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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기억해 주세요-115화 (115/120)

<115화>

‘내가 아는 에리카는 리시안셔스와 닮은 사람인데…….’

온화하고 다정한 에리카.

모두가 불완전한 자신을 업신여길 때, 가족으로 여기고 보듬어 준 나의 자매.

“너그러우시더라.”

그런데 지금 자신의 눈앞에 있는 에리카는 평소에 알던 그 에리카가 아닌 거 같았다.

“내가, 네가 아니라는 걸 바로 눈치채셨어.”

“…….”

“알면서도 화를 내지 않으셨지.”

바로 눈치챘다고?

하지만 에리카는 리시안셔스가 완전히 속아 넘어간 것처럼 세레티에게 말 한 마디 한 적이 없었다.

“그분에게 네 얼굴을 보여 줬니?”

“아, 아니…….”

“그래?”

“…….”

“현명한 선택을 했네.”

가까이 다가온 에리카가 세레티의 뺨을 쥐었다.

“난 오래전에 네 얼굴을 본 적이 있잖아.”

기억이 시작되는 순간부터 세레티의 곁에는 에리카가 있었다. 다른 사람이 탄생하기 전부터 에리카는 세레티에게 베일을 씌우기 시작했다. 끔찍한 것을 싫어하는 사람들의 혐오스러운 시선을 보여 주지 않기 위해서라며.

“에, 에리카……. 리시안셔스는 인간들과는 달라. 그분은 드래곤이잖아.”

“드래곤들도 똑같이 눈이 달려 있고, 인간들과 섞여 사는데 아름다움의 기준이 완전히 다르진 않겠지.”

“그렇지만 너는 내가 아름답지 않아도 아껴 주잖아.”

“당연하지. 세상에는 너와 나, 둘만 살던 시절도 있었으니까.”

에리카는 세레티의 두 손을 다정하게 쓰다듬으며 제 자매에게 진심 어린 충고를 던졌다.

“그분이 널 특별하게 생각하는 건 알지만, 완전히 믿지는 마.”

“…….”

“결국 너만 상처받을 뿐이야.”

자매의 진심 어린 충고에 세레티는 아무런 반박도 못 했다.

아직 세레티도 리시안셔스에게 자신의 모습을 보여 줄 용기는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자신의 얼굴을 아는 유일한 사람이 이렇게 만류하는 모습을 보니, 가슴이 무거워졌다. 에리카가 이렇게 말할 정도면 제 얼굴이 얼마나 끔찍하길래…….

“원하는 말을 해 주지 못해서 미안해.”

“미안해하지 마. 나한테 솔직하게 말해 줄 사람은 너밖에 없잖아, 에리카.”

“……생각해 보면, 아무리 혐오스러운 외형을 가졌다 해도 마음이 통하면 품을 수도 있을 거 같긴 해. 내가 널 아끼는 것처럼.”

세레티의 희망을 짓밟았던 에리카는 다시 그녀에게 희망을 전해 줬다.

“그 드래곤과의 관계에 정말 확신이 있다면, 얼굴을 보여 주도록 해.”

“…….”

“하지만 그가 떠날 각오도 해야 하는 거, 알지?”

에리카가 세레티에게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럴 준비가 되어 있니, 세레티?”

리시안셔스가 날 떠나는 걸 각오할 준비가 되어 있냐고…….

그에 대한 대답은 하나뿐이었다.

세레티는 지금 당장 대답하지 않으면 리시안셔스가 떠나기라도 하는 것처럼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니…….”

고개를 숙이고 있어 에리카가 어떤 표정을 지었는진 알 수 없었다.

“가엾은 내 자매, 세레티.”

“…….”

“하필이면 위험하고 불안정한 사랑에 빠졌구나.”

리시안셔스는 상대에게 안정을 느끼게 해 주는 존재였다.

“다른 드래곤들이 리시안셔스가 한낱 인간인 널 사랑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하지만 그가 드래곤이고 세레티가 인간이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는 상대의 성품과 상관없는 것이었다.

“이런 말을 하는 게 네게 잔인한 일인 건 알지만…….”

“아니야, 에리카. 네가 아니면 누가 나한테 이런 말을 해 주겠어.”

“상처받더라도 이것만 알아줘.”

“…….”

“나는 진심으로 널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어.”

에리카가 자신을 진심으로 생각해 주는 건 알고 있었다. 그녀의 충고가 걱정에서 우러나온 거라는 것도.

세레티도 그렇기 때문에 괜찮다고 말하긴 했으나, 가슴께가 무거워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분명 에리카는 평소처럼 자신을 걱정해 주고 있는데…….

오늘의 에리카는 어쩐지 낯설고 어려운 느낌이었다.

하지만 세레티는 이날, 기묘함을 느꼈던 에리카의 모습을 깊게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바로 얼마 지나지 않아서 신의 대륙에 퍼진 소문 때문이었다.

가장 위대한 드래곤이 가장 보잘것없는 인간과 사랑에 빠졌다는 내용이었다.

처음에는 가벼운 소문이었다.

그러나 소문은 얼마 안 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리시안셔스가 매일 신전에 숨어 사는 불완전한 인간을 만나러 가고, 그 인간의 흉측한 얼굴에 입을 맞춘다고 했다.

그들을 주인공으로 한 노랫말이 나오기도 했다. 밤의 행위를 암시하는 가사로, 노랫말 속 주인공은 수치심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신전 내부도 소란스러웠다.

“그 인간이 세레티 님이라고?”

“그렇다니까? 밤마다 몰래 외출하셨던 게, 사실은 그 드래곤을 만나러 간 거였다고.”

“하필이면 에리카 님도 아니고, 세레티 님을?”

세레티가 지나갈 때마다 사제들의 시선이 따라붙었다. 그들은 세레티에게 말은 걸지 않았으나 눈빛으로 묻고 있었다.

정말 당신 따위가 드래곤의 사랑을 받고 있나요?

그들은 세레티가 이제 앞을 보인다는 사실도 모르고, 노골적으로 그녀를 관찰하고는 했다.

세레티는 그 시선 속에서 작아지는 자신을 느꼈다.

그러다가 큰일이 터진 것은 소문이 퍼진 지 나흘째 되던 날이었다.

다른 드래곤이 소문을 듣고 신전을 찾아온 것이다.

모든 사제들이 신전에 있던 대낮에 요란하게 등장한 드래곤은 다짜고짜 리시안셔스의 사랑을 받는다던 모자란 인간이 어디 있냐며 찾았다.

아케르트라는 이름을 가진 붉은 드래곤은 인간화된 모습으로 신전을 마구 헤집었다.

세레티는 무서워서 신전의 지하실 깊숙한 곳에 숨어 덜덜 떨어야만 했다. 나중에 리시안셔스가 아케르트의 목덜미를 물어 끌고 갔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다.

하지만 그 붉은색 비늘을 가진 드래곤은 세레티를 보길 포기하지 않았다.

세레티는 여느 때처럼 리시안셔스를 만나기 위해 밤늦게 신전을 나섰다. 저 멀리서 날아오는 드래곤의 검은 인영이 보여 당연히 리시안셔스인 줄 알고 반갑게 두 손을 흔들던 세레티는, 그것이 코앞까지 다가오고 나서야 자신이 기다리던 리시안셔스가 아니라는 걸 알아챘다. 하지만 피하기에는 이미 늦은 뒤였다.

비명을 지르기도 전에 세레티의 몸이 붕 떠올랐다.

“아……! 아아악!”

붉은 드래곤은 세레티의 몸을 낚아채 순식간에 날아갔다.

비명을 질렀을 땐 이미 세레티의 몸은 하늘 높이 떠오른 뒤였다. 비명을 아무리 질러 대도 붉은 비늘을 가진 드래곤은 세레티를 놓아주지 않았다.

“윽! 악……!”

붉은 드래곤은 세레티의 몸을 낯선 장소에 던지다시피 거칠게 내려놓았다. 바닥에 몸이 구르면서 저절로 고통에 찬 소리가 새어 나왔지만, 그 와중에도 세레티는 베일이 벗겨지지 않도록 세게 움켜잡았다.

이윽고 인간화로 변한 붉은 비늘의 드래곤이 세레티에게 가까이 다가오려 했다.

“야, 얼굴 좀 보자.”

“가…… 가까이 오지 마세요!”

“응? 내가 보여?”

사람들에게 갑자기 앞이 보이게 된 경위에 대해 설명할 수 없었던 세레티는 지금까지도 앞이 보이지 않는 척했다.

자기 자신도 이해할 수 없었으나, 어찌 보면 리시안셔스보다 더 가까운 에리카에게도 비밀로 한 상태였다. 다행히 항상 베일을 쓰고 다녔기 때문에 앞이 보이지 않는 척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두려움에 찬 상대에게서 뒷걸음질 치는 지금은, 앞이 보인다는 사실을 꼼짝없이 들킬 수밖에 없었다.

“이상하네? 리시안셔스가 좋아하는 여자는 앞이 안 보이는 불완전한 존재라고 들었는데…….”

“…….”

“베일을 쓰고 다니고, 매일 밤 리시안셔스를 만나려고 신전 밖을 나온다는 소문은 들어맞았는데…….”

곰곰이 생각해 보는 듯하던 여성체의 드래곤은 이윽고 답을 떠올린 듯 눈을 크게 뜨며 빛냈다.

“베일을 벗어 봐.”

“네, 네? 왜, 왜요……?”

“리시안셔스가 사랑하는 인간 여자는 얼굴이 아주 흉측하다고 들었거든.”

가까이 다가온 여자가 세레티의 얇은 손목을 움켜잡았다.

“네 얼굴이 흉측하지 않다면 리시안셔스의 여자가 아닌 거고, 흉측하다면 맞는 거겠지.”

“이거 노, 놓으세요!”

“반항하지 마, 팔 잘리고 싶지 않으면.”

“윽……!”

이내 베일이 벗겨졌다.

“응?”

베일을 벗은 세레티의 표정을 본 드래곤의 표정이 묘해졌다.

“으으응?”

“…….”

“……아, 아닌가?”

뭐가 아니라는 거지? 얼굴이 정말 아니라고……?

당황한 듯한 아케르트의 얼굴에 세레티는 다시 허겁지겁 베일을 썼다.

“야, 미안하다. 내가 잘못 데려…….”

그녀는 의미를 알 수 없는 사과를 하며 그다음을 이어서 설명하려 했다. 하지만 바로 그때, 거센 돌풍이 불어왔다.

“으악!”

그리고 순식간에 날아온 검은 드래곤이 인간화한 여자의 몸을 내리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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