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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기억해 주세요-111화 (111/120)

<111화>

쿠웅! 쿵! 쿵! 쿵!

“허억……!”

계속되는 굉음과 함께 스위트피는 마침내 과거의 기억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었다. 심상치 않은 굉음에 단번에 눈치챌 수 있었다. 바깥에서 벌어지고 있는 드래곤들의 전쟁이 심각해지고 있다는 것을.

아직 보지 못한 과거가 있지만, 지금은 뒤로 미뤄도 괜찮다. 어차피 과거를 통해 얻으려던 건 어떻게 해야 드래곤들의 전쟁을 멈출 수 있을지에 대해서다.

무조건적으로 확신할 수 있는 건 없지만 그래도 과거를 통해 정답에 근접해진 거 같았다. 특히나 마지막에 땅의 진동과 함께 엉망으로 뒤섞인 과거의 단편적인 기억 중 하나를 통해서 무언가 답을 얻은 기분이었다.

‘리시안, 무슨 일이에요?

스위트피는 바깥에 있을 리시안셔스를 불렀다.

‘리시안?’

그러나 리시안셔스에게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없었다.

“……리시안.”

불길함을 느낀 스위트피는 신의 정원 바깥을 향해 달려갔다.

신의 정원을 지키는 바위문은 스위트피를 삼키기라도 한 것처럼 굳게 닫혀 있었지만 정작 달려오는 발소리가 가까워지자 너무나 쉽게 다시 문을 열어주었다.

“리시안!”

아슬아슬한 나선형 계단으로 다시 나온 스위트피가 본 것은 저 멀리서 떨어지는 한 마리의 드래곤이었다.

“리……시안……?”

검은색 드래곤이 아래로 추락하고 있었다. 정확히는, 회색 드래곤과 한 몸처럼 엉겨 붙어 나란히 추락하는 중이었다.

“아, 안 돼……!”

스위트피의 두 발은 계단 위로 분주하게 올라갔다. 계단을 내려가 봤자 모든 걸 녹아내리게 할 만큼 뜨거운 땅 위에서는 리시안셔스를 도울 수 없었다.

“리시, 리시안!”

하지만 이제는 익숙해져서 종종 잊고 마는 사실이 있었다. 그건 자신이 다리를 전다는 사실이었다.

“앗……!”

왼쪽 무릎의 통증과 함께 몸이 뒤쪽으로 기울었다.

물에 빠진 사람처럼 팔을 허우적거렸지만, 아무것도 잡을 곳이 없는 가파른 계단에서 스위트피는 결국 무력하게 뒤로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윽……! 읏!”

간신히 두 팔로 머리를 감싸 보호하기는 했지만 이미 가속이 붙어 구르기 시작한 몸을 멈춰 세우는 것과는 별개의 일이었다. 더욱이 절벽을 둘러싼 계단은 나선으로 이뤄져 있었다. 스위트피의 몸은 난간이 없는 계단 바깥으로 구르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전처럼 운이 좋게 자신의 몸을 멈추지 못했다. 그대로 가녀린 몸뚱이가 절벽 밖으로 향했다.

몸을 긁고 찌르는 고통은 없었지만 아득한 추락감이 스위트피를 덮쳤다.

***

『칼루스, 내려가서 아케르트를 지켜.』

디에고를 돕던 다른 드래곤들을 간신히 처치한 지금, 리시안셔스는 자신이 유리한 지점을 차지했음에도 굳이 칼루스를 아래로 내려보냈다.

아케르트를 위해서였다.

그녀가 죽든 말든 내버려 두고 싶지만, 또 그러고 싶지 않은 마음이기도 했다.

사실, 자신을 죽이고 싶어 하는 살기로 가득 찬 디에고를 앞에 두고 칼루스를 내려보내는 것은 썩 내키는 선택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리시안셔스가 칼루스를 내려보낸 것은 날개가 찢긴 아케르트를 보호해야 한다고 판단을 내렸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위험해질 것을 감수하면서 아케르트를 보호하려는 건, 그녀가 제게 특별하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 누구도 쉽게 손잡아 주지 않을 동맹을 받아들여 준 그녀를 향한 작은 의리라고 할 수도 있겠다.

정작 진짜 친구라 여겼던 자에게는 처참하게 배신당했고, 그 배신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지만.

『제발 죽어!』

디에고가 다시 리시안셔스에게 달려들었다.

더 이상 기다란 나무도 자라지 않고, 한때 이 대륙에 자연과 조화롭게 섞여 있던 화려한 건축물들도 모두 사라져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들은 건축물의 지붕이나 앙상한 나뭇가지에 처박히며 탁 트인 하늘에서 서로 뒤엉켜 데굴데굴 굴렀다.

디에고가 고린도를 소환하게 해야만 한다. 의도적으로 고린도를 쓰지 않고 있는 디에고가 조금 불리해졌다고 쉽게 고린도 소환할 리 없다. 하지만 리시안셔스는 그 누구보다 디에고를 잘 알았다.

『왜 고린도를 쓰지 않지?』

『그런 거 없이도 널 이길 자신이 있으니까!』

그를 친구로 여겼을 때는 그에 대해서 알지 못했으나,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된 지금은 그에 대해서 누구보다 잘 알 수밖에 없었다.

생각하는 것조차 지쳐서 그저 눈을 감고 생각하지 않으려 노력했고, 결국 리시안셔스는 한없는 무기력함에 잠긴 채 살아가게 되었다. 하지만 그렇게 되기 전에, 그는 생각하고 또 생각해야 했다.

막을 수는 없었는지…….

되돌릴 수 없는 일에 대한 미련과 후회로 생각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가.

그리고 디에고에 관련해서는 이미 결론을 내린 터였다.

『내 고린도까지 차지해 놓고도, 넌 아직도 열등감에서 벗어나지 못했어.』

굳이 빙빙 돌려서 그를 자극할 필요는 없을 듯했다.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말하는 것이 디에고의 치부를 더 확실하게 건들 길이었다.

『고린도를 빼앗긴 무능한 드래곤 주제에!』

오랫동안 품고 있던 자격지심이 그 상대의 입을 통해 수면 위로 드러나자 디에고는 완전히 광기에 휩싸인 것처럼 리시안셔스에게 달려들었다.

『연인에게 배신당한 너 따위에게 내가 열등감을 느낄 이유가 어디 있다고 감히 그런 소리를…….』

광기에 잠긴 자의 공격은 아주 맹렬했고, 그만큼 감당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그만큼 공격의 패턴을 간파하기 쉬웠다. 리시안셔스는 최대한 힘을 뺀 채 디에고의 공격을 가볍게 튕겨내기만 했다.

『그러게. 나야말로 묻고 싶은데.』

그러면서도 입은 쉬지 않고 디에고를 자극했다.

『어째서 다 잃은 내게 아직도 자격지심을 버리지 못하는지. 그리고…….』

디에고는 교활하면서 단순했다.

리시안셔스는 친구라 믿었던 자의 단순함은 알지만 교활함은 눈치채지 못했다. 그것이 배신을 눈치채지 못하고 패배한 원인이었다.

『쓰지도 못할 고린도를 왜 가져갔는지도.』

열등감은 디에고의 교활함을 더욱 각성시켰지만, 이성이 마비된 지금 그의 열등감은 열등감을 더욱 심화할 뿐이었다.

리시안셔스를 의식한 디에고의 이마 위로 점점 검은 뿔이 솟아나기 시작했다. 결국 도발에 넘어온 디에고가 내내 쓰지 않고 있던 고린도를 소환한 것이다.

『그렇게 원한다면 널 다시 과거의 지옥 속으로 보내 주지.』

고린도가 가지고 있는 힘은 많았지만 그중에서 가장 대표되는 힘은 과거의 환상을 보여 주는 힘이었다.

가능하다면 가장 가까이에 있는 타인의 과거를, 그리고 본인의 과거를.

마치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인 것처럼 그 시절에 살게 했다. 리시안셔스가 고린도를 잃고 가장 안타까워했던 건 바로 그 힘 때문이었다.

고린도만 있었다면 그 아이를 잃기 전의 기억 속에 기꺼이 갇혀 살 수 있었을 텐데…….

어쩌면 지금도 그런 마음이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리시안셔스는 자신이 있었다. 디에고가 능력을 쓴다고 하더라도 이겨 낼 자신이.

왜냐하면 바로 지금 이 현실 속에, 그가 지켜야 할 반려가 있으니까.

하지만 이 모든 건 어디까지나 디에고가 능력을 사용할 수 있을 때의 얘기였다.

그러니까, 디에고가 고린도의 힘을 쓸 수 있을 때의 이야기지만…….

『크으…….』

고린도에서는 검은빛이 흘러나왔지만 그뿐, 아무런 힘도 발현되지 않았다.

리시안셔스는 발톱이 잔뜩 솟아 있는 앞발로 디에고의 머리에서 검은 연기만 뿜어대는 고린도를 붙잡았다.

그 순간, 디에고는 고통에 가득 찬 비명을 내질렀다. 온 세상을 울릴 듯한 날카로운 소리였다.

하지만 고통스러운 건 디에고뿐만이 아니었다.

‘뜨거워……!’

고린도를 붙잡은 앞발이 뜨거웠다. 고통스럽고 달갑지 않은 감각이었다. 그러나 이것만은 확신할 수 있었다. 고린도가 리시안셔스를 거부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아주 오랜 시간 동안 떨어져 있었던 주인의 몸속으로 서둘러 돌아가고 싶어 하는 것을 느꼈다.

고통에 잠긴 디에고는 날갯짓을 멈췄다. 그는 고통에 허우적거리느라 날갯짓을 할 생각조차 못 하는 듯했다.

그러나 바닥으로 추락하면서도 전투를 치르느라 엉켜 붙은 리시안셔스의 비늘에 발톱을 박아 넣으며 절대 놓아주지 않으려 기를 썼다. 리시안셔스도 기꺼이 그런 그에게 어울려 주려 했다.

‘스위트피가 나오기 전에 이 싸움을 끝내야 해.’

기이할 정도로 스위트피에게 집착하는 디에고였다. 자신의 반려를 가지면 신이 용서해 주고 진정한 드래곤이 될 수 있을 거라 믿고 있으니 말이다. 그래봤자 디에고의 말대로 자신은 고린도를 잃은 드래곤에 불과한데 말이다.

마치 꼭 자신의 반려라서가 아니라 스위트피, 그 자체가 특별한 존재라도 되는 것처럼…….

‘……말도 안 되는 생각이야.’

리시안셔스는 자신의 머릿속에 드는 헛된 생각을 지워 내며 현재 혼자 있을 스위트피를 생각했다.

스위트피가 신의 정원에 들어간 건 어찌 보면 잘된 일이었다. 완벽하게 밀폐된 공간에 홀로 있는 것이 걱정될 뿐, 그곳만큼 안전한 곳도 없을 테니까.

하지만 예고도 없이 신의 정원을 찾아 들어간 것처럼, 언제 나올지 모를 일이었다. 그 전에 디에고를 죽여야 한다.

어차피 이미 기울어진 싸움이었다.

고린도를 쥔 리시안셔스의 손에 더욱 힘이 들어갈 때였다.

“리시, 리시안!”

저 멀리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스윗?!’

리시안셔스의 시선이 반사적으로 스위트피에게 향할 때였다.

카아아악!

또 한 번 드래곤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이번엔 디에고가 아닌, 리시안셔스가 낸 소리였다. 디에고가 리시안셔스의 왼쪽 눈에 손톱을 박아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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