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만약에 리시안셔스가 현재 불완전해진다면?』
“그건 또 무슨 말이야?”
『그럼 넌 리시안셔스를 신전에 데려와서 하루 종일 곁에 둘 수 있겠지. 지금 내가 계속 네 곁에 있는 것처럼.』
“……나는 요즘 네가 왜 자꾸 그런 말을 하는지 모르겠어.”
『리시안셔스보다 나랑 있는 시간이 더 긴 거, 조금 짜증 나지 않아?』
“너랑 있는 시간이 싫다고 생각한 적 없어. 네가 이런 말을 하는 게 불편할 뿐이지.”
『세레티, 이 바보야.』
디에고가 실실 웃는 얼굴로 세레티에게 속삭였다.
『드래곤과 인간의 사랑? 경악할 만한 일이지. 그런데 지금 이렇게까지 난리가 난 건, 하필이면 그 대상이 ‘리시안셔스’이기 때문이라고.』
“…….”
『가장 위대한 존재가 가장 보잘것없는 존재에게 빠졌으니까.』
디에고의 사악한 말들은 세레티에게 계속해서 끊이질 않고 쏟아졌다.
리시안셔스를 끌어내리자는 게 아니야. 그 녀석조차도 부담스러울 그 자리에서 내려올 수 있도록 도와주자는 거지.
그럼 너희의 사랑이 아주 조금은 덜 욕먹게 될 거야.
아니지. 드래곤과 인간들은 리시안셔스에게 신경을 끌 테고, 그럼 너희가 다른 이들의 시선에 고통받을 일도 없을 거야.
네가 아주 조금만, 날 도와주면 돼.
그래 줄 수 있지, 세레티?
***
세레티는 몇 날 며칠 동안 우울함에 잠겨 있어야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디에고가 했던 말이 귓가를 떠나지 않았던 탓이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 마, 디에고. 난 리시안셔스를 끌어내릴 생각 없어.」
「리시안셔스를 끌어내리자는 게 아니야. 녀석이 원해서 첫 번째 드래곤이 되었겠어? 아마 말은 안 해서 그렇지, 녀석도 그 자리가 부담스러울걸?」
「네가 한 말은, 못 들은 걸로 할게.」
「자, 잠깐! 세레티!」
세레티가 끝까지 설득되지 않자, 디에고가 다급하게 세레티를 불러세웠다.
「내가 표현을 좀 잘못한 거 같네.」
「…또 무슨 말을 하려고.」
「리시안셔스를 끌어내리는 게 아니라, 날 좀 도와줘.」
「…….」
「나를 돕는 게 너와 리시안셔스를 돕는 길이기도 해!」
「나와 리시안셔스를 돕는 길이라고……?」
세레티는 속으로 디에고가 했던 말을 곱씹어봤다.
쉽게 판단이 서지 않았다. 아주 말도 안 되는 제안을 들은 거 같은데, 근데 또 그렇게 이상한 제안도 아닌 거 같았다. 오히려 아주 달콤한 제안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이상한 생각 하지 말자.’
그런 제안을 수락한다는 게 말이나 돼? 리시안셔스가 알면 기겁할 거야.
애써 머릿속으로 그 제안을 지워보려 했지만 쉽사리 잊히지 않는 것도 사실이었다. 세레티는 괜히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무슨 일 있어?”
“네? 아, 아니요!”
보다 못한 리시안셔스의 질문에 세레티는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그, 그냥…….”
“그냥?”
세레티는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 리시안셔스를 바라봤다.
“있잖아요, 리시안셔스.”
“응.”
“그 자리가 부담스럽지는 않아요?”
“……자리?”
세레티의 말이 잘 이해가 가지 않는 듯, 리시안셔스가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며 되물었다. 자신의 설명이 부족했다는 것을 깨달은 세레티가 다시 설명을 보충했다.
“그러니까……. ‘첫 번째 드래곤’이라는 자리요.”
말을 꺼내고 나자 마음속에서 이상한 기대감이 차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뭐지. 이게 무슨 마음이지.
“큰 힘을 가지고 있는 만큼 많은 책임을 요구하는 자리잖아요. 혹시 리시안셔스는 그런 자리가 부담스럽다고 느낀 적은 없어요……?”
아. 완전히 말을 꺼내고 나니, 알겠다.
리시안셔스가 이 자리가 부담스럽다고 말해 주길 바라고 있다는 것을.
그렇게 말해 준다면 디에고의 제안을 받아들일 명분이 생기니까.
“……글쎄.”
그러나 리시안셔스는 세레티가 원하는 말을 해주지 않았다.
“부담스럽다는 생각은 못해본 거 같은데.”
“왜, 왜요?”
“태어난 순간부터 주어진 역할이라 그런가.”
“그렇구나…….”
“너는 종종 그런 생각을 해? 첫 번째가 아니었으면 좋았을 거라는.”
“아주 가끔은 해요. 첫 번째 인간 아니었으면 제가 이렇게 불완전한 것에 대해 사람들이 조금은 덜 싫어하지…, 않을까…….”
“…….”
“생각하긴 했는데…….”
별 생각 없이 꺼낸 말인데 점점 어두워지는 리시안셔스의 표정을 보자, 세레티는 자신이 실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저는 제가 운이 좋다는 생각이 들어요.”
“왜?”
“리시안셔스를 만났잖아요. 완전한 드래곤에 비해 저는 불완전한 인간이라 볼품없지만…….”
“……사실은 그 반대인데.”
“네……?”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태어나지 못했던 자신에게 세상을 볼 수 있는 눈을 준 게 본인이라는 것을 기억하지 못하는 세레티를 안타까움과 애정이 섞인 눈으로 바라보던 리시안셔스가 그녀의 손을 꼭 붙잡았다.
“그거 알아? 이제 인간들은 스스로 자손을 번식할 수 있어.”
모든 생명체들이 스스로 종족을 번식하지 못하고 모두 신의 손에 의해 하나씩 탄생하던 시기였다. 하지만 그러한 시기를 지나, 모든 종족은 자손을 번식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기 시작했다.
단, 드래곤을 제외하고.
드래곤은 반은 신이나 다름없기 때문에 다른 생명체들과는 존재의 의의가 달랐다. 그렇기에 그들에게 번식은 필요하지 않았다. 압도적인 힘 때문에 세계의 균형을 위해서는 오히려 개체가 너무 많아지는 것을 경계해야 하는 종족이었다.
리시안셔스는 인간들처럼 자손을 가지고 싶다는 욕구는 없었지만 그들이 그 과정을 위해서 하는 어떤 절차에 대해서는 내심 해 보고 싶은 욕심이 들었다.
“그래서 인간들은 번식을 위해 ‘결혼’이라는 걸 한 대.”
“그게 뭔데요?”
“나와 함께 자식을 낳고 함께 삶을 나눌 일생의 ‘반려’를 맞이하는 의식이지.”
세레티가 아니었다면 인간들의 그러한 의식을 부러워할 일은 없었을 것이다.
“나는 자손을 가질 수 없고, 그러고 싶은 마음도 없지만…….”
“…….”
“그럼에도 내 일생의 ‘반려’는 너라고 생각해.”
리시안셔스는 평소보다 유독 긴장이 서린 얼굴로 세레티를 바라봤다.
“나와 ‘결혼’이란 걸 해 줄래?”
일생을 함께할 반려를 맞아들이는 의식이라는 결혼.
리시안셔스는 제게 그 의식을 함께하자고 말하고 있었다. 당연한 결과지만, 세레티가 그 제안을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반려라는 게 리시안셔스가 말한 그런 의미라면, 반려가 되기 위해서 결혼식을 해야 한다면, 그러고 싶었다.
리시안셔스는 드래곤인데도 불구하고 인간의 기준으로 세레티에게 확신을 안겨줬다. 세레티는 목소리가 떨려서 대답을 하는 대신 그의 품에 안기는 것으로 그의 청혼에 답했다.
아무도 초대하지 않은 둘만의 결혼식은 조촐했다. 바닥에 꽃을 뿌리고 서로의 손을 마주 잡았다.
“이다음에는 어떻게 해야 돼요?”
“이리 와서 내 손을 잡고…….”
의식을 치르면서도 리시안셔스와 세레티는 아이처럼 연신 키득거렸다. 애써 웃음기를 꾹 억누른 리시안셔스가 세레티의 이마에 머리를 맞대고 속삭였다.
“나는 오직 그대만을 바라보며…….”
“…….”
“따라 해.”
“나, 나는 오직 그대만을 바라보며…….”
간지러워서 마주 잡고 얽힌 손가락이 자꾸만 꿈틀거리고, 어색해서 웃음이 비실 새어 나왔다.
“내 삶이 다하는 날까지.”
“내 사, 삶이 다하는 날까지…….”
“영원히 사랑할 것을.”
“영원히 사랑할 것을…….”
“맹세합니다.”
“맹세합니다.”
어색한 의식이 끝나고 나자 베일을 사이에 두고 자잘한 입맞춤이 이어졌다.
세레티는 문득 이 베일을 벗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베일을 벗고, 그 어떤 것도 사이를 가로막지 않은 채 리시안셔스와 입을 맞출 수 있다면 좋을 텐데…….
하지만 그러한 충동보다 더 큰 힘을 가진 감정은 오래된 자기혐오였기 때문에 세레티는 잠깐 차오른 충동을 억누를 수 있었다.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첫 번째 인간과 첫 번째 드래곤은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지나가던 인간 아이가 이들의 결혼식을 목격하고는 인간들의 마을로 내려가 자신이 본 것을 알린 것을.
그리고 이들이 조촐한 둘만의 결혼식을 올리는 동안, 세레티가 산다고 알려진 신전에 드래곤들이 들이닥쳤다는 것도.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와중에는 전혀 알지 못했던 사실이었다.
***
사건의 전말은 이러했다.
점점 자신들이 인간들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보호해야 하는 것에 의구심을 품은 드래곤들이 늘어가던 시국에, 가장 위대하다 여겨진 드래곤이 인간을 사랑한다는 우스운 얘기가 퍼지고 있었다.
그 얘기는 단순 소문이 아니라 기정사실이었다.
리시안셔스가 인간과 있는 것을 목격한 드래곤들은 많았다. 그들의 반발과 인간을 향한 혐오는 가장 위대한 드래곤이 사랑한다 알려진 인간에게 향했고, 그 결과는 신전을 향한 침입으로 이어졌다.
총 15명의 사제가 사망하고 20명이 중태에 빠졌다. 자신들의 역할이 무엇인지 망각하고 저지른 죄였다. 당연히 드래곤들을 통솔하는 리시안셔스는 직접 그들을 사형시켰다. 하지만 이 사건은 더 많은 드래곤들에게 반발심을 안겨주었다.
리시안셔스로서는 할 일을 한 것이었지만, 동족들의 눈에 인간을 사랑한 리시안셔스가 동족을 죽인 것으로 여기기 시작한 것이다. 다채로운 모든 종족이 어울려 살아가는 아름다운 낙원의 시대는 이제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에리카, 괜찮아?”
신전에 있는 세레티라고 해서 마음이 편한 것은 아니었다. 가장 아끼던 에리카가 큰 부상을 입었기 때문이었다.
에리카는 무너지는 신전의 기둥에 깔려 평생 다리를 절게 되는 신세가 되었다.
애초에 이 모든 사달이 나게 된 것은 자신과 리시안셔스에 관한 소문이 퍼져 반발심을 가진 드래곤들이 신전을 공격하게 되면서 일어난 일이었다. 세레티는 에리카를 향해 죄책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미안해, 에리카. 나 때문에…….”
“…….”
“내가 너 대신 아플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에리카는 초췌해진 얼굴로 아무 말 없이 세레티를 바라보기만 했다. 가장 믿고 모든 걸 드러낼 수 있는 상대이기에 베일을 벗은 세레티가 눈물을 닦아낼 때였다.
“그 말 진심이니?”
한참 입을 다물고 있던 에리카가 입을 열었다.
“그럼 신에게 기도해 보지 그래?”
“…….”
“망가진 내 다리와 멀쩡한 네 다리를 바꾸게 해 달라고.”
언제나 온화하고 부드럽던 에리카의 목소리에는 날이 서 있었다.
자신 때문에 다쳐서, 아프고, 화가 나서 그런 걸 테다.
“내 솔직한 속마음을 말해 줄까?”
“…….”
“세레티. 난 오래전부터 네가 정말…….”
“…….”
“아주 많이 싫었어.”
그러니까, 지금 저 말도…….
진심이 아닐 것이다.
‘에리카는 나 때문에 다쳐서 화가 난 것뿐이야.’
그러니까 저런 말에 상처 입을 필요 없다.
‘에리카가 처음부터 날 싫어했을 리 없잖아.’
모두가 날 싫어할 때도 항상 손을 내밀어주던 유일한 사람이었는데.
“난 일평생 네 뒤치다꺼리만 하면서 살아야 했어. 그게 얼마나 지긋지긋했는지 알아?”
애써 부정하고 싶었지만…….
세레티는 인정해야만 했다.
지금 에리카가 하는 말은 홧김에 내뱉는 말이 아니다. 에리카는 정말 자신을 싫어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