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죽음이 당신에게 미치는 영향
11화
기왕 도망 다니기로 한 거 어디 한번 하나가 지쳐 나가떨어질 때까지 도망가 보기로 했다.
첫날 게이트 아웃 이후 몸 쓸 일이 없어 몰랐는데, 뛰기 시작하니 새삼 몸이 엉망인 게 느껴졌다.
찢기고 멍든 피부가 아렸다.
간헐적으로 받은 가이딩은 도리어 한 모금 마신 물처럼 더 큰 갈증을 불러왔다.
뛰면 뛸수록 몸이 아래로 가라앉는 기분이 들었다. 정말이지 짐 같은 몸이었다.
얼마나 뛰었을까, 힐끗 뒤를 돌아보자 무슨 가이드 체력이 저렇게 좋은지 희민이 바짝 따라붙고 있었다.
온 신경을 뒤에 쏟은 채, 복도 끝에 다다르자마자 왼쪽으로 몸을 꺾었다.
그 순간 커다란 벽에 부딪힌 듯 단단한 무언가에 부딪혀 몸이 뒤로 넘어졌다.
다리가 풀릴 참이었는데 타이밍 한번 뭐 같았다.
엉덩방아를 세게 찧자 윽, 하고 신음이 새어 나왔다. 몸이 유리처럼 깨질 거 같았다.
바로 등 뒤까지 따라붙은 희민은 넘어진 나를 보고는 밝은 얼굴이 됐다.
“양하나 헌터님, 괜찮…….”
희민은 말끝을 흐렸다.
멸시를 줘도 웃을 거 같은 얼굴이 삽시간에 삭막해졌다. 못 볼 거라도 본 얼굴이었다.
그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더니 검은 구두코가 보였다.
긴 다리를 따라 시선을 올리자, 웬 남자가 서 있었다.
서늘할 정도로 차가운 눈을 한 남자는 나를 지긋한 시선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눈매가 깊고 선이 굵은 미남이었으나 얼굴에 아무 표정이 없었다.
그을린 듯 어두운 피부와 새카만 머리칼까지.
그를 이루는 모든 것이 말 붙이기 어려운 위압감을 조성했다.
나는 저런 무감한 표정을 한 남자를 알지 못했다.
그런데 자꾸 나만 보면 방긋방긋 웃던 남자의 이름이 입 밖으로 쏟아질 거 같았다.
그러니까 내가 찾던…….
“강우신 가이드님.”
그래, 강우신 말이다.
나는 그제야 희민을 돌아봤다.
왜 이 남자를 보고 그 이름을 부르냐는 의문이 담긴 시선을 하자 희민은 눈을 한 번 깜빡이는 것으로 내 의구심을 잠재웠다.
나는 도로 그를 돌아봤다.
몰라볼 뻔했다.
6년이나 지났으니 앳된 얼굴이 사라졌을 거라고는 생각했는데, 그 정도가 아니었다.
어쩐지 키도 크고 몸도 더 다부져진 느낌이었다.
무엇보다 웃는 표정을 지우자, 정말 모르는 사람을 보는 기분이었다.
우신은 내게서 시선을 거두고 입을 열었다.
“박희민 가이드님 맞습니까.”
울림이 단단한 목소리였다.
우신의 물음에 희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두 달 전에 인사드리고 오랜만에 뵙습니다……. 다음 주에 복귀하신다고 들었는데.”
희민이 말을 줄이자, 우신은 고저 없는 목소리로 답했다.
“서울에 급한 용무가 생겨서요.”
“아…….”
“그것보다…… 무슨 일이죠.”
우신은 내 쪽으로는 시선도 주지 않고 그렇게 물었다.
희민은 그제야 상황을 파악하고는 수습하려는 듯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제가 여기 헌터님께 볼일이 있어서요. 무슨 볼일이 있냐면 그게, 이 헌터님은 정신계 에스퍼로…….”
그간 보인 허세는 온데간데없이 희민은 당황한 듯 구구절절 말을 늘어놓았다.
나는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필요 없는 설명을 잘라 내기 위해 입을 여는데, 뜻밖의 말이 들려왔다.
“알고 있습니다. 양하나 헌터님이시죠.”
“…….”
그 말에 두 눈을 휘둥그레 뜬 채 우신을 올려다봤다.
나를 호명하면서도 여전히 날 쳐다보고 있지는 않았다.
강우신과 양하나가 알고 있는 사이라고?
머리가 혼잡해지는데 희민은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인지 표정이 환해졌다.
“네, 양하나 헌터님 가이딩에 문제가 있어서요. 저번 달까지만 해도 C급 가이드와도 문제가 없었는데…….”
희민은 내 쪽을 힐끔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지금은 어쩐지 1차 진입조차 까다로워져서요.”
“아, 그런가요.”
우신은 무심하게 답하며 나와 부딪힌 탓에 구겨진 옷을 손으로 털어 냈다.
관심 없다는 듯 무료한 얼굴이었다.
B급 가이드나 박희민의 입을 통해 강우신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괜한 소리를 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원래도 키가 크고 눈꼬리가 올라가 있으니 사람들이 오해하는 거라고.
그런데 직접 만나 본 우신은 정말 내가 알던 사람이 맞는지 의심이 될 정도로 변해 있었다.
6년 만에 사람이 이렇게 180도 바뀔 수 있는 건가.
“1차 진입뿐 아니라 에너지의 그릇 역시 S급 에스퍼분들 못지않게…… 아!”
말을 잇던 희민은 재밌는 생각이 났는지, 나를 힐끗 쳐다보며 씩 웃었다.
불길한 기분이 들었다.
저 또라이 같은 놈이 어디로 튈지 몰랐다.
그리고 예상대로 희민은 어처구니없는 소리를 뱉었다.
“시간 괜찮으시다면 가이드님이 한 번 봐 주시는 건 어떻습니까.”
우신은 눈 한 번 껌뻑이지 않았다.
희민은 그게 긍정의 신호라도 된다고 생각하는지 신나서 말을 이었다.
“마침 양하나 헌터님이 가이드님을 찾고 있는 거 같더라고요. 가이드님이라면 문제가 뭔지 바로 알 수 있을 거 같고요.”
나는 사색이 돼서 입을 열었다.
“아니, 저는 괜찮…….”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우신의 뒤에 서 있던 관계자가 작게 말을 이었다.
“서두르셔야 합니다.”
우신은 그의 말에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제안은 감사하지만 일이 바빠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우신은 희민에게 그렇게 말하고는 바닥에 앉아 있는 나를 지나쳤다.
끝맺지 못한 말을 입에 머금고 가만히 그 뒷모습을 바라봤다.
“…….”
육 년 동안 강우신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나는 알 길이 없다.
오히려 내가 그 게이트에서 빠져나와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고 강우신에게 물어봐야 할 상황이니까.
그래도 말이다. 모르긴 몰라도 이거 하나는 말할 수 있었다.
나를 내려다보던 그의 눈빛에는 노골적인 적대감이 서려 있었다.
마치 따돌림당하는 양하나를 가만히 보고만 있던 이들처럼 말이다.
아까까지만 해도 몸이 유리잔처럼 깨질 거 같았는데, 어디서 난 힘인지 우신에게 들릴 만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자신 없으신가 봐요.”
우신의 걸음이 우뚝 멈췄다.
그에게 도움을 받아야 하는 처지에 이건 별로 좋지 않은 방법일지도 몰랐다.
그럼에도 확인하고 싶었다. 내가 알고 있는 우신이 맞는지 말이다.
뭐가 너를 그렇게 비딱하게 만든 건지는 몰라도 직속 선배로서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나는 바지를 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신 역시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봤다.
나는 빙그레 웃으며 말을 이었다.
“명성과 달리 도망가는 뒤꽁무니가 더 잘 어울리시네요. 위험 지역만 일부러 피해 다니신다는 게 영 헛소문만은 아닌가 봅니다?”
내 말에 미동 없던 우신의 아랫입술이 일순간 움찔하는 게 보였다.
담담한 얼굴을 하더니 도발에 걸려드는 건 여전했다.
“……재밌네요.”
우신은 내내 미동도 없던 입꼬리를 올리며 옅게 웃어 보였다.
그러고는 시계를 확인하더니 내 쪽으로 몸을 돌렸다.
어느새 우신은 내 코앞에 섰다.
6년 사이 우신의 키가 큰 탓도 있겠지만, 양하나의 체구가 아담하여 고개를 쳐들고 그를 올려다봐야 했다.
우신은 나를 빤히 내려다봤다.
내가 고개를 든 채 눈을 피하지 않자 그는 뭐가 재미있는지 한 번 더 픽 웃었다.
그리고 허리를 숙여 내게만 들릴 만큼 작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나랑은 혀가 잘려도 말 섞지 않겠다고 하지 않았나요?”
“…….”
이건 또 무슨 말이야.
뜻밖의 이야기에 내 눈빛이 작게 흔들렸다.
우신은 상관없다는 듯이 허리를 바로 세우고는 말을 이었다.
“무슨 바람이 분 건지는 모르겠지만…… 저도 갑자기 궁금하네요.”
우신은 한쪽 손목의 단추를 풀고는 소매를 걷었다.
“양하나 헌터님은 가이딩받을 때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가이드님!”
그 모습에 관리자가 만류하지만 이미 우신이 내게 손을 뻗은 후였다.
한순간이었다.
내 목덜미로 뻗어 오는 손, 굳게 다물어진 입술, 나를 내려다보는 흔들림 없는 시선까지.
우신의 작은 움직임 하나하나가 선명하게 보였다.
나는 그것에 압도된 듯 움직일 수 없었다.
가깝게 다가올수록 그의 온기가 내게로 넘어오는 거 같았다. 잊고 있던 청명한 감각이 말이다.
일순 정신이 아득해지는데, 우신의 손목에 채워져 있는 전자시계가 사이렌 소리를 내며 울렸다.
내 오른뺨을 감싸 쥐기 직전이었다.
삐리리리리-
시끄럽게 울리는 사이렌 소리에 복도가 침묵에 잠겼다.
누구 하나 쉬이 입을 열지 못할 때, 내 뺨 근처까지 다가왔던 우신의 손이 되돌아갔다.
그는 연락을 확인하고는 관리자를 돌아봤다.
관리자는 나직하지만 단호하게 말했다.
“서두르셔야 합니다.”
그 말에 우신은 언제 그랬냐는 듯 무감한 얼굴로 돌아왔다.
그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다시 가던 길로 나아갔다.
나는 선 자리에서 가만히 서서 멀어져 가는 우신을 바라봤다.
그가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될 때쯤 희민은 긴장이 풀린 듯 긴 한숨을 내쉬었다.
“후, 언제 봐도 붙임성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사람이네.”
“…….”
내가 아무런 반응 없이 우신이 사라진 자리만 멀뚱히 바라보고 있자 희민의 시선이 내게로 향했다.
“이제 안 도망가시는 건가요?”
나는 눈도 마주치지 않고 되물었다.
“지금 와서 의미가 있습니까?”
희민은 뭐가 재미있는지 대답 대신 웃음을 삼켰다.
그리고 팔짱을 끼고는 한 걸음 가깝게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