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왜 그동안 얘기 안 했어?”
이 세상에 몇 안 되는 소중한 존재가 사실은 아주 오랫동안 제게 깊은 증오를 품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되는 건 무서운 일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지금 들은 에리카의 얘기를 못 들은 체하고 싶었다.
“날 싫어한다는 거.”
하지만 이미 들은 얘기는 물과 같아서, 이미 엎질러진 물을 주워 담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부정하고 싶었지만, 부정하는 것조차 온 힘을 다해 증오를 드러낸 상대에게 상처를 주는 일이었다.
세레티는 에리카를 상처 주고 싶지 않았다.
“어떻게 얘기할 수 있겠어. 나는 너를 위해서 태어났는데.”
에리카는 세레티가 기억하지 못하는 아주 오래전의 이야기를 꺼냈다.
첫 번째 인간으로 태어났던 자신은 아주 오랫동안 외로워했고, 그로 인해 신이 똑같이 생긴 두 번째 인간을 만들어주었다는 것.
“그런데 어느 날 너는 갑자기 두 눈이 멀어버린 불완전한 존재가 되어버렸지.”
“…….”
“앞이 보이지 않게 된 순간부터는 기억하고 있겠지? 넌 눈이 보이지 않게 된 뒤로도 아주 오랫동안 나와 둘이서만 지냈잖아.”
세레티가 눈이 멀고 나서도 세 번째, 네 번째, 그리고 여러 인간들이 탄생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 긴 시간 동안 세레티는 오로지 에리카와 둘이서만 소통하며 지냈다. 갑자기 기억과 시력을 잃은 세레티의 수발을 드는 건 모두 에리카의 몫이었다.
“여러 인간들이 탄생하고 지금의 문명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도 난 오직 너를 위해 살아야만 했어. 네가 사람들에게 덜 상처받게 하기 위해, 다치지 않게 하기 위해.”
“…….”
“심지어는 ‘첫 번째’를 가장 찬양하는 다른 사람들 앞에 나설 수 없는 널 대신해서…….”
“…….”
“바깥에서는 네 이름으로, 네 흉내를 내야 했지.”
세레티는 에리카가 원망을 토로하는 내내 아무것도 반박할 수 없었다. 오히려 지금 이 순간, 새로운 사실을 깨달았다.
‘난 한 번도 에리카의 기분을 물어본 적이 없어.’
자신의 이름으로 바깥에 나갔다 온 에리카에게…….
바깥은 어떤 풍경인지, 바깥 사람들은 어떻게 사는지 물어본 적은 있으나, 그들과 만나고 겪은 에리카의 기분이 어떤지는 물어본 적이 없었다.
에리카에게 자신의 역할을 빼앗기게 된 것은 슬프게 느꼈지만, 자신의 이름을 가져간 에리카도 힘들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다.
“왜 두 번째로 태어났다는 이유로 내가 네 흉내를 내야 해? 앞이 안 보이게 된 네 역할을 내가 대신 해야 돼?”
“…….”
“어째서 나는 너를 위해서만 살아야 하는데?”
막연하게 에리카는 행복할 줄 알았다.
진실을 아는 신전의 사람들은 모두, 자신을 대신해 에리카가 첫 번째로 태어난 인간이어야 했다고 말했다. 자신은 신의 실수고, 사실은 에리카가 진짜 첫 번째 인간이나 다름없다고도 했다.
그만큼 에리카는 아름답고 완전하니까 그렇게 말한 걸 테다. 그런 찬양을 받는 에리카가 행복하지 않은 건 말이 되지 않은 일이라 생각했다. 에리카의 온화함과 친절은 그녀가 행복하니까 나올 수 있는 태도라 여겼다.
그러나 모든 건 자신의 속 편한 착각이었다.
누구보다 가깝고, 제게 가장 소중한 사람이었던 에리카는 전혀 행복하지 않았다. 사실 자신과 에리카는 단 한 번도 가까운 관계였던 적이 없는 걸지도 모르겠다.
“세레티.”
에리카가 낮은 목소리로 세레티의 이름을 불렀다.
“지금만큼은 네게 거짓말하지 않고 솔직해질게.”
아니, 솔직해지지 말아줘.
그냥 계속 거짓말해줘.
“나한테 넌 끔찍한 존재야.”
날 좋아한다고.
우리는 여전히 한 자매이자 가족이라고.
“민폐 덩어리에 할 줄 아는 건 아무것도 없지.”
“…….”
“그런 너를 누가 좋아할 수 있을까?”
무릎 위에 올린 두 손이 절로 말아졌다. 분노 때문이 아니었다. 정곡을 찔려 차마 반박도 못 하고, 떨고 있는 셈이었다.
‘리시안셔스…….’
세레티는 리시안셔스를 떠올렸다.
항상 자신에게 망설임 없이 사랑한다 말해 주던…….
“그 드래곤이 진심으로 널 사랑한다고 생각하지 마.”
세레티가 리시안셔스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걸 눈치채기라도 한 걸까. 에리카가 리시안셔스를 언급했다.
“에리카.”
그 순간, 세레티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치켜들어 원망이 가득 차 있는 에리카의 두 눈을 마주 봤다.
“다른 건 다 괜찮은데…….”
무슨 용기로 그런 얘기를 꺼낸 건지 모르겠다.
“리시안셔스에 대해서는 함부로 말하지 마.”
아마도 다른 건 몰라도 자신을 향한 리시안셔스의 마음만큼은 부정당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가장 컸을 것이다.
“리시안셔스의 마음이 어떤지는, 그의 입을 통해서만 들을 거야. 너도 함부로 리시안셔스의 마음을 걸고넘어지지 않았으면 좋겠어.”
“하…….”
“네가 날 싫어하고, 그럴만했다는 건 충분히 알아들었으니까.”
그러니까 다른 건 몰라도 리시안셔스에 대해서는 아무 말 하지 말아줘.
나를 사랑한다던 그 마음을 의심하고 싶지 않아. 흔들리고 싶지 않고, 불안에 떨고 싶지도 않아.
……부탁이야, 에리카.
“그 드래곤에게 단단히 빠졌구나.”
입 밖으로 부탁이라고 말하지 못했을 뿐, 세레티는 사실상 애원하고 있는 셈이었다. 그러나 증오에 가득 찬 상대가 하는 애원을 눈치채고 들어줄 사람은 이 세상에 없었다.
“하긴, 다정하긴 하더라. 자신을 기만한 인간인 내게 화내지 않으셨어. 너와 합의하에 네 흉내를 낼 정도면, 너와 가까운 사이일 거라고 판단하신 거 같더라.”
“…….”
“가장 위대한 존재가 내게 그리 상냥하다면 마음이 움직일 만해. 그 위대한 존재가 사랑을 속삭이는데 어찌 믿지 않을 수 있겠어.”
에리카는 세레티가 가장 불안해하던 지점을 찔렀다.
“하지만 알고 있을 거야, 세레티. 드래곤과 인간의 사랑이라니. 절대 용납될 수 없는 일이라는 걸.”
인간들의 입장에서 드래곤은 멀리 우러러볼 수 있는 존재니, 그 존재가 인간을 사랑하는 건 아름답게 바라볼 수 있었다. 그러나 드래곤들의 입장은 다를 것이다. 그들의 입장에선 종족을 이끌어가는 존재가 한낱 짐승과 사랑에 빠진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아무리 위대한 존재라도 완전히 이성적일 수는 없겠지. 마음이 존재하는 한, 잘못된 감정에 한 번쯤 휘둘릴 수도 있는 법이야. 그렇지만 일이 이렇게 흘러간 이상, 그 드래곤도 다시 한번 생각해보지 않겠어?”
“……그만해.”
“정신 차려, 세레티. 지금 이 얘기만큼은 정말로 널 위해서 해주는 얘기니까.”
“거짓말, 넌 그냥 내가 싫으니까 상처 줄 말만 하는 거잖아!”
“그렇게 생각해?”
에리카의 입술이 삐뚜름하게 올라갔다. 이제껏 세레티가 에리카에게서 볼 수 없었던 종류의 비뚤어진 미소였다.
“난 네가 정말 싫지만…….”
에리카는 어쩌면, 증오를 드러낸 순간부터 가장 드러내기 싫었던 또 다른 밑바닥 감정을 드러냈다.
“그만큼 너와 지냈던 시간은 너무 길고, 기억은 깊어서…….”
“…….”
“널 조금쯤은 아끼기도 하거든.”
지금의 인류가 완성되기 전에 둘만 있던 시간까지 합하면, 에리카와 세레티가 함께 살아온 세월은 너무나도 길었다. 지상에 있는 모든 것들이 신의 손길 하나하나에 만들어지는 이 시대에 태어난 존재들은 모두 그만큼 수명이 길었으니까. 함께 한 시간이 긴 만큼, 상대방을 향한 마음이 증오만이 전부는 아니었을 것이다.
단, 그만큼 증오도 깊었을 뿐.
“만약에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
“…….”
“그때는 정말 순수한 마음으로, 가족으로서 널 사랑하고 아끼기만 하고 싶었어. 다 부질없는 얘기지만.”
평생 다리를 절게 된 에리카는 그 원인이나 다름없는 세레티를 향한 원망을 토해냈고, 이제 이들의 관계는 절대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기억을 지우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지 않는 한은.
“이건, 내가 가족으로서 네게 마지막으로 해 주는 충고야.”
에리카는 세레티가 듣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한 번 더 강조하듯이 리시안셔스에 관한 얘기를 꺼냈다.
“널 향한 드래곤의 사랑이 영원할 거라 착각하지 마.”
에리카의 마음이 진심 어린 충고든, 비꼬는 저주든, 그 말은 확실하게 세레티의 안에 불안의 씨앗을 심는 것에 성공했다. 세레티는 에리카의 말을 냉정하게 무시할 수 없었다.
지금 리시안셔스의 마음을 의심하는 게 아니다. 에리카도 그 마음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진심이라고 해서 그 마음이 영원할 수는 없는 법이었다.
바로 그 시기였다.
『세레티, 표정이 왜 그리 안 좋아?』
“……디에고.”
그녀가 연인의 부탁으로 돌봐주고 있는 작은 드래곤은 기가 막히게 세레티의 불안함을 눈치챘다.
『밖에서 안 좋은 일이 있었던 거 같은데, 무슨 일인지 얘기해줄 수 없어?』
“아, 아무것도 아니야…….”
『혹시 리시안셔스 때문이야?』
“아, 아니야!”
『과하게 부정하는 거 보니까, 리시안셔스 때문이 맞네.』
교활한 뱀과 다를 바 없는 디에고가 세레티를 다시 유혹하기 시작했다.
『너희의 사랑을 지킬 방법이 있는데, 왜 자꾸 망설이는 거야.』
“…….”
『죄책감 가질 필요 없어, 세레티. 이건 나와 너, 그리고 리시안셔스를 위한 일이니까.』
당연히 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고, 얘기를 들을 가치조차 없는 계획이었다. 제정신이었다면 당연히 외면했을 것이다. 하지만 극에 달한 불안함은 때론 사람을 옳지 못한 길로 이끌 때가 있었다.
그럴 때는 가면 안 된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고 있으면서도, 멈추지 못하고 기어이 그 길을 가고는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