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를 기억해 주세요-112화 (112/120)

<112화>

『네 눈에 난 흉터 자국도 내가 만들어 줬다는 거, 잊은 건 아니겠지?』

디에고는 괴로워하면서도 입이 찢어지게 웃으며 낮게 속삭였다.

아주 오래전 리시안셔스는 세레티에게 자신의 눈을 줘서 아름다운 금빛을 잃고 회색빛으로 변한 눈동자에 상처를 입은 적이 있었다. 디에고와 전투 중 미처 피하지 못한 탓에 눈가에 날카로운 흉터 자국이 남은 것이다.

드래곤의 치유력으로도 상처는 사라지지 않았다. 지금은 시간이 흘러 흉터 자국은 거의 희미해져 보이지 않았지만, 리시안셔스는 우연히 거울을 통해 제 상처를 마주 볼 때면 과거의 악몽을 마주하곤 했다. 그런데 디에고가 얼굴의 똑같은 자리에 또다시 상처를 입힌 것이다. 마치 과거의 악몽을 재현이라도 하려는 것처럼.

『이거 놔, 디에고!』

리시안셔스는 거의 뽑기 직전이었던 고린도를 놓았지만, 디에고는 리시안셔스를 놓아주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비늘에 박고 있던 발톱을 더욱 깊게 쑤셔 넣었다.

『절대 놔주지 않을 거야.』

디에고와 추락하며 난투를 벌이면서도 리시안셔스의 모든 신경은 절벽의 계단 위에 아슬아슬하게 있는 스위트피에게 향했다.

바로 그때였다.

스위트피와 디에고를 번갈아 바라보며 전투를 벌이느라 정신없던 리시안셔스의 눈에, 바닥으로 추락해 가는 스위트피가 보였다.

고린도로 인해 괴로워하고 있는 것이 눈에 보이는데도 놓아주지 않으려 하다니. 대단한 집착과 독기였다.

‘이대로 가다가는 스위트피가……!’

더 이상 시간을 끌 수는 없다. 더러운 수를 써서라도 디에고를 떼어 내야만 한다.

리시안셔스는 발톱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인간의 칼날보다 날카로운 발톱으로 독기로 가득한 디에고의 눈을 찔렀다.

푸욱! 푹!

발톱에는 피가 묻고, 비늘에도 피가 튀었다.

하지만 디에고는 리시안셔스를 놓아주지 않았고, 그만큼 리시안셔스는 디에고에게 잔인해졌다.

결국 패배를 선언한 것은 디에고였다.

디에고는 거의 반쯤 혼절하며 리시안셔스를 놓아주었다. 날개를 펼친 리시안셔스는 망설임 없이 추락하고 있는 스위트피를 향해 속력을 냈다.

그날 일어났던 화마의 기운이 남아 있는 대륙의 땅은 모든 걸 녹여 버린다. 인간의 몸이라 해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대로 스위트피를 놓친다면…….

바닥에 닿는 순간 스위트피는 죽는다.

『스윗……!』

하지만 리시안셔스는 스위트피에게 닿지 못했다. 디에고가 다시 리시안셔스의 발목을 붙잡아서나, 스위트피가 리시안셔스의 속도보다 빠르게 추락해서가 아니었다.

리시안셔스가 붙잡고 있다가 스위트피의 위기에 단숨에 놓았던 고린도.

아직 디에고의 몸에 박혀 있는 고린도가 힘을 펼쳤다. 순식간에 검은색 연기가 반려에게 날아가던 드래곤의 시야를 덮어 버렸다.

***

모든 건 아주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캔버스 위에 물감이 번지듯이 어둠 속에서 빛이 퍼져 나갔다. 어둠 속에서 퍼져 나간 빛은 아주 오래전의 기억을 그려 내기 시작했다.

『리시안셔스는 위대한 드래곤이야.』

그러나 리시안셔스의 기억은 아니었다.

『첫 번째 드래곤이자 모든 드래곤들을 통솔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이건…….

『지금이야 네가 좋다고 하겠지. 하지만 그 마음이 언제까지 갈까?』

‘디에고의 기억’이었다.

『리시안셔스는 널 사랑하는 게 아니야. 너랑 있으면 신기하고 새로우니까 느끼는 즐거움을 사랑이라고 착각하는 거지. 설령 그게 사랑이 맞다고 하더라도 오래가지 못할걸?』

디에고는 누군가에게 사악한 말을 속삭이고 있었다.

『그가 위대한 존재면 존재일수록 너와는 오래가기 힘들겠지.』

베일을 쓴 채 나무 앞에서 기도를 올리고 있는 여자에게.

『하지만 나처럼 보잘것없어진다면 평생 네 곁에만 있을 수 있겠지.』

자신의 첫사랑.

『어떡할래, 세레티?』

……세레티에게.

『내가 어떻게 하면 돼?』

제게 항상 조잘대던 소녀와 똑같은 목소리로 세레티가 디에고에게 물었다.

‘아마 이 과거는 디에고가 내게 일부러 보여 주려고 한 건 아니었겠지.’

디에고는 현재 고린도의 힘을 조절하지 못한다. 이건 그저 그가 조절하지 못하는 탓에 날뛰는 고린도의 힘일 뿐이다.

리시안셔스는 아직도 저 베일 너머의 얼굴을 알지 못했다.

그런데도 세레티를 사랑하게 되었다. 얼굴을 알지도 못하는 상대를 깊이 사랑하는 일이 가능하다는 것은, 그도 경험하기 전까지는 알지 못했다. 아니, 그 이전에 자신이 누군가를 사랑하게 될 것이란 상상도 해 본 적이 없었다.

리시안셔스는 세레티와 함께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그녀에게 스며들 듯이 사랑에 빠졌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처음부터 사랑에 빠졌던 것인지도 모른다.

이 세상 밖으로 나오기 전, 알 속에서 제게 재잘대던 그 목소리의 주인에게 스며들어 갔고…….

그 작은 몸에 얼마나 깊고 큰 불행을 지고 있는 것인지, 절벽 밑으로 뛰어내린 세레티를 구한 날.

그날, 확실하게 사랑에 빠졌다. 다만, 그때는 자각하지 못했을 뿐.

디에고와 함께 바닥으로 곤두박질친 고린도가 본래 주인의 무의식을 따라가는 것일까. 어둠 속에서 크게 그려져 있던 그림이 다시 새까맣게 덮이고, 그날의 밤 풍경을 그려 냈다.

리시안셔스가 언제나 그리워하던, 세레티와 함께 있던 순간이었다. 모든 기억을 잃은 세레티는 첫 만남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은 그들이 다시 재회한 날이기도 했다.

베일로 얼굴도 가리고 말도 못 하는 척, 목소리마저 숨겼던 세레티.

‘나는 항상 과거를 생각했어.’

과거를 되돌릴 수 있기를 바랐다. 그러나 과거는 과거일 뿐, 되돌릴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과거의 상처는 현재의 자신이 이겨 내고 극복해야 하는 것이었다.

역설적으로, 그렇기 때문에 리시안셔스는 자신의 상처가 치유될 일은 영원히 없을 거라 생각했다. 과거의 상처를 이겨 낸다는 것은 세레티를 잊는다는 것인데, 리시안셔스는 평생 상처 입은 채 살더라도 그녀를 잊을 생각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미안해, 세레티.’

하지만 지금은 과거의 환영에 붙잡혀 있을 수 없다.

지나간 과거가 아닌, 바로 현재에 지켜야 할 존재가 있으니까.

이상하게 세레티를 향한 죄책감은 들지 않았다. 이미 죽은 사람이고 과거의 환영일 뿐이라 하더라도, 세레티를 뒤로하려는 자기 자신이 나쁘게 느껴지지 않았다.

꼭, 세레티를 뒤로하지 않은 것처럼.

그녀에게 가고 있는 것처럼.

어둠이 걷히고 리시안셔스는 환영에 갇히기 직전, 바로 그 순간에서 다시 움직일 수 있었다. 마치 그가 과거에 갇혀 있는 동안, 현실 세상의 시간은 멈춰 있기라도 했던 것처럼.

『스윗!』

리시안셔스는 스위트피의 앞까지 날아갔다.

“…….”

『…….』

서로 눈이 마주쳤다. 옛날에 세레티를 구할 때 그녀와 눈이 마주친 것처럼.

베일 속에 얼굴이 가려져 있었지만, 이상하게 세레티가 자신을 보고 있을 때면 본능적으로 그 시선을 알아차리고는 했다.

세레티와 있었던 일이 스위트피를 통해 재현되고 있었다.

‘……어쩌면.’

애써 뒤로 밀어 두었던 가능성이 떠올랐다. 하지만 이번에도 그 가능성에 대한 생각을 뒤로 미룬 리시안셔스의 두 발이 스위트피의 몸을 낚아챘다. 날카로운 발톱이 혹여 스위트피의 몸을 다치지 않게 조심하며.

절벽 위에 스위트피를 내려놓은 리시안셔스는 인간화로 변해 다친 곳은 없는지 작은 몸을 이리저리 살폈다.

“리, 리시안! 괜찮아요?”

하지만 걱정하면서 상대의 모습을 살피는 건 리시안셔스뿐만이 아니었다.

“아까 디에고와 같이 아래로 떨어질 뻔했는데……. 괜찮은 거예요? 다친 곳은 없어요? 어디, 아픈 곳은……. 아! 리, 리시안! 눈이, 눈이……!”

“안다. 디에고가 발톱을 휘둘러서 조금 다친 거뿐이야.”

눈가에 난 흉터를 보고 스위트피가 방방 뛰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하필 과거에 상처가 났던 부위를 또 공격한 것은 가히 악질적이라 화가 나긴 했지만, 분노를 조절하는 건 리시안셔스에게는 익숙한 일이었다.

반려가 죽고도 혼자 이 긴 생을 살아야 했던 리시안셔스는 언제나 화가 나 있었기 때문이었다.

“네가 날 걱정할 때가 아닌 거 같구나.”

“네? 왜, 왜요?”

“스윗, 넌 하마터면 죽을 뻔했어. 내가 잡지 못했다면 저 아래로 떨어져 죽었을 테지. 뼈가 으스러져 죽거나, 땅의 열기에 녹아내려 죽거나.”

이젠 다 커서 스위트피가 주장하는 대로 ‘꼬맹이’라 부르기엔 성숙한 외향이지만 그래도 아직도 아이 같은 면이 있는 스위트피는 또 뻔뻔하게 대꾸할 것이다.

리시안셔스가 구해 주러 올 것이라고 믿었다고.

리시안셔스는 다 커서도 아이 같은 구석이 있는 스위트피를 귀엽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지금같이 위험한 상황에서까지 스위트피의 그런 능청맞은 태도를 받아 줄 생각이 없었다.

따끔하게 야단치고 다른 드래곤들의 반려가 있는 신전의 지하로 어서 돌려보낼 생각이었다.

그런데, 지금 스위트피의 반응은 리시안셔스가 예상한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죄송해요.”

평소의 알던 스위트피의 모습이 아니었다.

“리시안셔스가 위험에 빠졌다는 생각이 드니까 마음이 조급해졌어요. 어떻게든 도와주고 싶어서, 그래서…….”

“디에고는 네게 집착하고 있어. 그러다가 심장이라도 뽑혔으면 어쩌려고.”

“민폐를 끼치려는 건 아니었어요.”

“……스위트피.”

“정말 죄송해요. 저는 항상 리시안셔스에게 도움은커녕……. 아니, 저 때문에…….”

“스윗.”

본인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긴 하는 걸까.

반쯤 넋을 놓은 채 횡설수설하는 스위트피를 부드럽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부르자, 멍해 보이던 스위트피의 눈동자에 천천히 초점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리시안.”

분명 이 모습은 평소의 스위트피와는 거리가 먼 모습이었다. 이렇게 주눅 들어 있는 모습은 외려, 그가 예전에 알던 다른 사람과 닮아 있었다.

애써 뒤로 밀어 놓았던 가능성이 자꾸만 수면 위로 떠올랐다. 그러나 리시안셔스는 다시금 그 가능성을 수면 아래로 밀어 넣었다.

두려워서가 아니었다. 부정하고 싶어서도 아니었다.

지금은 진실을 마주 볼 때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직 처리해야 할 일이 있었다.

“신전 안으로 돌아가 있어. 나는 디에고만 처리하고…….”

“가, 같이 가요……!”

“…….”

“부탁이에요, 리시안셔스…….”

스위트피가 리시안셔스의 옷깃을 붙잡은 채 간곡하게 부탁했다.

차라리 평소처럼 뻔뻔한 태도로 구는 거면 엄하고 단호하게 굴 수 있을 텐데.

저렇게 안쓰러운 태도로 잔뜩 주눅 들어서 간절하게 매달리는 모습을 보면…….

뭐든 들어주고 싶은 충동이 들고는 했다.

“디에고를 봐야겠어요”

리시안셔스가 말없이 스위트피를 응시했다. 아직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금방이라도 단호하게 안 된다고 할 거 같았다. 스위트피는 다급하게 말을 덧붙였다.

“그냥……. 제 나름대로 디에고를 만나야 하는 이유가 있어요.”

“당연히 내가 허락하지 않을 것도 알겠지.”

“부탁할게요. 최대한 폐가 되지 않도록 노력할 테니까…….”

리시안셔스의 반대에도 무언가를 하고 싶을 때면 언제나 두 눈을 똑바로 쳐다본 채 능글맞고 뻔뻔하게 굴던 스위트피였는데…….

학대받던 시절의 아이처럼, 또는 리시안셔스가 아는 어느 한 여자처럼. 주눅 든 채 부탁하는 모습을 보자, 애달픈 마음에 단호한 태도를 보여 주기 힘들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