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를 기억해 주세요-116화 (116/120)

<116화>

“아, 무겁잖아!”

『입 닥쳐.』

“죽일 생각은 없었어!”

『다른 생각은 있었고?』

“당연히 없었지! 그냥 신기해서 구경만 하려는 거뿐이었어!”

『그래서, 싫다는 애를 데려와서 기어이 그 얼굴을 억지로 봤단 말이지.』

“근데 얼굴 봤는데, 저 여자애는 네가 사랑한다고 소문난 인간이 아닌 거 같은데?”

『헛소리하지 말고 죽어.』

“아악! 농담이야! 안 봤어! 안 봤어!”

세레티가 아는 리시안셔스는 쉽게 생명을 죽이는 인물이 아니었다. 거기다가 제 앞에서는 더욱더 누군가를 죽이지 않은 인물이었다.

그러나 진심으로 겁에 질린 여자는 소리를 지르며 거짓말을 했다.

“데려오기만 했어! 얼굴 안 봤다고! 야, 그렇지? 나, 네 얼굴 본 적 없잖아. 없다고 말해, 빨리!”

『세레티한테 소리치지 마!』

세레티도 저 여성 드래곤이 본인이 살기 위한 거짓말에 동참해 주기로 했다.

“저, 저 말이 맞아요…….”

『뭐?』

“저분은 억지로 제 얼굴을 보는 행동은…….”

『…….』

“하지 않았어요?”

저 드래곤이 자신의 얼굴을 봤다고 얘기하면, 평소에 자신의 얼굴을 궁금해하던 리시안셔스가 물어볼 수도 있다.

세레티의 얼굴이 어떻게 생겼냐고.

‘그럼 저 드래곤은 본 대로 얘기하겠지.’

아주 흉측하고 징그러웠다고 말이다.

차라리 그럴 바에는 자신이 저 거짓말을 보태서 상황을 모면하는 것이 나았다.

“봤지?”

여자가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세레티가 괜찮다고 하니, 이만 봐주긴 하겠지만…….』

“…….”

“다음에 또 이런 일이 있으면 그땐 널 가만두지 않을 거야.”

인간화를 한 채였는데도, 리시안셔스는 정말 위협적이었다. 분명 인간의 모습이었는데 뱀처럼 찢어진 동공이나 본체의 발톱만큼이나 날카로운 손톱 때문일 것이다.

“아, 알았어. 알았어.”

겨우 풀려난 여자가 눈에 띄게 안도 어린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저 인간 여자를 진심으로 사랑하기라도 하는 거야?”

“네가 신경 쓸 바가 아니야.”

“그건 그렇긴 한데, 요즘 들려오는 말들이 심상치 않은 건 알고 있지?”

“내가 다른 인간들이 하는 말을 신경 써야 하나?”

“인간들뿐만 아니라 우리 동족들의 반응도 심상치 않아서 하는 말이지.”

리시안셔스가 어떻게 말할지 알고 있다.

분명 그는 신경 쓰지 말라고, 어리석은 자들이 하는 말뿐이라고.

그렇게 세레티를 안심시키려 노력할 것이다.

하지만 세레티는 여자가 하는 말을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었다.

“한낱 인간을 사랑하는 넌 진정한 드래곤이 아니며, 우리의 아버지로 인정할 수 없다던데?”

자신에게 향하는 시선이나 말들은 힘겨워도 버틸 수 있지만, 지금 저 여자가 말하는 내용 속 주인공은 리시안셔스니까.

“그 녀석들이 뭐라 하건 신경 안 써.”

“신경 좀 써. 솔직히 다른 종족과 사랑에 빠진 드래곤이라니……. 진짜 제정신 아닌 거 같다고. 지금 다른 동족들은 네가 광증에 걸렸다고 여기고 있어. 조만간 신께서 널 내칠 거래. 신의 대행자 역할을 하는 드래곤이 돌봐야 하는 인간과 사랑에 빠졌으니, 자격을 박탈당할 거라나?”

“그래서? 그 말을 내게 하는 저의가 뭐야?”

“네가 뭘 하든 상관은 없지만, 그래도 정이 있으니 나름 걱정되어서 하는 말이야. 잠깐의 호기심이나 재미일 뿐이라면 이쯤에서…….”

“아케르트.”

“응?”

“널 죽이진 않더라도, 입은 찢어 놔야겠어.”

“미안, 나 이만 간다!”

아케르트는 금방 본체의 모습으로 변해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그녀는 부리나케 도망쳤으나 이미 그녀가 한 말은 세레티의 마음속에 깊이 박혔다.

‘나 때문에…….’

리시안셔스가 같은 동족들 사이에서 안 좋은 취급을 받고 있다니.

자신이 리시안셔스에게 아무 말 안 하듯이, 리시안셔스도 그가 겪고 있는 일에 대해 세레티에게 일절 한 마디도 없었다.

“저 시끄러운 녀석이 한 말은 신경 쓰지 마.”

“…….”

“그보다 많이 놀랐지? 아케르트는 내가 나중에 따로 만나서…….”

피곤한 듯 미간을 찌푸린 채 한숨과 함께 낮은 목소리를 내던 리시안셔스가 이윽고 세레티의 모습을 보고는 잠시 하던 말을 멈추었다.

“리, 리시안……?”

리시안셔스가 성큼성큼 큰 보폭으로 세레티에게 다가왔다.

“왜, 왜 그래요?”

세레티의 질문에도 리시안셔스는 대답하는 대신, 손목을 붙잡았다. 그리고는 천천히 손길을 올려 조심스럽게 팔뚝에 긁힌 부분을 어루만졌다.

“아케르트가 이렇게 한 거야?”

“그, 그게……?”

“역시 팔이라도 부러뜨렸어야 했는데…….”

“아, 아니에요!”

안 그래도 동족들에게 미움받고 있다던 리시안셔스가 자신 때문에 아케르트라는 드래곤을 해쳤다가 더욱 큰 미움을 받을까 봐 겁이 났다. 세레티는 자신이 인간들의 경멸을 받는 것처럼, 리시안셔스가 드래곤들 사이에서 배척받기를 원하지 않았다.

“제가 혼자 넘어진 거예요.”

“내가 바보인 줄 알아?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 믿어 주지.”

“진짜예요.”

귀한 보석에 흠집이 나기라도 한 것처럼 리시안셔스는 세레티의 몸에 상처가 난 것을 마음 아파했다.

“그러니까 아까 그분, 해치지 말아요. 네?”

“너는 널 함부로 끌고 온 그 녀석을 옹호해 주고 싶어?”

“그야, 리시안셔스의 동족이잖아요.”

“그럼 나와 같은 동족만 아니면, 널 상처 준 자들을 혼내 줘도 돼?”

“…….”

“개인주의인 드래곤들도 저렇게 시끄러운데 인간들이 조용할 리가 없잖아.”

세레티는 한 번도 입 밖으로 꺼낸 적이 없었는데도, 리시안셔스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세레티가 말하기 싫어하니 이번에도 먼저 말해 줄 때까지 기다린 것이었다.

세레티는 항상 리시안셔스를 기다리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기다림에 보답해 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난 늘 리시안셔스를 실망시키는구나.’

하지만 이 마음을 입 밖으로 꺼내면 외려 미안해할 건 리시안셔스였다. 세레티는 애써 웃으며 조금 전의 얘기를 꺼냈다.

“리시안셔스를 위한 일이라면 몰라도, 저를 위해서 그러진 마세요.”

“왜? 그들은 신이 사랑하는 첫 번째 인간을 이토록 함부로 대하는데, 어째서 벌을 주면 안 된다는 거지?”

“신께서는 저를 사랑하시는 만큼, 다른 인간들도 사랑하고 계세요. 그리고, 그들이 나쁜 사람이라서 그런 게 아니에요.”

흉측하고 불완전한 것을 낯설게 여기는 건 당연한 본능일 것이다. 인간들 중에 그런 흉측하고 불완전한 존재는 자신뿐이니, 그럴 만도 했다.

인간들은 친절하며 서로를 도우려 했고, 사랑과 선의를 알았다. 비록 세레티는 그들의 선함을 직접 겪은 적은 없으나, 멀리서나마 지켜볼 수는 있었다.

‘내가 겪지 않았다고 해서 그들의 선함이 거짓인 건 아니지.’

그저 자신이 못나서, 인간들의 차가움만을 겪은 것뿐.

인간들 자체가 악한 것은 아니었다.

“드래곤은 인간들과 세계의 균형을 지키라고 신께서 창조한 존재잖아요.”

“…….”

“리시안셔스, 그러니까…….”

때마침 근처에 피어난 리시안셔스 꽃을 발견한 세레티가 그 꽃을 어루만졌다.

부끄러워서 리시안셔스의 얼굴을 만지지 못하는 대신, 이렇게 종종 리시안셔스의 이름을 붙인 꽃을 어루만지고는 했다.

세레티가 꽃을 어루만지는 손길을 유심히 보던 리시안셔스가 뺨을 붉혔다. 마치 그 꽃이 자신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걸 알아챈 것처럼.

“인간을 어여쁘게 여겨 주세요.”

베일을 쓴 세레티의 얼굴은 여전히 보이지 않는데도…….

“당신이 나를 그리 여기는 것처럼.”

리시안셔스는 세레티가 아름답다고 느꼈다.

“그렇게 해 주실 거죠?”

그리고 그는 아름다운 연인의 부탁을 거절하는 방법을 알지 못했기에, 순종적인 태도로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

***

『내가 리시안셔스였으면 좋겠다는 생각 해 본 적 없어?』

세레티는 작은 디에고의 몸을 끌어안고 신전 앞을 산책하는 중이었다.

“그건 또 무슨 엉뚱한 말이야?”

그동안 디에고와 서먹하게 지내긴 했지만 이 신전 안에서 자신이 아니면 디에고를 돌봐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디에고는 리시안셔스의 친구이자, 자신의 친구이기도 했다. 그의 말에 불쾌함을 느끼기도 했지만 돌봄이 필요한 친구를 완전히 외면할 생각은 없었다. 문제는 디에고가 자꾸 세레티가 불편해할 만한 말을 꺼낸다는 점이었다.

『만약에 드래곤 중에서 불완전했던 존재가 내가 아니라면 리시안셔스였다면, 지금 이렇게 네 곁에 있는 것도 내가 아니라 리시안셔스였을 거 아니야.』

“이상한 말 하지 마. 내가 널 맡게 된 건 리시안셔스의 부탁 때문이었어. 리시안셔스가 아니었다면 우린 만나지도 못했을 거야.”

마찬가지로 리시안셔스가 완전한 드래곤이 아니었다면 그날 밤에 죽기 위해 절벽 밑으로 떨어지던 자신을 구하지 못했을 테고, 결론적으로 서로의 인연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즉, 세레티가 리시안셔스를 만나고 디에고를 만날 수 있었던 것도 서로 지금의 모습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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