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디에고가 그렇게 자신의 죄에 다른 변명을 가져다 대고 있을 때였다.
때마침 다른 드래곤들이 마구잡이로 인간들을 사냥하기 시작했다. 자기들은 정당한 이유라고 생각하겠지만 사실은 약자를 향한 강자의 이유 없는 혐오에 지나지 않았다.
드래곤들의 인간사냥을 유일하게 막아줄 리시안셔스가 눈을 떴을 때는 이미 낙원이 드래곤들이 뿜은 불길에 삼켜진 다음이었다.
한 줌의 의심도 없이 연인이 준 차를 마신 리시안셔스는 일어나자마자 급하게 본체로 돌아갔지만, 날개를 펼치기는커녕 겨우 어지러움을 가라앉히며 사태를 파악하기에 급급했다.
『안녕, 내 친구.』
처음 보는 회색 드래곤이 불길에 삼켜진 숲 한가운데에 있는 리시안셔스의 앞에 내려앉았다.
『너는 누구지?』
『나야, 네 친구.』
『내 친구? 혹시…….』
『그래. 나, 디에고야.』
『……디에고. 무슨 짓을 저지른 거야.』
이 모든 사태의 중심에 디에고가 있다는 것을 깨달은 리시안셔스가 이빨을 드러냈으나 이윽고 고통에 미간을 찌푸렸다. 세레티가 피를 내기 위해 칼을 가져다 댔던 부위가 벌어진 탓이었다.
『넌 늘 힘을 갈구하는 나를 어리석은 존재를 보듯이 바라봤지만, 사실 가장 어리석은 건 너야.』
어차피 오늘부로 리시안셔스와 세레티가 서로를 만나게 될 일은 없을 것이다.
자신이 그렇게 만들 거니까.
어차피 이렇게 된 거, 디에고는 가장 잔인한 거짓말을 꺼내기로 했다.
『세레티는 널 사랑한 적 없어.』
순진하게 제 뜻대로 움직여준 세레티 덕분에, 리시안셔스가 디에고의 거짓말을 믿을 이유는 충분했다.
『넌 나를 위해 세레티에게 이용당한 거라고.』
그날 화마에 휩싸인 숲 한가운데에서, 가장 위대한 드래곤은 가장 불완전했던 드래곤에게 고린도를 빼앗기는 수치와 모욕을 겪어야 했다. 하지만 리시안셔스가 내지른 포효는 고린도 때문이 아니었다.
어딘가에서 듣고 있을 제 연인을 향한 울부짖음이었다.
***
자신의 잘못으로 일어난 모든 재앙을 목격한 세레티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드래곤들은 신전까지 습격했고, 지상의 모든 존재들은 세레티에게 지금 일어나고 있는 상황에 대해서 알려주고 있었다. 덕분에 세레티는 리시안셔스가 무슨 일을 겪었는지도 알 수 있었다.
‘내가 속았어.’
아무리 속았다고 한들 가장 어리석은 선택을 내린 것은 다름 아닌 자신이기 때문에 그 누구도 탓할 수 없었다.
잘못을 저지르는 건 쉬운 일이나, 잘못을 되돌리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애초에 남이 시키는 대로 움직인 것이니, 혼자만의 힘으로 모든 일을 바로잡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내가 디에고를 돕지 않았어도…….’
자신이 리시안셔스를 잠재우지만 않았어도 인간 학살의 현장을 막을 수 있었을 것이고, 리시안셔스도 고린도를 잃지 않았을 것이다.
후회해봤자 때는 이미 늦었다.
세레티는 신의 정원으로 내려갔다. 그곳은 오로지 세레티만이 출입이 가능한 곳이었다. 아무리 드래곤이라 하더라도 신의 정원의 입구를 찾기는 어려울 테고, 찾는다 하더라도 신은 다른 존재의 출입을 절대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세레티가 그곳으로 향한 것은 혼자서만 살아남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제가… 큰 잘못을 저질렀어요…….”
아무리 기도해도 불길에 휩싸인 낙원에 오지 않는 신께 마지막으로 기도를 하기 위해서였다.
“아직 신께서 제 기도를 듣고 계시다면…….”
들어줄지, 들어주지 않을지 모르지만, 세레티는 신께 소원을 빌었다.
이것이 자신이 현재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인간들을 해친 드래곤들이 꼭 자신이 지은 죄를 똑같이 돌려받게 해 주세요.”
첫 번째 소원은 인간들을 학살한 드래곤들을 향한 저주였으며,
“리시안셔스를…. 아무것도 모르고 절 순수하게 사랑해 준 그 선한 드래곤을 구원해 주세요…….”
두 번째 소원은 자신으로 인해 불행해진 리시안셔스의 구원을 바란 기도였다.
세레티가 손바닥을 드러내 보이자, 나무뿌리가 아주 기다랗게 늘어졌다. 이윽고 뿌리줄기는 세레티의 목을 휘감았다.
자신의 죗값은 그 무엇으로도 치를 수 없다. 이렇게 목숨을 바쳐도 제 죗값을 다 치르지는 못하리라.
세레티의 가는 다리가 허공에서 버둥거렸다. 본능적인 생존 욕구에 의한 움직이었으나, 세레티는 진심으로 살고 싶지 않았다.
세레티는 아름다운 꽃줄기와 진한 꽃향기 속에서 서서히 의식을 잃어갔다. 그렇게 신이 가장 사랑하던 첫 번째 인간은, 신과 소통하던 신비로운 정원 속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로부터 신이 아끼던 첫 번째 인간의 소원을 들어준 것은 아주 먼 훗날의 일이었다.
드래곤들은 아무 일이 없던 것처럼 살아가고 있었다. 리시안셔스는 힘을 잃었고, 연인의 죽음에 무기력함에 빠져 그 무엇에도 반응하지 않았다. 신은 인간들의 학살은 처음부터 없었던 일인 것처럼 침묵했으니, 드래곤들이 두려워할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그들의 기억에서 그날의 일이 잊혀질 때쯤, 드디어 신이 오랫동안 침묵했던 입을 열었다.
너희는 아주 오랜 시간 죽음과 다름없는 잠에 빠져들 것이며, 다시 깨어날 때는 너희가 신이 될 수 있는 기회가 열릴 것이라고.
그러나 이는 속임수에 불과했다.
대다수는 자신이 한때는 재미 삼아 죽였던 인간을 사랑하게 되지만 연인을 잃는 고통을 겪게 되니까.
***
스위트피는 눈을 떴다. 모든 기억이 떠올랐다. 그리고 이 전쟁의 진실을 깨달았다. 드래곤들 중 그 누구도 기억하지 못했다.
자신과 연결된 반려가 아주 오래전 생에 그가 죽였던 하찮은 인간들 중 한 명이었다는 것을.
그들의 두 번째 죽음으로 드래곤은 인간을 죽였던 것에 대한 대가를 되로 돌려받게 된 것이다.
애초에 이런 전쟁이 일어나게 된 것은 전생의 자신이 신께 빌었던 소원 때문이었다. 그러니 이 전쟁을 끝낼 수 있는 것도 자신의 기도뿐이었다.
“이제 되었어요.”
신은 오래전에 지상을 완성시키고 손을 뗐다. 신이 아직도 지상과 연결하게 하는 것은 드래곤 전쟁이었다.
비록 지금 이 순간에도 응답하지 않는 신이었지만 세레티는 분명 그분이 듣고 있을 거라 확신했다.
“살아남은 드래곤은 아주 소수예요. 그들은 개체가 적어 더 이상 인간을 위협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드래곤들은 자신의 반려를 살리기 위해 다른 인간을 죽였다. 하지만 그들 중 진짜로 자신이 살고 싶거나 신이 되기 위해 그런 살육을 저지른 자들은 없었다.
타인의 반려를 죽이고, 자신의 반려가 죽임을 당하고.
그 모든 과정에서 드래곤들은 충분한 대가를 치렀다. 그들을 벌주기 위해 전생에 살해당한 인간들을 또 죽게 하는 건 잔인한 처사였다.
“이 전쟁을 멈춰 주세요…….”
세레티의 기도가 입 밖으로 나오고, 뜨겁던 대지의 열기가 식고 따스한 훈풍이 불어왔다.
말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느낄 수 있었다. 드래곤에게 신이 될 기회처럼 주어졌던 신의 저주는 이제 풀렸다는 것을. 그리고 이건 아마도 신전 안에 있는 다른 드래곤들도 느끼고 있을 것이다.
이제 남은 문제는 자신과 리시안셔스였다.
‘나는 리시안셔스에게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었어…….’
전생의 자신이 저지른 일이라 하더라도, 결국 그것도 자신이 한 일이었다.
‘어떡하지…….’
이대로 리시안셔스를 마주 볼 자신이 없었다.
‘신께서는 날 왜 되살리셨을까.’
리시안셔스를 구원해달라고 했었다. 그런데 어째서 리시안셔스를 괴롭게 만드는 거지?
내가 살아있으면 리시안을 괴롭게 할 뿐인데.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 수 있는 건, 아직 리시안셔스가 자신을 알아보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도망치고 싶어.’
지금 이 순간 스위트피는 전생의 자신이 너무나 이해가 되었다.
감당할 수 없는 죄를 짓고 죽음으로 도망쳐버릴 수밖에 없었던 그 마음이…….
스위트피가 손을 뻗자 전생에서 그랬듯이 이번에도 뿌리의 줄기가 길게 뻗어 어깨를 한 번 감싼 채 팔을 타고 내려와 펼쳐진 손바닥 위까지 올라왔다.
사실, 자신이 세레티의 환생이라는 건 진작에 알아챌 수 있는 문제였다.
그런데도 모든 과거를 보고 나서야 인정하게 된 건, 자기자신도 모르게 애써 진실을 외면해왔던 걸지도 모르겠다.
‘나는 세레티야.’
그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지금의 나는 스위트피야.’
현재는 세레티가 아니기도 했다.
자신이 전생에 저지른 모든 죄를 안 이상, 또다시 죽음으로 도망친다면 그건 너무나도 편한 일이겠지.
이미 죽어본 이상, 죽음이 마냥 두려운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까. 그저 편안하고 깊은 잠일 뿐이라는 것도.
아직도 도망가고 싶은 마음이 남아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도망치지 않을 것이다.
죽음은 너무 쉬운 일이다. 그건 속죄가 아니라 도망일 뿐이었다. 과거에는 용기 없는 세레티였지만 지금은 아니다. 스위트피는 자신의 오래된 죄를 마주 볼 용기가 있는 사람으로 자랐다.
‘리시안셔스가 날 영영 떠나더라도, 사실대로 말하자.’
생각을 마무리 지은 스위트피는 자신의 손짓에 길게 자란 나무 줄기를 원래대로 되돌려보내려고 했다.
그때였다.
“…….”
아주 뒤늦게야 자신의 그림자 위로 기다란 그림자가 겹쳐져 있다는 것을 깨달은 스위트피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자신의 어깨를 감싸고 있던 나무 줄기가 우지끈, 끊어졌다. 이 줄기를 끊은 건 다름 아닌 스위트피가 잘 아는 인물이었다. 그야 방금까지도 계속 떠올리고 있었던 인물이니 말이다.
“리, 리시…….”
너무 놀란 스위트피가 반사적으로 리시안셔스의 이름을 부르려 할 때였다.
“또 죽으려고?”
리시안셔스가 한 발 빠르게 먼저 입을 열었다. 그것도 자신의 머릿속을 새하얗게 만드는 말로.
“스위트피.”
“…….”
“아, 아니지.”
화가 난 걸까. 아니면 슬픈 걸까. 그도 아니면 둘 다일까.
“세레티.”
스위트피는 자신의 오래전, 이름을 부르는 리시안셔스를 차마 마주 볼 수 없어 그대로 눈을 감았다. 언제부터 진실을 깨달은 건진 모르겠지만, 중요한 건 결국 리시안셔스가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드래곤의 전쟁을 끝낸 지금, 그들에게는 새로운 과제가 생겼다. 함께 옛 과거를 회상하고, 엉킨 실타래를 푸는 일이었다. 그리고 이들의 이러한 새로운 문제는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외전에서 계속] @JV 공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