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죽음이 당신에게 미치는 영향
5화
나는 우신에게 뻗은 손바닥에 힘을 집중해 그를 게이트 밖으로 날렸다.
우신이 무어라 소리쳤지만, 빠른 속도로 멀어져 가는 목소리는 내 귓가에 닿지 않았다.
그가 내 쪽으로 팔을 뻗는 모습을 끝으로 나는 눈을 감았다.
죽는 순간이 찾아오면 지난 시간이 주마등처럼 스친다고들 하는데, 내 삶은 열두 살에 각성한 그 순간에 끝난 듯, 그 이후는 일은 기억나는 게 없었다.
하긴 14년을 매일 게이트만 들락날락하며 재미없게 살아왔으니.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다만 우신이 절절히 매달리던 그 순간만은 아주 긴 장면처럼 슬로 모션으로 보였다.
아무렇지 않을 줄 알았는데, 묘한 죄책감이 일었다.
절절하게 우는 모습이 오랫동안 눈에 남았다.
그걸 끝으로 순식간에 모든 게 검게 물들었다.
아무것도 남지 않은, 조금은 허무하고 외로운 안식이 찾아왔다.
그렇게 난 죽었다.
2. 빙의자와의 이해관계
손가락 하나 꿈적할 수 없었다.
죽은 거다. 이렇게 외롭고 허무하게 말이다.
S급 에스퍼라고 칭송받더니 참으로 별거 없는 죽음이다.
하긴, 폭주하기 일보 직전이었으니 게이트 밖으로 나가 현장을 쑥대밭으로 만드는 것보다야 이편이 공익을 위한 영웅적인 선택이었을 거다.
인간 성시현은 몰라도, S급 에스퍼 성시현에게는 퍽 괜찮은 죽음이리라.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하며 후회 없이 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래, 분명 그렇게 마음을 다잡았는데…….
나는 무거운 눈꺼풀을 몇 번이고 껌뻑였다.
“뭐냐.”
분명 죽었는데, 아니, 죽었어야 했는데 어째선지 멀쩡히 눈이 떠졌다.
익숙한 암석 지대의 천장이 보였다.
나는 단단하고 차가운 바위 위에 대자로 쓰러져 있었다.
게이트가 닫히며 동굴도 완전히 무너졌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불행 중 다행으로 안전지대가 있던 건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미간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이게 불행인지 다행인지 분간이 잘 되지 않았다.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센터로 돌아가 이상 게이트 출현과 몬스터 돌발 행동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해야겠다는 것이었다.
그것을 생각하니 눈앞이 깜깜해졌다.
나는 눈을 꽉 감았다 다시 떴다.
보고서 처리를 핑계로 상부에 일주일 넘게 불려 다닐 바에야 차라리 맘 편하게 여기서 죽는 편이 나을지도 몰랐다.
“꿈이어라. 차라리 꿈이어라.”
나는 대자로 누운 채 마른세수를 했다.
너무 강하면 원할 때 죽을 수도 없는 건가.
당연히 죽을 거라고 여겼기에 앞날에 대한 고민은 한 톨도 하지 않았는데, 이렇게 살고 보니 문제가 많았다.
보고서 제출에 기자 회견까지. 또 신문 헤드라인에 어떤 어이없는 말이 적힐지 벌써 머리가 아팠다.
정말이지 오늘 내가 한 선택은 하나같이 다 꽝이었다.
어이없는 상황에 맥락 없는 생각을 이어 가고 있는데, 멀리서 사람의 인영이 보였다.
나는 내 눈을 의심해 눈을 비비고 다시 그곳을 바라봤다.
그러자 그 형태가 더 또렷이 보였다.
정확히 누구인지는 몰라도 왼팔에 노란 완장을 차고 있는 게 후발대의 담당자인 듯했다.
나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게이트를 클리어했으니 모두 빠져나가라고 그렇게 소리를 질렀건만, 왜 아직도 사람이 남아 있는 거지?
게다가 그 사람도 나를 발견했는지 멀리서부터 내게로 걸어오고 있었다.
그걸 보고 상체를 일으켰다.
다리가 엉망이지만, 게이트를 못 빠져나간 사람이 있다면 살아 있는 한 도와야 했다.
그렇게 생각하는데 내 다리가 멀쩡했다.
분명 발목이 돌아가 움직이기 어려운 상태였는데 말이다.
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폭주 직전이었던 것치고는 상태가 괜찮았지만, 여전히 몸이 무겁고 여기저기가 욱신거렸다.
그렇게 몸 여기저기를 살피는데, 때마침 남자가 코앞까지 다가왔다.
나는 그를 발견하고 먼저 입을 열었다.
“이봐, 내가 분명 퇴각 사이렌을 보냈는데 왜 아직 여기에…….”
짝-
쏘아붙이듯 말을 잇는데, 남자가 주저 없이 내 뺨을 갈겼다.
솥뚜껑처럼 두꺼운 남자의 손에 내 얼굴이 힘없이 돌아갔다.
원래 입술이 찢어져 있었는지 남자의 손찌검에 상처가 벌어져 피가 흘렀다.
나는 황당한 얼굴로 그를 다시 돌아봤다.
“이게 무슨…….”
“내가 분명히 말했지. 나서지 말라고!”
남자가 냅다 소리를 질렀다.
내 뺨을 얼마나 강하게 후려쳤는지 남자의 손바닥이 시뻘게져 있었다.
무엇보다 나를 경멸하듯 내려다보는 얼굴이 가관이었다.
“누구 물 먹이고 싶어 환장한 것도 아니고, 게이트 안에서 뭐 하는 짓이야.”
나는 그의 말뜻을 도통 알아들을 수 없었다.
아무런 대꾸 없이 서 있자, 남자는 이런 반응이 익숙하다는 듯 검지로 내 이마를 툭툭 밀치며 말을 이었다.
“네가 어디서 뒈지든 상관은 없다만, 내가 담당일 때는 눈치껏 행동하는 게 좋을 거야.”
“…….”
“C급 에스퍼면 C급답게 찌그러져 있으라고, 양하나.”
양하나?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눈앞의 남자가 어째서 그 이름으로 날 호명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혼란스러움에 이마를 짚는데, 문득 등허리가 허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손으로 머리칼을 빗자 금발 대신 시커먼 흑발이 어깨에서 딱 떨어졌다.
나는 그제야 무언가 단단히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C급, C급 거리는 남자의 말이 헛말은 아닌지 좀처럼 능력이 나오지 않았다.
항상 주체 못 할 힘을 몸 안에 담아 둬야 했기에 체력 소모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는데, 지금은 몸이 무거운 데 비해 안이 텅 비어 있는 기분이었다.
순간 멀리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제 보니 게이트 안에 있는 건 나와 이 남자뿐만이 아니었다.
남자가 걸어온 곳에서부터 철수 준비를 하듯 장비를 챙겨 든 헌터들이 보였다.
그들은 이쪽을 힐끗거렸고 개중에는 조소하는 이들도 있었다.
머릿수가 꽤 됐지만, 누구 하나 남자를 말리거나 이 일에 간섭하려는 이가 없었다.
오히려 이런 상황을 즐기는 듯했다.
하지만 지금 나에게 그런 사실은 중요치 않았다.
그저 이렇게나 주변에 사람이 많은데 인기척을 제대로 느끼지도 못했다는 사실이 더 충격적이었다.
이런 무신경한 몸은 도대체 누구의 것이냔 말이다.
사색이 된 얼굴로 남자를 올려다보자, 그는 이제야 상황 파악이 됐냐며 코웃음 쳤다.
나는 혼란스러움에 힘없이 흘러내린 앞머리를 쓸어 올리며 입을 열었다.
“이게 뭐야……. 이제는 하다 하다 죽는 것 하나도 내 마음대로 안 되는 거냐고…… X발.”
욕지거리를 혼잣말처럼 웅얼거리자, 남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뭐? 뭔 발? 이게 드디어 미쳤나.”
남자는 열 받은 듯 다시 오른손을 쳐들었다.
그 손이 당장 내게 날아올 걸 알고 있지만, 나는 도무지 피할 마음이 들지 않았다.
지금 이게 현실인지, 아니면 지옥이 이따위로 생겨 먹은 건지 구분이 안 갔다.
내가 싹싹 빌지도 겁먹지도 않고 가만히 서 있자, 그 모습이 도리어 남자를 자극했나 보다.
남자는 이를 악물고 손을 휘둘렀다.
그러나 처음보다 더 강한 힘을 실은 남자의 손은 내 얼굴과 한 뼘도 채 남지 않은 거리에서 멈췄다.
“……곤아.”
남자는 내 등 뒤의 누군가를 보더니 안색이 창백하게 질렸다.
“보는 눈이 많습니다, 홍 반장님.”
가볍고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본능적으로 누군가 생각나 뒤를 돌았지만 처음 보는 남자가 서 있었다.
그는 헌터인지 검은색 작업복을 입고 있었다.
가슴께에는 A급 에스퍼임을 알리는 노란 문양과 ‘이곤’이라는 이름이 수놓여 있었다.
그는 자연스럽게 내 어깨에 팔을 두르며 말을 이었다.
“아까 하나가 암석에 머리를 잘못 맞은 거 같더라고요.”
“아…… 안 그래도 제정신이 아닌 거 같아 보이더구나.”
내 앞에서는 실핏줄이 터져라 눈을 부라리던 남자가 이곤이라는 에스퍼 앞에서는 순한 똥개로 변해 버렸다.
어처구니가 없어 헛웃음마저 나왔다.
이곤은 남자의 이런 태도에 익숙해 보였다.
“아픈 팀원을 챙기는 것도 제 일이니 홍 반장님은 다른 일 보셔도 됩니다.”
이곤의 말에 남자는 헛기침을 몇 번 하더니 위엄 있는 척 말을 이었다.
“그래, 내가 오늘은 널 보고 이만 눈 감으마.”
그의 말에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아까부터 보자 보자 하니까 언제부터 센터가 이 모양 이 꼴로 돌아갔지.
도대체 누가 에스퍼 등급으로 사람을 차별하라고 가르쳤는지.
본부로 돌아가면 저 남자의 웃대가리부터 가만두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남자는 그런 내 생각도 모르고 불난 집에 부채질했다.
나를 위아래로 천천히 훑더니 입을 열었다.
“내가 이런 부류를 좀 아는데…… 이런 관종 새끼들은 주제 파악을 시켜 줄 필요하단 말이지.”
정말이지 살면서 처음 받아 보는 대우였다.
“지금 뭐라고…….”
한 소리 하려고 목소리를 높이는데, 내 어깨를 쥐고 있는 이곤이란 남자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럼 저희 먼저 센터로 복귀하겠습니다.”
이곤은 한발 빠르게 발랄한 얼굴로 내 말을 툭 잘랐다.
내가 그를 쳐다보자 이곤은 내게만 들릴 만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쯤 하는 게 좋을 거야. 너 한 번 더 경고를 받았다가는 한 달 정지로 안 끝날 테니까.”
나긋한 목소리로 말하지만 분명한 경고였다.
그가 말한 한 달 정지는 게이트 출입 제한을 뜻하는 듯했다.
헌터의 수는 항상 부족했기에 웬만하면 한 달 정지 처분을 받는 경우는 거의 없는데, 도대체 무슨 잘못을 해야 그걸로도 안 끝날 거란 말이 나오는 걸까.
이곤의 말에 의구심만 깊어 갔다.
나는 우선 이곤이라는 남자가 이끄는 대로 순순히 발을 옮겨 게이트를 빠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