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죽음이 당신에게 미치는 영향
20화
어두운 회의실에 앉은 지민은 멀뚱히 스크린을 바라봤다.
스크린에 띄워져 있는 영상은 심문 중 촬영한 하나의 에너지 파동이었다.
“…….”
지민은 그것을 바라보며 말없이 커피를 마셨다.
에스퍼의 힘에 관해 연구하는 학자들은 하나같이 에스퍼의 에너지는 누군가에게서 빌려온 것이라고 말했다.
현재까지는 그 가설이 가장 힘을 얻고 있었다.
그 가설을 뒷받침하는 증거로 매번 등장하는 건 불안정한 에스퍼의 파동이었다.
에너지 운용을 아무리 훌륭하게 해 낸다 한들 에너지는 늘 에스퍼의 몸 안에 불안정하게 고여 있었다.
그래서 에너지 운용이 에스퍼에게 중요한 것이었다.
불안정한 에너지의 파동.
그 사실만은 등급과 계열이 어떻든지 모든 에스퍼에게 공평했다.
그러니까 지금 지민이 보고 있는 이 영상은 어딘가 잘못된 게 확실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양하나의 검푸른 빛을 띠는 에너지의 파동이 이렇게 고요할 리 없었다.
지나칠 정도로 말이다.
지민은 커피를 마시며 밀려오는 파도처럼 검푸른 에너지를 바라봤다.
“덕분에 체면 구겼네요.”
지민의 맞은편에 앉아 있던 최강혁 감시관이 직설적으로 입을 열었다.
그의 말에 홍 반장은 안절부절못했다. 그는 눈치를 보며 소심하게 말했다.
“하지만 분명 보았습니다. 제가 양하나 걔를 한두 번 보는 것도 아니고. 저를 깔아뭉개고 손으로 이마를 짓누르는데 그때 사람 눈깔이 아니었다니까요.”
홍 반장은 그날 있었던 일을 회상하며 몸을 옅게 떨기까지 했다.
최강혁은 홍 반장의 태도가 눈에 보이지 않는지 무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은퇴하실 때가 된 거 아닙니까. C급 에스퍼한테 기가 다 눌리고.”
빈정거리는 투에 홍 반장은 얼굴이 붉어졌다.
다른 에스퍼도 아니고 정신계에 성적도 낮은 C급 에스퍼에게 에너지가 모두 빨렸다고 말하니 누구도 믿지 않는 눈치였다.
감시관은 홍 반장의 말을 면이 상한 사람의 자기변호쯤으로 여겼다.
그러나 게이트를 클리어 한 사람이 누구인지 확신할 수 없으니 이곳에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홍 반장은 기절했고, 다른 B, C등급의 에스퍼는 모두 중상을 입었다.
유일하게 몸에 작은 상처 하나 입지 않은 사람이 양하나였다.
팔다리가 부러지고 골절된 에스퍼들과는 달리 양하나는 눈에 보이는 외상이 없었다.
오히려 능력을 과하게 사용한 에스퍼처럼 몸 안이 엉망이었다.
어느 모로 보나 양하나 혼자 B급 게이트를 클리어 했다고밖에 설명되지 않으니 C급인 그녀가 재각성했다고 의심했다.
“그런데 보다시피 몇 번을 재검해도 C등급만 나오더군요.”
감시관은 혀를 차고는 일어났다.
“차라리 몬스터들끼리 싸우다 자멸했다는 게 신빙성 있겠습니다.”
홍 반장이 옷을 챙기는 감시관을 따라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조용히 그래프만 보던 지민이 입을 열었다.
“저희끼리 다투어 무얼 하겠습니까.”
지민의 말에 감시관이 행동을 멈추고 돌아봤다.
“……다른 생각이라도 있는 겁니까.”
그의 물음에 지민도 감시관을 돌아보며 씩 웃어 보였다.
“네, 아주 재미있는 생각이 하나 났는데. 들어 보시겠어요?”
* * *
재각성 심사까지 끝내고 나서야 소란스러웠던 분위기가 잠잠해진 듯했다.
하긴 그럴 수밖에 없었다.
외국에서 거액을 써 가며 들여온 기계로 몇 번이고 검사한 결괏값이 저들이 기대한 것과 다르니 지금 꽤 속이 쓰릴 것이다.
나는 요가 매트 위에서 몸을 길게 늘어트리며 스트레칭했다.
검사 직전까지 나 역시 조마조마했기에 어떻게 C등급이 나왔는지는 모른다.
단지 내게 다행스러운 일인 건 분명했다.
적어도 당분간은 주변이 조용할 테니, 그것만으로도 상당히 마음이 안정됐다.
하지만 완전히 마음 놓기는 일렀다.
지민이 도대체 어디서 냄새를 맡고 온 건지는 몰라도 그의 성격상 쉽사리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가 또다시 나서기 전에 나도 뭔가 수를 만들어 놔야 했다.
“그러려면 역시 이 힘부터 똑바로 다룰 줄 알아야 할 텐데.”
홍 반장의 에너지를 흡수한 손바닥을 내려다봤다.
솔직히 한 번에 성공할 줄은 몰랐다.
그 순간에는 그 방법밖에 없어 본능적으로 행동한 것뿐이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불행이라고 해야 할지.”
정신 감응은 만능이 아니었다.
사용하면 굉장한 정신력이 소모되며 체력이 받쳐 주지 않으면 흘러들어 온 타인의 에너지가 시전자의 몸을 터트릴 수도 있었다.
그러니까 홍 반장과의 정신 감응을 단번에 성공한 건 정말 천운이 따른 결과일지도 몰랐다.
다시 생각하니 아직도 온몸이 저릿저릿한 것 같았다.
나는 운동을 끝내고 몸을 일으켰다.
아직 피로가 쌓여 있어 가벼운 운동만 하고 돌아갈 생각이었는데 막상 옷을 갈아입으니 숙소로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성시현일 때도 집, 게이트, 집, 게이트였는데 어쩜 지금도 사정이 같네.”
그런 생각이 드니 반항심이 생겼다.
혼자 외식이라도 할까 고민하다가 문득 잊고 있던 곳이 생각났다.
“그러고 보니…… 거기, 그대로이려나.”
* * *
게이트와 숙소를 오고 가는 생활을 쳇바퀴 돌리듯 반복하던 내가 유일하게 좋아하는 장소가 한 곳 있다.
뷰가 근사한 건 아니지만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구사옥 뒷마당에 자리해 항상 조용한 편이었다.
센터의 외관이 그대로인 걸 보면 아마 거기도 여전할 듯했다.
관리인마저 손을 뗀 곳이라 잡초가 무성할 거 같긴 하지만 오랜만에 그곳에 가면 마음이 좀 안정될 거 같았다.
나는 구사옥을 지나쳐 뒷길로 접어들었다.
뒷길에서부터는 명확한 인도 구분 없이 풀을 헤치고 줄지어 선 은행나무를 따라 발걸음을 옮겨야 했다.
한 십 분 정도를 쭉 따라 들어가면 무성하게 자란 나무 사이로 생뚱맞게 벤치 하나가 놓여 있다.
나는 6년 전 그때와 같은, 여전한 풍경에 환하게 웃었다.
가을이면 노란 은행에 둘러싸여 온 세상이 금빛으로 보이는, 나름 명당이었다.
나는 벤치에 한 걸음 다가섰다.
“여기만은 그대로일 줄 알았지.”
기분 좋은 웃음을 숨기지 못하고 자리에 앉아 주변을 둘러봤다.
그런데 우려했던 바와 달리 잡초 하나 없이 벤치 주변이 깨끗했다.
마치 누가 관리라도 하고 있던 것처럼 말이다.
그 사실을 이상하게 여기던 그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거기 누굽니까.”
목소리만으로 목덜미가 서늘해졌다.
이런 감각을 주는 사람은 내가 알기로 한 사람밖에 없었다.
나는 주저 없이 뒤를 돌아봤고 내가 걸어온 길 한가운데 우신이 서 있었다.
“…….”
“…….”
단번에 상대의 정체를 알아채고 돌아보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막상 얼굴을 마주하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건 우신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그는 일순 놀란 눈을 하더니 순식간에 무감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마지막에 좋게 손 흔들며 헤어진 게 아니다 보니 인사를 할 수도 없었다.
나는 눈을 굴리다 침묵 끝에 먼저 입을 열었다.
“여긴…… 어쩐 일입니까.”
고민 끝에 고작 뱉은 말이 그런 거였다. 의도치 않았지만 시비조였다.
질문 같지도 않은 질문을 하다니, 자괴감에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런데 우신은 그 질문에 쉽게 답하지 못하고 어물쩍거렸다.
그게 이상해 빤히 쳐다보자 그는 내 시선을 피하며 툭 내뱉듯 답했다.
“……산책 중이었습니다.”
거짓말인 게 뻔했다. 누가 구사옥 뒷마당으로 산책을 온단 말인가.
거짓말 못 하는 건 예나 지금이나 같았다.
“저희가 나란히 앉아 있을 사이도 아니고, 먼저 실례하죠.”
내가 의심스러운 눈치로 쳐다보자 그는 민망한지 뒤돌아섰다.
어떻게 다시 만났는데 이렇게 아무것도 말해 보지 못하고 보내자니 마음이 초조해졌다.
나는 서둘러 그를 잡으려 입을 열었다.
“저……!”
그런데 내 말이 채 이어지기도 전에 그의 걸음이 멈췄다.
덩달아 나도 목구멍까지 올라왔던 말을 삼켰다.
잠시 고민하던 우신이 뒤를 돌아봤다. 무슨 할 말이 있는 눈치였다.
내가 멀뚱히 기다려 주자 그가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재각성 검사를 했다고 하던데, 맞습니까?”
그 질문에 머릿속의 꺼져 있던 전구가 하나 켜진 기분이었다.
우신 역시 재각성 후 인생이 뒤바뀌었다. 그 사실이 머릿속에서 선명하게 떠올랐다.
“…….”
C등급이 떴다고, 별거 아니었다고 대답해야 하는데 말이 안 나왔다.
왠지 사실대로 말하면 또 주저 없이 돌아설 거 같았다.
뒷모습은 이제 그만 보고 싶었다.
“……네, 맞습니다.”
“결과 나왔습니까?”
그의 진중한 물음에 나는 천천히 고개를 옆으로 저었다.
“아니요…… 아직.”
“그렇습니까?”
내 대답에 우신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눈에 띄게 심각해지는 얼굴에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못 할 짓을 한 기분이었다.
“그게…….”
내 말을 정정하기 위해 급히 운을 떼는데 그 순간 우신과 내 사이로 무언가 쿵, 하고 떨어지며 모래바람이 일었다.
흙먼지 탓에 형상이 정확히 보이지 않았다.
다만 그게 하늘에서부터 무식하게 떨어지는 바람에 나뭇가지가 엉망으로 부러졌다.
나는 모래바람 때문에 기침하며 신경질적으로 앞을 살폈다.
먼지가 걷히며 사람의 인영이 보였다.
“이런 곳에 계셨군요.”
연극적으로 걸어 나오는 남자는 내가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