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죽음이 당신에게 미치는 영향
21화
“당신…….”
내가 입술을 아득 물자 지민이 웃었다.
“한참을 찾았습니다.”
그는 내 표정이 보이지 않는지 아니면 안중에도 없는 건지 말간 웃음을 지으며 자기 하고 싶은 말만 떠들어 댔다.
한동안 코빼기도 안 비칠 줄 알았는데 뜻밖이었다.
내가 삐딱한 얼굴을 하자 지민은 정중한 투를 연기했다.
“잠시 시간 괜찮을까요.”
나는 심드렁하게 답했다.
“저한테 선택권이 있긴 한 겁니까.”
“하하, 눈치도 빠르셔라.”
“…….”
마음 같아서는 내빼고 싶지만 그랬다가는 여기서 난동을 피울 거 같았다.
나는 우신을 힐끗 살폈다.
“……그래서 무슨 일이죠.”
꼬리를 만 내 모습이 만족스러운지 그는 씩 웃으며 답했다.
“그건 자리를 옮겨 말씀드리죠.”
“…….”
나는 느릿느릿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로 가면 되죠.”
내 대답에 지민은 앞장서 걸었다.
우신을 지나쳐 걷던 그는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섰다.
그리고 우신을 바라보며 마치 잊고 있었다는 듯 입을 열었다.
“아, 두 분 다 따라와 주세요.”
* * *
지민의 안내를 받아 향한 곳은 간부 회의실이었다.
그의 뒤를 따라 걸으면서도 자꾸만 내 뒤를 따라오고 있는 우신이 신경 쓰였다.
기분 탓인지는 몰라도 지민의 등장이 달갑지 않은 건 나뿐만이 아닌 거 같았다.
지민의 제안에 우신은 별 대답 없이 따라나서긴 했으나 묘하게 낯빛이 어두웠다.
“도착했습니다.”
지민은 그 말과 함께 복도 가장 끝에 있던 문을 열었다.
둥그런 탁상이 중앙에 놓인 회의실에는 홍 반장과 다른 부서 담당자들이 앉아 있었다.
내가 들어서자 홍 반장은 반가운 사람을 본 듯 환한 얼굴로 달려왔다.
“요즘 왜 이렇게 얼굴 보기가 어려워.”
“…….”
사근사근 말을 붙여 오는 홍 반장의 모습에 저절로 표정이 구겨졌다.
약이라도 먹은 건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내가 아무런 대답도 없자 홍 반장은 지민의 눈치를 봤다.
지민은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홍 반장님이 계속 양하나 헌터님을 직접 만나 뵙고 싶다고 해서 어쩔 수 없이 모시게 됐습니다.”
“……저를요?”
“네, 그때 면담실에서는 아니라고 말씀하셨지만 홍 반장님이 자꾸 확실하다 그러셔서요. 혹시 두 분 사이에 오고 가지 못한 말이 있지 않을까…….”
나는 지민의 말을 자르고 단호하게 답했다.
“그때 감시관에게 말한 게 전부입니다.”
내 대답에 지민은 팔짱을 끼더니 제 아랫입술을 매만졌다.
무언가 골똘히 고민하는 척하더니 불현듯 이렇게 말했다.
“그럼 양하나 헌터님은 지금 홍 반장님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말인가요?”
지민다운 화법이었다.
지민은 대화를 리드하는 척하며 결국 나와 홍 반장을 싸우게 만들 의도였다.
여기서 그렇다고 답하면 놀아나는 꼴밖에 안 되겠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나는 홍 반장을 쓱 쳐다봤다.
그는 난생처음 보는 간절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게 참으로 우스웠다.
나는 얼굴색 하나 바꾸지 않고 답했다.
“네. 아무래도 홍 반장님이 꿈을 꾼 거 같네요.”
내 단호한 대답에 홍 반장의 낯빛이 사색이 됐다.
그는 윗입술을 떨더니 제 말을 증명이라도 하겠다는 듯 내 손목을 덥석 잡았다.
“너 그때 분명 이렇게 했잖아!”
그러면서 내 손을 제 얼굴로 가져다 댔다.
“또 해 보라니까, 자!”
아무런 미동도 하지 않고 그를 빤히 바라보다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글쎄요. 저는 정말 무슨 말씀하시는지 모르겠네요.”
내 모르쇠에 홍 반장은 이를 아득 갈았다.
“이 여우 같은 게 여기가 어디라고 뻔뻔하게 거짓말이야!”
그는 습관처럼 내 뺨을 후려치려는 듯 손을 올렸다.
이미 예감한 일이기에 그를 바라보던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그는 내 시선에 움찔하다 그제야 주변이 보였는지 손을 내렸다.
분위기가 이전보다 더 험악해졌다. 지민은 손뼉을 치며 웃어 보였다.
“싸우지들 말아요. 이러자고 모인 게 아닌데 분위기가 영 별로네.”
지민은 깔깔 웃더니 회의실 테이블에 걸터앉았다.
그러고는 제법 웃음기가 사라진 얼굴로 내게 되물었다.
“마지막으로 물을게요. 양하나 헌터.”
“…….”
“홍 반장에게 했던 행동, 그거 정말 정신 감응이 아니었나요?”
나는 주저 없이 답했다.
“네.”
“흐음, 그래요? 그럼 게임 하나 해 보는 거 어때요, 우리?”
“……게임이요?”
“네.”
그럼 그렇지. 아무 준비도 안 했을 리 없을 거 같더라니.
무슨 게임일지는 몰라도 분명 내게 불리할 게 뻔했다.
하지만 거절한다고 저 뱀 같은 놈이 포기할까? 이렇게 번번이 나를 찾아내서 곤란하게 하겠지.
갈수록 더 집요하게 괴롭힐 것이다.
적어도 내가 아는 민지민은 한 번 꽂힌 일에 물러서는 법이 없었다.
수심에 찬 내 얼굴에 지민이 밝게 웃었다.
“어려운 거 아니니까 너무 지레 겁먹지 말아요. 양하나 헌터가 이기면 그쪽 말을 믿고 더 이상 찾아가지 않을 테니.”
정확히 내가 바라는 걸 내세웠다.
양날의 검 같은 제안이었지만 어차피 거절한다 한들 또다시 이런 식으로 찾아올 게 뻔했다.
무슨 게임을 제안할지 몰라도 이기면 좋은 거고 불리해지면 대충 장단 맞추다 픽 쓰러지면 될 뿐이었다.
나는 결심이 선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좋습니다.”
지민은 그제야 만족스럽다는 듯 웃어 보였다.
그리고 어디론가 전화를 걸려는데, 문 쪽 벽에 기대서 있던 우신이 입을 열었다.
“세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나랑은 별로 관계없는 거 아닌가.”
지민은 그제야 우신을 쳐다보더니 잊고 있었다는 티를 내며 답했다.
“맞아요. 하지만 동기 좋다는 게 뭡니까. 우신 씨가 도와주셨으면 하는 게 있어서요. 부탁 좀 할게요.”
“관심 없으니까, 너희끼리…….”
“상부에서도 관심 있게 지켜보고 있습니다.”
회의실을 나서려던 우신의 발걸음이 멈췄다. 그리고 지민을 돌아보는데 상당히 화가 나 있는 듯했다.
검은 눈동자가 분노에 휩싸인 게 뻔히 보이는데도 우신은 화를 삼킬 뿐 말없이 도로 벽에 기대어 섰다.
우신과 지민 사이를 가로지르는 분위기는 확실히 6년 전과 달랐다.
그게 뭔지는 몰라도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 * *
‘능구렁이 같은 자식.’
나는 나도 모르게 그렇게 생각했다.
평범한 걸 제안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생각보다 더 최악이었다.
지민은 곧장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더니 우리를 데리고 지하에 있는 제1 훈련장으로 향했다.
제1 훈련장은 보통 S급 또는 물리계 에스퍼들의 공격을 받아 내기 위해 지하에 설비된 훈련장이었다.
나 역시 어려서는 혼자 그곳을 방문해 훈련에 집중하고는 했었다.
물론 양하나의 몸으로 다시 오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나는 훈련장 안으로 안내를 받았다.
홍 반장과 지민 그리고 우신은 대기실로 들어갔다. 대기실은 한쪽 벽이 특수 유리로 되어 있어 훈련장 내부를 볼 수 있었다.
지민은 신난 듯 잔뜩 상기된 얼굴로 마이크를 잡았다.
-여기서 하도록 할까요?
동물원 우리 속 원숭이를 보듯 날 바라보는 꼴이 눈에 거슬렸다.
나는 주변을 둘러봤다. 아무도 없는 텅 빈 공간에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혼자 재주라도 부리라는 겁니까?”
내 물음에 지민이 즐겁다는 듯 웃었다.
-그것도 재미있을 것 같지만 오늘은 초대한 게스트가 있으니 그쪽이랑 놀아 봐요.
지민의 말과 동시에 문이 열리며 몸집이 큰 남정네들이 우르르 들어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평범한 에스퍼들인가 싶었는데 천천히 내 쪽으로 다가오는 열댓 명의 에스퍼들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표정을 굳혔다.
익숙한 얼굴들이었다.
평소 양하나를 눈에 띄게 괴롭히던 2군의 A급 에스퍼들이었다.
게다가 마지막에 들어온 남자는 S급 에스퍼였다.
정신 감응이고 뭐고, 양하나는 C급 정신계 에스퍼다.
도대체 무슨 일을 시킬지 감도 오지 않았다.
행렬 가장 끝에서 들어온 양복 입은 남자가 모두에게 붉은 끈을 하나씩 나누어 주었다.
우리가 모두 그걸 받아 들자 지민이 말을 이었다.
-우리가 할 게임의 이름은 끈 뺏기입니다.
끈 뺏기? 나는 미간을 좁혔다.
수건돌리기처럼 복잡할 건 없어 보였다.
게임이랍시고 난감한 걸 들고 올 줄 알았더니 내가 그를 너무 야박하게 본 건가.
그런 생각을 하기 무섭게 지민은 한 마디 덧붙였다.
-마지막까지 그 끈을 들고 있는 단 한 사람만 이 방을 빠져나갈 수 있는 겁니다.
“뭐?”
-끈을 빼앗는 방법은 자유이며 끝까지 남아 있는 사람은 음…… 이번에 있을 승급 심사에서 유리한 점수를 얻을 수 있게 해 드리죠.
그럼 그렇지. 딱 지민이 생각할 만한 게임이었다.
게다가 지민이 한 말이 거슬렸다.
지민은 마치 제가 뭐라도 되는 것처럼 말했다.
이곤에게 듣자 하니, 다들 승급 심사에 목매는 분위기던데 아무리 S급 에스퍼라 해도 그런 게 가능할 리 없었다.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하며 주위를 둘러보는데 나를 뺀 모두가 지민의 말을 믿는 분위기였다.
그들은 각각 제 머리, 팔뚝, 발목 등에 붉은 끈을 묶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자꾸만 내 쪽을 힐끔거렸다.
최악이었다. 정말 여기서 이들과 싸우기라도 해야 한다는 뜻인가.
지민을 돌아봤지만, 지민은 주저 없이 말을 이었다.
-의무반과 S급 가이드 강우신 님도 대기 중이시니, 그럼 여러분, 마음껏 무리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