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죽음이 당신에게 미치는 영향 (22)화 (22/183)

내 죽음이 당신에게 미치는 영향

22화

호각 소리와 함께 에스퍼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아무런 제약도 주어지지 않자 당연하게도 각자 자신 있어 하는 능력을 꺼내 보였다.

순식간에 땅이 솟아나며 실내에 비가 내렸다.

대충 내빼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잘못 맞았다가는 게임에서 아웃되는 걸로 끝나지 않을 거 같았다.

그 사실을 알자마자 나는 죽기 살기로 뛰었다.

A급 에스퍼들과 끈 뺏기라니.

죽기 싫으면 정신 감응이든 뭐든 능력을 사용하라는 뜻이었다.

6년이나 흘렀는데도 애가 철이 들기는커녕 더 못되진 거 같아 한탄스러웠다.

그러나 한숨을 쉴 여유도 없었다.

솟아오르는 땅을 피해 달리는 내 발 바로 뒤로 번개가 내리꽂혔다.

위를 올려다보니 평소 식당에서 나를 괴롭히던 에스퍼 중 하나가 보였다.

그는 잘 걸렸다는 듯 한쪽 입꼬리를 올리고 있었다.

“……재수도 없지.”

차라리 홍 반장과 갔던 B급 게이트 쪽이 훨씬 안전했던 거 같다.

한 가지 다행인 점이 있다면 내가 이들의 얼굴뿐 아니라 능력과 작년 평가서 내용까지 모조리 외웠다는 거다.

그 점을 잘만 활용한다면, 민지민의 눈을 피해 몰래 정신 감응을 시도해 볼 기회가 생길지도 몰랐다.

나는 여유 만만한 표정으로 온몸에 번개를 두른 에스퍼에게서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상대가 번개를 쏘는 타이밍에 맞춰 배리어를 만드는 감각계 에스퍼 뒤에 숨었다.

그런 행동 패턴을 반복하자 가랑잎에 불붙듯 에스퍼끼리 싸움이 나기 시작했다.

“너 지금 일부러 이러는 거지?”

번번이 배리어에 제 공격이 막히자 화가 난 듯 상대가 본격적으로 번개를 쏘아 보냈다.

강한 상대에게 제힘을 시험해 보고 싶은 건 어느 에스퍼건 똑같았다.

나는 양하나의 능력인 텔레파시를 통해 어떤 놈끼리 붙여 놔야 긁어 부스럼이 생기는지만 파악하면 됐다.

생각보다 놈들이 단순해서 어렵지 않게 일을 마무리할 수 있을 거 같았다.

점점 바닥에 나가떨어지는 놈들이 늘어났다.

이쯤에서 나도 팔뚝에 묶어 둔 끈을 슬쩍 풀고 저놈들 사이에 함께 널브러지면 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에너지 볼이 내 옆을 스쳤다.

뺨에 실금 같은 상처가 생기며 피가 고이기 시작했다.

놀란 눈으로 뒤를 돌아보자 이곳에서 유일한 S급 에스퍼가 보였다.

입사한 지 3년도 안 된 신입이었다.

“장난은 이쯤에서 그만둘까.”

그는 예전의 내가 그랬듯 에너지를 손끝에 모아 발사하는 공격 방식을 가지고 있는 듯했다.

무슨 생각으로 이러는 건지 속을 들여다보려 해도 등급 차이가 너무 많이 났다.

그리고 무엇보다 마음의 벽이 너무 단단했다.

그 역시 내 조잡한 수가 제게 안 통한다는 걸 알고 있는지 천천히 손을 뻗었다.

그리고 계속해서 총을 쏘듯 에너지 볼을 쏴 대며 나를 중앙으로 몰아세웠다.

“…….”

속을 알 수 없는 에스퍼의 공격이 위협적인 것은 사실이지만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었다.

이렇게 빠르고 강력한데도 눈에 뻔히 보이는 공격만 했다.

무엇보다 그는 나를 맞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내 추측이 맞는지 시험해 보기 위해 예상 가능한 공격을 능숙하게 피하며 입을 열었다.

“장난은 네가 하고 있는 거 같은데.”

그렇게 말하는 순간, 대놓고 나를 비껴간 공격이 쿵 하는 소리를 내며 어딘가에 부딪쳤다.

그 소리에 놀라 공격이 향한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

그의 공격은 정확히 대기실 유리, 그것도 우신이 서 있는 얼굴 부위에서 폭파했다.

나는 사색이 돼 S급 에스퍼를 돌아봤다. 그가 씩 웃어 보였다.

그의 웃음으로 확신할 수 있었다.

실수가 아니었다. 그는 어째서인지 우신을 노리고 있었다.

그 이후로도 내가 공격을 피하면 당연하다는 듯 대기실 유리로, 정확히는 우신을 노렸다.

노골적인 공격인데도 지민은 아무런 경고도 주지 않았다.

아무리 특수 유리라 해도 S급 에스퍼의 반복되는 공격을 버티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기 무섭게 유리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나는 초조한 눈으로 그쪽을 힐끔 바라봤다. 그때 S급 에스퍼가 내게 말했다.

“이번에는 진짜야.”

그는 아예 대놓고 우신 쪽으로 에너지를 모았다.

진심으로 우신을 공격할 생각인지 그의 눈동자가 노랗게 변했다.

모두의 이목이 내 선택에 집중되는 것만 같았다.

왜인지 항상 우신과 있으면 둘 중에 하나는 버려야 하는 선택의 순간이 찾아오곤 했다.

“모르긴 몰라도 현 상황만 보면 강우신 가이드에게 성시현 에스퍼는 좋게 쳐줘도 배신자 정도가 아닐까.”

재수 없게 이런 순간에 이곤의 말이 떠올랐다.

그 말을 들은 이후 우신이 정말 이곤의 말처럼 나를 원망하고 있을까 항상 궁금했다.

“…….”

이번에는 내가 어떤 선택을 해야 네가 다치지 않을까, 어떤 게 올바른 선택일까.

정답을 알 수 없는 문제에 구역질이 나올 거 같았다.

나는 뒤를 돌아봤다. 무슨 이유 때문인지 우신은 꿈쩍도 안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얼굴을 보자 고민이 무색하게도 단번에 답을 알 수 있었다.

이기적이게도 나는 내 앞에서 더 이상 누군가 죽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아마 다시 6년 전으로 돌아간다 해도 전과 같은 선택을 하지 않을까.

나는 필사적으로 우신 쪽으로 뛰기 시작했다.

동시에 S급 에스퍼는 커다란 에너지 볼을 날렸다.

나는 우신의 앞에 도착하기 무섭게 아까 A급 에스퍼가 사용한 배리어를 우신 쪽으로 날렸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에스퍼가 날린 에너지 볼은 우신이 아닌 내게로 날아왔다.

나는 가드를 올렸지만, 에너지 볼을 맞고 그대로 튕겨 나가 벽에 부딪혀 쓰러졌다.

* * *

우신은 이런 자리가 불편하기만 했다.

에스퍼가 아닌 사람은 알 수 없는, 에스퍼들만의 영역이란 게 있을 것이다.

그렇다 한들 A급 에스퍼가 C급 에스퍼와 힘을 겨루는 건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웠다.

“…….”

그래서 양하나가 훈련장을 필사적으로 뛰어다니는 모습이 계속 눈에 거슬렸다.

우신은 홍 반장과 지민의 뒤에 자리 잡았다.

벽에 기대선 채 최대한 모른 척하려고 했다.

일이 끝나면 곧바로 돌아가겠다고, 그렇게 결심했다.

그런데 양하나의 상태가 어딘가 이상했다.

양하나는 계속 엄한 벽을 힐끗거리며 좀처럼 싸움에 집중하지 못했다.

그러고는 이내 벽을 향해 냅다 뛰더니 제 몸은 무방비하게 내버려 둔 채 벽을 배리어로 감쌌다.

결과는 당연하게도 끔찍했다.

양하나는 에너지 볼을 직격으로 맞아 벽에 부딪힌 후 맥없이 쓰러졌다.

그 모습에 우신은 저도 모르게 팔짱을 풀고 놀란 듯 창 가까이 다가갔다.

“…….”

에스퍼의 싸움은 정말이지 언제 봐도 끔찍했다.

홍 반장은 양하나가 쓰러졌다는 사실보다도 그녀가 쓰러지기 직전 배리어를 사용했다는 사실에 흥분하며 제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저거 보셨습니까? 제 말이 맞죠. 지금 저 능력 저거 다른 에스퍼의 에너지 아닙니까!”

홍 반장의 말에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던 지민이 나직하게 답했다.

“……그렇네요. 정말이었어요.”

그 말과 함께 지민은 손을 올려 제 입가를 가렸다.

필사적으로 뛰어가는 와중에도 미흡하지만, 상대의 에너지와 스킬을 제 것처럼 운용했다.

정신 감응이라 생각되기 어려울 만큼 자연스러운 움직임이었다.

지민은 소문의 실체를 확인하자, 발끝에서부터 전율이 올랐다. 저절로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게 좀처럼 숨겨지지 않아 입가를 가린 거였다.

때마침 지민의 뒤편에 서 있던 우신이 벌컥 문을 열고 나갔다.

홍 반장과 지민의 시선이 그를 좇았다. 홍 반장이 슬쩍 지민의 눈치를 보다 물었다.

“……따라가 볼까요?”

훈련장으로 들어선 우신은 제 눈을 의심했다.

양하나가 정신 팔려 있던 벽에는 대기실에서는 보이지 않던, 통유리로 된 창문이 하나 있었다.

그리고 그 유리 너머에는 강우신, 바로 자신이 서 있었다.

우신이 창백한 얼굴로 그 형상을 지켜보고 있자 뒤따라온 지민이 말을 붙였다.

“어때요, 똑같죠?”

지민이 손가락을 튕기자 형상이 사라지며 평범한 벽이 나타났다.

“얼마든지 제가 보여 주고자 하는 걸 보여 줄 수 있죠.”

“……그딴 설명 하지 않아도 잘 알고 있어.”

우신은 이를 아득 갈며 지민을 돌아봤다.

“네 그 더러운 수는 여러 번 봐 왔으니까.”

“…….”

어그러진 우신의 표정에 지민은 반가운 걸 봤다는 듯 웃었다.

“양하나 헌터랑 사이 안 좋은 거 아니었나? 이럴 땐 감사하다고 해야지, 우신아.”

일부러 속을 긁기 위해 하는 말인 걸 알면서도 우신은 좀처럼 들끓는 마음을 진정시키기 어려웠다.

“누가 너한테 그딴 거 도와 달라 했어, 이 새끼야.”

금방이라도 터질 거 같은 분위기에 눈치를 보던 홍 반장이 우신을 진정시켰다.

“아이고, 진정들 하시죠. 보는 눈도 많은데.”

홍 반장 마음도 모르고 지민은 우신에게 더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고는 더 해 보라는 듯 우신을 자극했다.

“우리 우신이, 화난 얼굴 오랜만이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