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를 기억해 주세요-113화 (113/120)

<113화>

스위트피가 이렇게 부탁한다면 리시안셔스는 들어주는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거절로 의기소침해질 스위트피의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다.

다행히 리시안셔스가 스위트피를 발등에 태워 내려왔을 때, 디에고는 뜨거운 바닥에서 날아오르지 못한 채 바르작거리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왔냐.』

지상에는 이미 두 마리의 드래곤이 있었다. 그들은 고린도의 힘에 의해 무력해진 디에고의 날개 한 짝을 완전히 뽑아 버렸다.

찢어진 날개를 늘어뜨린 채 겨우 두 발로 지탱하고 선 아케르트는 디에고의 날개를 자신보다 더 심하게 뽑아 버리고 나서도 만족하지 못한 듯 씩씩거렸다.

크르르-

그의 낮은 울음소리는 더는 위협적으로 들리지 않았다. 디에고는 날개가 찢어진 고통도 느끼지 못하는 거 같았다. 검은빛이 반짝거리는 고린도에서 느껴지는 통증이 그를 지배하고 있는 듯했다.

『역시 거부 반응이 있었던 거였어.』

이미 빼앗긴 것에 대한 아쉬움과 공허함을 지우려, 고린도를 차지한 디에고의 모습에 대해서는 생각지 않으려 했었다. 그러나 고린도를 빼앗은 디에고는 전혀 행복하지 않은 모습이었다.

“인간들을 먹었던 것도 어쩌면…….”

디에고와 함께 공국에 있었을 적에, 그는 고린도의 부작용으로 괴로워할 때면 지하실에 틀어박혀 인간들을 잡아먹었었다.

어쩌면, 인간들을 잡아먹으면 고린도로 인한 부작용이 가라앉았던 거였을지도…….

『하지만 나아진다고 느낀 건 찰나였을 거다.』

디에고를 가리키는 리시안셔스의 목소리가 오묘했다. 후련함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의 목소리에는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슬픔이 잠겨 있었다.

『신은 디에고를 드래곤의 지위에서 박탈시켰지. 그로 인해 고린도의 부작용은 심해졌을 테고.』

리시안셔스가 의식적으로 생각하지 않으려 노력해서 그렇지, 조금만 생각했다면 금방 유추 가능한 상황이었다.

애초에 남의 신체를 훔친 것이기 때문에 그로 인한 부작용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런데 하물며 드래곤이되 더 이상 드래곤이 아니게 되었으니, 고린도의 거부 반응은 더욱 심해졌을 게 분명하다.

드래곤도 인간도, 그 무엇도 아닌 존재가 단 한 마리만 가지고 있던 고린도를 탐한 것이니 말이다. 뒤늦게라도 훔쳤던 고린도를 뽑았다면 괴로움에서는 해방되었겠지만, 디에고의 미련함은 끝내 고린도를 버리지 못했다.

고린도를 버리는 대신, 인간들을 잡아먹으면서 부작용을 가라앉힌 것이다. 언젠가 신께서 자신을 다시 드래곤으로 받아들여 줄 때를 기다리면서.

“리시안, 디에고를 어쩔 생각이에요?”

고린도는 원래의 주인이 가까이 온 것을 눈치채고 더욱 심하게 진동하며 디에고를 괴롭혔다.

『우선, 이 괴로움에서 해방시켜 주고 싶어.』

더 이상 잃어버린 고린도에 대한 미련은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굳이 제 것을 회수하지 않겠다는 뜻은 아니었다. 디에고의 고통을 해방시켜 주고 싶은 것도 진심이었다.

비록 디에고는 자신을 친구라 생각했던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던 거 같긴 하지만, 그는 디에고를 친구라 여겼던 시기가 있었다.

그 시절을 생각해서 그에게 작은 자비는 베풀어 주고 싶었다. 반면, 그런 리시안셔스를 보던 스위트피의 머릿속에는 아주 작지만 이기적인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리시안셔스가 고린도를 다시 차지하게 두면 안 돼.’

고린도는 타인의 과거를 생생한 환상으로 재연해 보여 주는 능력을 갖고 있었다. 그만큼 기억을 보관하는 능력도 갖고 있었다.

고린도는 끝까지 거부했지만 어찌 되었건 아주 오랜 시간을 디에고의 몸속에 박혀 지냈다. 그만큼 디에고의 기억을 모두 정확하게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리시안셔스가 고린도를 통해 디에고의 기억을 보게 된다면…….

“…….”

그 속에 담긴 자신의 얼굴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베일로 얼굴을 가리고 다니던 전생의 자신의 모습을.

스위트피는 두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냥, 자연스럽게 인정하게 되었다. 세레티와 자신의 동일 인물이라는 사실을.

과거의 세레티는 리시안셔스를 배신한 자다. 리시안셔스는 배신을 당하고도 아주 오랫동안 세레티를 잊지 못할 정도로 사랑했지만 그것이 세레티를 용서했다는 의미는 아닐 것이다.

세레티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불완전한 디에고에게는 스스럼없이 얼굴을 보여 줬었다. 그러니 저 고린도를 다시 가져온다면, 분명 과거 베일 속에 있던 세레티의 얼굴을 보게 될 텐데…….

“리, 리시…….”

스위트피는 자신도 모르게 그를 말리려 했다. 하지만 리시안셔스의 행동이 더 빨랐다.

푸욱!

마치 잘 벼린 칼날을 살에 깊이 쑤신 것처럼 날카로운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실상은 그 반대였다. 찔러 넣은 것이 아니라 빼낸 것이었다.

카아아악!

디에고의 날카로운 울음소리와 함께 고린도가 빠져나왔다. 그와 동시에 다른 드래곤들과 맞먹을 정도로 거대했던 디에고는 순식간에 작아졌다.

아주 오래전의 볼품없던 시절과 똑같이.

그러나 스위트피는 그런 디에고를 오히려 친근하게 여기고 좋아했었다.

『스윗……!』

스위트피는 뜨거운 땅 위로 발을 내디뎠다. 리시안셔스가 놀라 반사적으로 스위트피의 몸을 들어 올리려 했지만 고통에 찬 비명은커녕, 멀쩡히 걸어 다니는 스위트피의 모습에 어정쩡하게 앞발을 거두어 갔다.

드래곤도 열기를 느낄 만큼 뜨거운 땅이었으나, 그 열기는 스위트피를 해치지 못했다. 녹아내리기는커녕 화상을 입지도 않은 두 발로 멀쩡히 디에고에게 걸어갔다.

바닥에 누운 디에고는 겨우 숨만 헐떡거리며 눈만 깜빡이고 있었다. 살아 있되,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모습이었다.

“……디에고.”

그러나 가까이 다가온 자의 목소리는 알아들을 정도의 정신은 있었다. 특히나 그가 오랫동안 집착했던 존재에 대한 목소리였기에.

“이제 다 끝났어.”

『…….』

“인간들을 해치고 리시안셔스의 고린도를 빼앗아 드래곤의 자리에서 추방되기는 했지만, 넌 얼마든지 다시 용서를 받고 지위를 되찾을 수 있었어.”

『…….』

“하지만 인간들을 잡아먹음으로써 너는 그 마지막 기회도 잃은 지 오래야.”

첫 번째 드래곤을 배신하고 인간들의 세상에 재앙을 가져와 신에게서 버려진 드래곤이었다. 그런 그가 인간들을 잡아먹으며 힘을 키웠는데, 다시 신의 용서를 받고 지위를 되찾을 수 있기를 바란 것부터가 어리석은 일이었다.

디에고는 이미 마지막 기회를 잃은 지 오래였으며, 지금의 최후는 이미 이미 오래전에 예견된 일이기도 했다.

“너는……. 아니, 우리는.”

『…….』

“좀 더 나은 선택을 할 수도 있었어.”

디에고는 쌕쌕, 간신히 숨만 내쉬는 상태에서도 힘겹게 목소리를 냈다.

『너는……?』

디에고는 죽어 가면서도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목소리였다.

『내게는 없는 기회가……, 왜 네게는 있는 거지……?』

이후에 그가 얼마나 많은 인간들을 죽였는지, 그러고 나서도 단 한 번의 진심 어린 반성도 없었다는 것에 대해 디에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마지막까지 반성이 없는 점이 디에고다웠다. 그 덕분에 스위트피도 아주 오래전 친구였던 자를 향한 안타까움은 버릴 수 있을 거 같았다.

“잘 가, 디에고.”

왜 네가 용서받지 못했는지, 나에게는 있는 기회를 넌 왜 박탈당한 것인지. 그 이유에 대해서 구구절절 설명하고 싶지 않았다. 설명을 해 줘도 그는 납득하지 못할 테니까.

“리시안.”

디에고와 대화를 끝낸 스위트피가 리시안셔스를 불렀다.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스위트피도 안아 올릴 수 있을 만큼 작아진 디에고의 몸을 밟았다.

그는 뜨거운 대지와 드래곤의 발에 밟혀 완전히 녹아내렸다. 뼈도 남기지 않은 채로, 흔적 없이 땅속에 스며들었다. 자신의 마을을 불태우고, 가족들을 죽이고.

그 이후로도 자신과 리시안셔스를 오랜 시간에 걸쳐 괴롭혔던 드래곤은 이렇게 최후를 맞이했다. 스위트피는 오래전 친구를 위한 어떠한 기도도 남기지 않았다. 지금 스위트피의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은 하나뿐이었다.

‘끝났다.’

드디어 모든 것이 끝났다는 것.

그리고 새로운 시작이 열렸다는 것.

어느새 인간화한 리시안셔스는 디에고가 사라진 땅 위를 어루만졌다. 무심하지만 그 누구보다 선한 마음을 가진 제 드래곤은, 그를 배신했던 친구의 죽음을 안타까워하고 있었다.

스위트피는 그런 리시안셔스의 다정함을 좋아했으나, 동시에 두렵기도 했다. 저건 디에고가 죽었기 때문에 내보일 수 있는 안타까움이었다.

만약 리시안셔스가 모든 과거를 알고 자신을 마주 본다면…….

‘전처럼 날 다정하게 대해 주지 않을지도 몰라.’

이제 어린아이 대하듯이 아껴주지 않을 테고, 더는 ‘스윗’이라는 달콤한 애칭으로 불러주지도 않을 테다.

‘저 고린도만 없으면…….’

스위트피의 시선이 리시안셔스가 들고 있던 고린도로 향했다.

하지만 차마 저 고린도를 훔칠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이미 오래전 디에고가 그에게 고린도를 빼앗는 걸 도왔는데, 두 번이나 자신의 이기심 때문에 같은 실수를 반복할 수는 없었다.

『모든 게 끝났다.』

리시안셔스가 전투를 끝났다는 걸 확인시켰다. 하지만 그렇다고 정말 모든 게 끝이 난 건 아니었다. 아직도 반려를 건 드래곤들의 전쟁은 끝나지 않았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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