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죽음이 당신에게 미치는 영향
19화
무서운 인상의 우신과는 달리 지민은 화사한 금발 머리에 항상 보조개가 들어간 사람 좋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
두 사람 다 미남이긴 했으나 그 극명한 온도 차이에 의도치 않게 비교되곤 했다.
하지만 머지않아 지민이 매력적인 외모에 비해 천성이 지독하리만큼 잔혹하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내가 그를 기억하고 있는 것도 ‘그 일’ 탓이었다.
민지민은 저보다 2년 일찍 입사한 A급 에스퍼와 식사를 하던 중, 그가 쩝쩝댔다는 이유로 그의 얼굴을 곤죽으로 만들었다.
덕분에 A급 에스퍼는 병원 신세를 지게 됐는데도 지민은 유능하다는 이유로 벌금형을 받으며 일이 마무리됐다.
허울뿐이지만 내가 리더로 있던 공격 1팀에서 일어난 사건이었기에 그 일로 감사실을 몇 번 들락거려야 했다.
내가 아무 말 없이 그를 노려보자 지민은 싱긋 웃으며 마이크를 통해 말을 이었다.
-숨길 거 없어요. 보고서를 받자마자 알았거든요. 정신 감응이라고. 제가 정신계에 특히 관심이 좀 많아서요.
“…….”
-그런데 이게 안다고 다 되는 게 아니잖아요? 타인의 에너지를 내 에너지처럼 받아들여야 하니까. 에너지 운용력은 당연하고 몸 안의 그릇도 크지 않으면 힘들 텐데.
그는 다른 손에 쥐고 있는 파일을 훑었다.
-작년 인사 평가 자료만 봐도 에너지 운용 능력이 거의 막 각성한 에스퍼와 다름없었는데, 어떻게 고작 오 개월 만에…… 그동안 힘이라도 숨기고 있던 걸까요?
지민은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쳐다봤다.
-그게 아니면 설명이 안 되거든요. 다른 사람이 몸 안에 들어온 것도 아니고.
입술이 마르는 게 느껴졌다.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있는데도 웃는 얼굴 뒤로 살기가 등등한 게 느껴졌다.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태연한 척 입을 열었다.
“글쎄요. 재능이 있었던 거로 하죠.”
내 말에 지민은 다시 해맑게 웃더니 ‘역시 그렇겠죠?’ 하고 답했다.
내가 한고비를 넘긴 사람처럼 낮은 한숨을 내쉬자 앞에 있던 감시관이 끼어들었다.
“장난은 이쯤에서 끝내고 검사실로 자리를 옮기죠.”
“검사실이요?”
“네. 진술이 어떻든 저희는 게이트에서 벌어진 일을 우연으로 보지 않고, 양하나 헌터님의 재각성 가능성을 열어 두고 있습니다.”
* * *
‘왜 이 생각을 못 했을까.’
나는 검사 복장으로 갈아입으며 내 머리를 쥐어박았다.
에스퍼의 에너지를 지문이라 부르는 이유는 간단했다.
에스퍼의 에너지에는 변치 않는 고유의 색과 파동이 있었다.
그건 무슨 수를 써도 변치 않았다.
그럼 과연 에스퍼의 에너지는 사람의 육체에 깃드는 걸까, 영혼에 깃드는 걸까.
전자라면 아무 문제 없겠지만 후자라면 지금부터 할 재각성 검사가 굉장히 위험했다.
내가 빙의한 이후 알게 모르게 양하나의 몸에 영향을 주고 있었다.
가장 큰 예가 이전까지만 해도 가이딩에 문제없던 몸이 내가 빙의한 이후 가이딩 효율이 낮아졌다는 거다.
그것뿐이면 다행일 테지만, 만약 검사에서 양하나가 아닌 색과 에너지가 검출되기라도 했다가는 일이 복잡해진다.
나는 옷을 다 갈아입고도 생각에 잠겨 좀처럼 탈의실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그때 문밖에서 재촉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직 머셨습니까?”
“나, 나갈게요.”
발만 동동거리다 결국 문을 열고 나갔다.
문 앞에는 안내원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도움을 받아 복도를 따라 걸었다.
복도 끝에 있는 문을 열자 흰 페인트로 칠해진 하얀 방이 나왔다.
그 중앙에 알 모양의 기계가 있었고, 알에서부터 뻗어 나온 호스가 모이는 벽면은 전부 유리로 되어 있었다.
유리창 너머로 지민과 검사관을 포함해 여러 사람이 보였다.
흰 가운을 입고 있는 사람은 연구원인 거 같았는데 그 사이사이에 카메라를 든 사람이 보였다.
척 봐도 센터 관계자 같지 않았다.
알 모양의 기계의 입구가 열리며 안내원이 기계 안으로 나를 안내했다.
나는 멈춰 서 유리창 너머를 바라봤다. 그 모습에 감시관이 허리를 숙여 마이크에 대고 말을 이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다른 게 아니라 외부인이 있는 거 같은데…….”
내가 말을 줄이자 감시관은 지민과 눈을 마주쳤다.
지민이 어깨를 으쓱이자 그는 한숨을 푹 내쉬더니 다시 마이크를 잡았다.
-신경 쓰지 마십쇼. 재각성자일 경우 칼럼을 쓰고 싶다는 센터 소속 기자입니다.
거짓말이 서툰 사람이었다.
하지만 결과가 나오기도 전부터 기자라니.
특종 냄새만 맡고 다니는 그들은 확실한 증거가 없다면 잘 움직이지 않는다.
“…….”
뭔가 찜찜했다. 정확히 꼭 집어 말할 수는 없었지만, 감시관이고 지민이고 분명 무슨 냄새를 맡은 거 같았다.
내가 쉽게 수긍하지 못하고 서 있자 그가 마저 말을 이었다.
-시간 끌수록 의심만 살 겁니다.
감시관의 날 선 눈빛에 나는 별수 없이 기계 안으로 들어갔다.
* * *
검사실의 문을 열고 나오자 이곤이 서 있었다. 나는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뭐야, 여기 왜 서 있어?”
내 물음에 이곤은 당연하다는 듯 답했다.
“걱정되니까.”
자연스럽게 건네는 멘트가 낯간지러웠다.
면담부터 시작해 검사까지 장장 일곱 시간이 넘게 붙잡혀 있었는데, 도대체 언제 끝날 줄 알고 기다린 건지. 미련한 놈이었다.
이곤은 그런 내 생각도 모르고 순진한 얼굴로 미소 지었다.
물론 내가 아닌 양하나를 위한 일인 건 알고 있었다.
그 때문인지 묘한 죄책감이 생겼다.
나는 아무 말도 못 하고 앞장서 걸었다.
“……밥은 먹었니.”
어색한 기류에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거 같아 그렇게 묻는데 이곤은 아무런 답이 없었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내 뒤를 졸졸 따라오던 이곤은 무슨 할 말이라도 있는지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안절부절못하며 말하길 주저하고 있었다.
일곱 시간을 시달리고 나온 터라 나 역시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래서 피곤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할 말이 있는 거면 그냥 말할래?”
짜증 섞인 목소리에 이곤은 민망한 표정으로 서둘러 입을 열었다.
“그게 말이야. 나한테 할 말 있지 않아?”
“할 말?”
모르겠다는 얼굴로 되묻자 이곤은 곤란하다는 듯 손톱을 깨물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눈치 보지 않고 곧잘 하는 줄 알았는데. 답지 않은 행동에 눈살이 찌푸려졌다.
그런데 그 순간 불현듯 그가 묻고 싶은 게 뭔지 알 수 있었다.
“너…… 내가 재각성 검사할 줄 알았구나.”
내 말이 정곡을 찔렀는지 이곤은 눈을 피했다.
“글쎄?”
“모른 척하려면 아니라고 부정해야지 글쎄는 또 뭐야.”
내가 그를 한심하게 쳐다보자 이곤이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사실 A급 에스퍼들이 모여 있는 커뮤니티에 한 게시물이 올라왔었거든.”
“게시물?”
내 물음에 이곤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센터 2군 소속 C급 에스퍼가 S급 에스퍼로 재각성한 거 같다는 내용이었어.”
“…….”
“처음에는 당연히 심심한 놈들이 지어낸 헛소리라 생각했는데 게이트 아웃 하는 모습을 몰래 찍었다면서 올라온 사진이 흐릿하긴 하지만…… 너인 거 같아서.”
감시관이나 지민의 태도, 그리고 카메라를 들고 방문한 기자까지.
뭔가 아귀가 딱딱 맞는 기분이었다.
이곤은 왜인지 내게 미안해했다.
“네가 나한테 거짓말할 일 없겠지만, 너 요즘 이상했잖아. 기억도 듬성듬성 안 난다고 하고.”
“…….”
이곤은 진심으로 걱정하는 얼굴이었다.
커뮤니티 덕에 감시관보다 빨리 내 숙소 앞에 도착할 수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날 나와 함께 게이트에 들어갔던 에스퍼들은 모두 중환자실로 옮겨졌다.
불행 중 다행으로 목숨을 잃은 이는 없었지만, 이틀 만에 깨어나 가볍게 입을 놀릴 사람 역시 없었다.
그럴 사람이 있다면 딱 한 명.
가장 피해를 적게 본 홍 반장이었다.
내 표정이 어두워지자 이곤은 그 이유가 저한테 있다고 생각하는 건지 이마를 긁적이며 눈치를 봤다.
“너한테 확인 먼저 해야 했는데, 미안하다.”
그답지 않은 진중한 사과에 가만히 있던 나는 손을 저어 보였다.
“네가 왜 사과해. 게시글 쓴 게 너도 아닌데.”
다만 A급 에스퍼 커뮤니티에 소문이 퍼진 거라면 양하나를 못 괴롭혀 안달인 놈들에게 재미있는 정보가 흘러간 셈이었다.
센터에서 그들을 마주칠 생각을 하니 벌써 피곤해졌다.
“정말 괜찮아?”
이곤이 반신반의하며 물었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리고 그 소문은 신경 안 써도 돼.”
내 확신에 찬 말에 이곤은 궁금하다는 듯 눈을 빛냈고, 나는 호주머니에 넣어 둔 종이를 꺼내 보여 줬다.
“설명하는 것보다는 이걸 보여 주는 게 빠를 거 같네.”
이곤은 조심스럽게 종이를 받아 펴 보았다.
“검사 결과가 벌써 나왔…….”
이곤이 놀란 듯 나를 쳐다봤다. 나는 당연한 일이라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내가 말했지, 아무 일 없다고.”
검사표에는 재각성 등급 검사 결과로 커다랗게 C등급이 적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