지만 사양하겠습니다. 오늘은 박희민 가이드가 있으니까요.”
우신은 아무 말 없이 나를 바라보다 들고 온 재킷을 챙겨 일어났다.
그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병실을 빠져나갔다.
덕분에 문 앞에 서 있던 희민은 과일 바구니를 들고 잽싸게 비켜 줘야 했다.
“…….”
희민은 문밖으로 고개만 빼꼼 내밀어 멀어지는 우신의 뒷모습을 보고서야 병실 안쪽으로 쪼르르 들어왔다.
나는 베개에 등을 기대며 눈을 감았다.
“그쪽도 그냥 가요.”
내 말에 희민은 흘리듯 중얼거렸다.
“세상에 욕심도 많아라. 상급 가이드를 둘이나 부르시고…….”
누가 봐도 우신을 걸고넘어지려는 심산이 가득한 말이었다.
나는 살짝 눈을 뜨고 그를 바라보다 후, 하고 숨을 골랐다.
“몸 상태 별로니까 그냥 가시죠.”
“그러면 더더욱 제가 있어야죠. 에스퍼는 가이딩을 받아야 괜찮아집니다. 이런 것도 하나하나 알려 줘야 해요?”
그를 째려보자 희민은 건방지게 웃어 보였다.
“센터에 제출한 보고서 보니까 그나마 저랑 했던 가이딩이 근소한 차이긴 하지만 괜찮은 편이었다던데.”
매칭 테스트의 결괏값과 실제 가이딩 만족도에는 차이가 있는 편이다.
그래서 센터는 가이딩 이후 짤막하게 에스퍼가 만족도를 기록하게 하는 시스템을 구축해 최적의 페어를 찾을 수 있도록 했다.
확실히 박희민과의 가이딩 이후에 대충 한 줄 평을 적어 제출했었다.
설마 희민이 그 기록을 확인할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지만 말이다.
“박희민 가이드는 한글 모릅니까? 근소. 정말 얼마 되지도 않는 차이라는 뜻이잖습니까.”
“그래도 차이는 차이 아니겠습니까?”
그는 자, 라는 말과 함께 제 양손을 건넸다. 나는 미간을 확 좁혔다.
왜 매번 양손을 잡는 해괴한 방식을 취하는지. 가이딩 방법도 성격만큼이나 이상하다.
“어어, 이러면 곤란해요. 가이드로서 에스퍼를 폭주로부터 지킬 의무가 있습니다.”
의무라고 이야기했지만, 오히려 신나 보였다.
희민은 미동도 없는 내 모습에 무언가 고민하더니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런 소문이 나면 재미있겠네요. S급 강우신도 가이딩 못 하는 상대가 있다.”
“……그게 무슨 헛소립니까. 방금 가이딩하지 않고 나가는 거 봤잖아요.”
내 물음에 희민은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그거야 제가 한참 늦게 왔으니 모르죠. 팩트는 강우신 가이드가 방문한 이후에 저 박희민이 이 병실에 들어왔다는 거죠.”
이 근래 일이 많아 잊고 있었다.
눈앞에 앉아 있는 이게 완전 눈 돌아간 놈이라는 걸.
나는 우신을 보낸 걸 마음 깊이 후회했다. 정확히는 우신만 보낸 걸 후회했다.
두 사람이 손잡고 나가도록 해야 했는데.
희민은 이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제 턱을 매만지며 말을 이었다.
“명색이 센터 간판 가이드인데 면이 많이 상하겠다, 그렇죠? 기사라도 나는 날에는 위로 불려 가서 깨지는 꼴을 볼 수 있을지도.”
“…….”
이 약아빠진 놈은 이제 내가 어디서 꼬리를 내리는지 알고 있었다.
결국 별수 없이 똥 씹은 얼굴로 한 손을 내밀었다.
희민은 진작 그러지, 라며 내 손을 덥석 잡았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제 에너지를 흘렸다.
수도를 튼 것처럼 대량의 에너지가 내 몸 안으로 쏟아졌다.
두 번째다 보니 처음보다는 괜찮았지만 이 짓을 가만히 참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하아.”
“…….”
가이딩 시 효율이 높으면 주체가 안 될 만큼 기분이 좋아지기도 한다.
그러나 가이드에게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건 드물고 쾌감은 대부분 에스퍼의 몫이었다.
덕분에 가이드는 사무적으로 여러 에스퍼를 담당해 가이딩하는 반면, 에스퍼가 한 가이드에게 꽂혀 안달 내는 경우는 자주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이 자식은 가이딩 시작과 동시에 미간을 찌푸리더니 안절부절못했다.
그러더니 슬금슬금 내 손목으로 손을 올리기 시작했다.
나는 하, 하고 헛웃음을 내뱉고는 그의 손목을 움켜잡았다.
희민이 놀란 얼굴로 나를 올려다봤다.
“……뭡니까. 이제 시작인데.”
나는 방긋 웃어 보이며 손에 더욱 힘을 실었다.
“박희민 가이드님, 그냥 가이딩이나 똑바로 하세요. 아무리 몸 상태가 꽝이어도 이쑤시개처럼 얇은 손목 하나 못 부러트리겠습니까.”
내 말에 희민은 제 손목을 슬쩍 내려다봤다.
그러고는 정말 부러지는 상상이라도 했는지 숨을 참아 가며 조용히 가이딩을 했다.
나는 그제야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 * *
박희민의 가이딩을 받고 짧은 재활을 끝내니, 일주일 만에 퇴원할 수 있었다.
곧바로 센터로 돌아가려 했지만, 이미 홍 반장의 권한으로 한 달의 병가를 받은 후였다.
제 부서 에스퍼를 아끼는 인심 좋은 담당자인 척했지만 그 속이 훤했다.
그날 제1 훈련장에서 본인들이 원하는 결과를 얻었기에 나를 독 안에 든 쥐 정도로 여기는 것이었다.
확인했으니 급할 것 없다는 뜻이었다.
서서히 사람을 피 말리며 원하는 걸 갈취하는 민지민의 뻔한 수였다.
그렇다 한들 조급해할 건 없었다.
무슨 이유로 그런 수까지 써 가며 정신 감응을 확인하려 드는 건진 모르겠지만, 내가 양하나의 몸에서 사라지면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갈 거였다.
그러니까 나는 원래의 계획대로 1군으로 들어가 원하는 정보를 얻으면 될 뿐 변한 건 없었다.
* * *
내가 센터로 돌아온 건 정확히 한 달 만이었다.
예상대로 나를 괴롭히던 놈들에게 제1 훈련장의 일이 퍼진 듯했다.
무슨 짓을 한 거냐며 시끄럽게 굴까 봐 걱정했는데, 괴롭힘은커녕 오히려 나를 피하는 눈치였다.
뭐, 장난감 취급하던 C급에게 당했으니 애써 안 보이는 척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유가 뭐가 됐든 귀찮은 놈들이 사라진 건 뜻밖의 수확이었다.
“내가 저번에 말한 거.”
이곤은 센터 복귀를 축하한다며 냅다 나를 사내 게시판 앞으로 데리고 왔다.
그와 나란히 서서 게시판을 바라보니 커다란 공지가 눈에 띄었다.
“승급 심사?”
내 혼잣말에 이곤은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조금 달라. 일정 포인트를 얻어 승급하는 심사와 달리 이건 한 번의 테스트만으로도 승급할 수 있는 비정기적 이벤트야.”
나는 옆에서 쫑알거리는 이곤의 말에 귀를 닫고 천천히 공지 글을 읽어 내려갔다.
일명 ‘게이트 돔’.
이곤의 말을 빌리자면 작년에 처음으로 도입된 이벤트성 심사라고 한다.
심사는 가짜 게이트인 ‘돔’에서 진행되며 에스퍼와 가이드는 일곱 명이 한 팀을 이루어 돔에 들어서게 된다.
나는 이걸 보자마자 꽤나 획기적인 기획이라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