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드래곤은 개인주의가 강한 종족이었다. 하지만 엄밀히 신의 대리를 자처하는 만큼 그들이 회의할 수 있도록 모이는 장소가 정해져 있었다.
인간들은 그곳을 성역이라 부르며 절대 침범하지 않았다. 보통 드래곤들이 성역에 모이는 건 첫 번째 드래곤의 부름과 주도에 따라 이뤄지지만 오늘만큼은 예외였다.
오늘은, ‘첫 번째 드래곤’을 제외한 모든 드래곤들이 성역에 모였다.
『우리의 동족들이 첫 번째 동족의 손에 의해 목숨을 잃은 건 다 알고 있겠지.』
그들이 이곳에 모인 건 고작 인간 따위에게 홀딱 빠진 첫 번째 드래곤을 향한 반발심과 인간혐오 때문이었다.
『고작 인간 몇 마리를 해치웠다는 이유로!』
『부당한 죽음이었어!』
『철없는 어린 드래곤들이었다. 소문을 듣고 호기심에 신전에 잠입했다가 사고로 인간들을 죽인 거였어.』
『그런데도 리시안셔스는 그들이 어린 동족이라는 것을 참작하지 않고 무자비하게 사형을 집행했지.』
인간들의 신전은 드래곤이라 할지라도 함부로 침입할 수 없는 공간이었다. 그곳은 인간들이 신을 모시는 공간으로, 엄연히 신의 영역인 셈이었다. 또한, 사제들을 죽인 그 드래곤들의 행위에는 명백한 살의가 담겨 있었으나, 지금의 드래곤들은 그런 진실을 마주 보려 하지 않았다.
한낱 인간 때문에 위대한 드래곤이 죽은 사건에 관하여 조금이라도 타당한 이유를 주기 싫기 때문이었다.
『리시안셔스가 그런 부당한 판결을 내린 이유야 뻔하지 않겠어?』
『사실이라지? 리시안셔스가 인간과 사랑에 빠진 게.』
『판결을 내리고 사형을 집행할 때도 상당히 감정적이었지.』
『고작 인간과 사랑에 빠지다니.』
『드래곤의 수치다.』
『그 녀석은 우리의 수장이 될 자격이 없어.』
안 그래도 드래곤들은 위대한 자신들이 일개 인간과 세상을 수호하는 일에 매여 있는 것에 대한 불만이 나날이 커져 가던 중이었다.
낙원을 완성한 신의 손길은 지상의 다른 곳에 머물고 있었다. 즉, 이 낙원에서 가장 강한 존재는 드래곤 종족이라는 걸 의미하기도 했다. 본래 높은 지위와 특권이 오래되면 본분을 망각하기 마련이었다.
『우리같이 강한 존재들이 인간들의 수호자 역할을 할 필요는 없어.』
『리시안셔스는?』
『그 녀석의 말은 들을 필요 없어. 리시안셔스는 더 이상 우리의 수장이 아니다.』
그들은 낙원이 왜 낙원인지를 잊었다. 분열과 살육이 시작된다면 그곳은 더 이상 낙원이 될 수 없다는 것도.
***
한편, 아무것도 모르는 세레티는 옳지 못한 선택을 저지르고 있었다.
신의 정원에 유일하게 출입 가능한 세레티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꽃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고, 그것을 유용하게 다룰 줄 알았다. 단, 지금까지 이러한 지식을 사용할 일이 없었을 뿐.
모든 존재를 잠재울 수 있는 수면 효과를 가진 꽃을 우린 찻물을 만든 세레티는 그것을 들고 리시안셔스와 약속한 장소로 나갔다.
“리시안셔스, 선물이 있어요.”
이건 나와 리시안셔스를 위한 일이야.
우리 모두를 위한 일이야.
리시안셔스가, 에리카처럼 나를 싫어하게 만들 수는 없어.
“꽃잎을 우린 차야?”
“네, 몸이 좋아지는 효능이 있어요.”
“드래곤에게 몸이 좋아지는 차를 선물하는 건 이 세상에 네가 유일할 거야.”
아무것도 모르는 리시안셔스는 세레티의 행동이 사랑스러웠는지, 두 눈을 접으며 다정하게 웃었다. 속에서 죄책감이 치밀어 올랐다. 가슴이 심하게 뛰었고 속이 울렁거렸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미 무언가에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당장 멈춰야 한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음식은 물론이고 물도 필요하지 않은 드래곤이었으나, 리시안셔스는 자신을 위해 준비해 준 연인의 성의를 생각해 그 자리에서 당장 물병을 열었다. 세레티는 베일을 쓴 채 자신이 준비한 차를 마시는 리시안셔스의 모습을 조마조마하게 지켜봤다.
“리, 리시…….”
세레티가 뒤늦게 리시안셔스의 이름을 불렀으나 그는 이미 연인이 준비한 찻물을 다 마신 뒤였다.
“응. 왜?”
“…….”
“세레티?”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오늘따라 긴장한 것처럼 굳어 있는 거 같은데.”
리시안셔스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제 연인이 준비하고, 자신이 마신 게 무엇인지.
그만큼 리시안셔스는 세레티를 티끌 한 점 없이 순수하게 믿고 있었다.
“무슨 걱정되는 일이라도 있어?”
“……그런 거 아니에요.”
“드래곤들이 신전을 습격한 일 때문에 다른 인간들이 널 원망이라도 해?”
“정말 아무 일도 없다니까요…….”
세레티의 연신 아무 일 없었다고 해도 리시안셔스는 쉽게 의심을 거두지 못했다.
‘왜 잠들지 않지?’
인간이었다면 진작에 잠들었을 텐데…….
마음이 점점 초조해졌다.
“……세레티.”
“네.”
“난 요즘 좀 불안해.”
“뭐가요……?”
죄를 저지르고 있는 중이던 세레티는 지레 찔려 심장이 세차게 뛰는 걸 느꼈다. 조심스럽게 리시안셔스를 올려다보자 그는 의미를 알 수 없는 눈으로 세레티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설마. 리시안셔스가 눈치챈 걸까.
“네가 다른 생각하는 거 같아서.”
불안했던 예감이 반쯤 사실로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이윽고 손이 덥석, 붙잡히고 리시안셔스의 입에서는 세레티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말이 흘러나왔다.
“네가 나를 떠날까 봐.”
“그, 그게 무슨 소리예요! 내가 리시안셔스를 왜 떠나요?”
“요즘 우리 관계 때문에 안팎으로 소란스럽잖아.”
“…….”
“너는 타인의 시선에 예민한 성정이고.”
딱히 비꼬려는 의도보다는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말하고 있는 말투였으나, 세레티는 조금 마음이 불편해졌다. 스스로도 자신이 그런 성정이라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타인의 시선 때문에 낮아진 자존감으로 리시안셔스를 상처 주기도 했었다.
“다른 이들의 말에 휘둘리지 마.”
“…….”
“지금처럼만 서로를 믿고 버티면, 모든 게 좋아질 거야.”
리시안셔스는 어쩌면 저렇게 강할 수 있는 걸까.
“아니, 약속할게. 모든 게 좋아지도록 만들 거야.”
세레티는 리시안셔스의 강인함이 부러우면서도 두려웠다.
“아, 그런데…….”
“리, 리시안?”
“이상하네. 머리가 조금…….”
인간과 다른 드래곤이라 그런지, 약효는 뒤늦게 발현됐다. 하지만 효과는 확실했다. 리시안셔스는 머리를 부여잡더니 그대로 세레티의 무릎 위로 쓰러졌다.
“…….”
심장이 마구 뛰었다.
다른 이들의 말에 휘둘리지 말고, 서로를 믿자고…….
리시안셔스의 말이 흔들리는 세레티를 붙잡으려 했다.
「이건, 내가 가족으로서 네게 마지막으로 해 주는 충고야.」
하지만 그때,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자신을 품어주고 아껴주는 사람이라 생각했던 에리카의 말이 떠올랐다.
「널 향한 드래곤의 사랑이 영원할 거라 착각하지 마.」
유일한 가족이라 생각했던 에리카의 말은 다시금 세레티를 뒤흔들어 놓았다. 세레티는 기어이 품속에 숨겨놓은 칼을 꺼냈다. 그리고 사랑하는 연인을 위해 인간화로 변해 부드러워진 드래곤의 피부를 갈라 피를 병에 담았다.
***
세레티는 곧장 피를 담은 병을 가지고 신전으로 돌아가 디에고에게 건넸다. 그런 속설이 있었다. 자신보다 강한 자의 피와 살을 탐하면 그만큼 강해진다고. 그래서 디에고는 이제껏 친구를 자처하는 리시안셔스에게 피를 요구했으나 그때마다 거절당했다고 한다.
『잘 생각했어. 내가 강한 드래곤이 되면 다른 드래곤들을 설득해서 너희의 사랑을 손가락질하지 않도록 할게.』
“…….”
『리시안셔스가 가장 강한 드래곤이 아니게 되면, 다른 드래곤들의 반발도 그렇게 크지 않을 거야.』
꽤 많은 양의 피를 마신 디에고의 몸이 점점 부풀어 올랐다. 이윽고 디에고는 세레티가 전혀 알지 못하는 다른 드래곤이 되었다.
리시안셔스만큼 거대한 덩치를 가진 회색 드래곤이 된 디에고는 마지막까지 세레티가 달콤하게 여길만한 사악한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하지만 불완전하게 태어난 드래곤이 고작 완전한 드래곤의 피를 마셨다고 곧장 모든 게 완전해질 리 없었다.
디에고는 세레티를 완벽하게 속였다.
처음에는 신이 가장 사랑하는 첫 번째 드래곤과 첫 번째 인간이 사랑에 빠진 걸 보고, 첫 번째 인간이 자신을 선택해주면 자신도 리시안셔스만큼 완벽해질 거라 믿었다. 그러나 세레티는 끝내 디에고를 선택해주지 않으니, 그로서는 다른 방법을 찾을 수 없었다.
‘어리석은 세레티. 네가 날 선택해 줬다면 모든 게 완벽해졌을 텐데.’
자신이 리시안셔스의 힘까지 탓하게 된 건 모두 세레티 탓이었다.
모든 것이 첫 번째지만 불완전한 주제에 자신을 선택해 주지 않은, 어리석은 세레티의 잘못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