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를 기억해 주세요-110화 (110/120)

<110화>

“저는 첫 번째 인간이잖아요…….”

세레티는 신과 유일하게 소통할 수 있는 나무에 대고 빌었다.

“근데 왜 저는 완전하지 않나요? 왜 첫 번째로 태어나지 못한 인간들보다 불완전해요? 왜 그들이 아니라 저예요?”

태어나 처음으로 한 원망이었다. 하지만 언제나 세레티의 부름에 응답해 주던 신에게서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어두운 밤에, 리시안셔스를 처음 만났던 절벽 위에는 거센 파도 소리와 함께 바람이 불어왔다. 그 덕분에 울음소리가 묻히고 있으니, 다행인 일이었다. 자신을 내심 무시하는 신전 사람들에게 울고 있는 모습을 들키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휘이이이 - .

그러나 점점 불어오는 바람이 거세지고…….

세레티는 왜인지 익숙한 느낌을 받았다.

고개를 들자 먹구름이 바람을 따라 흘러가고, 달빛이 드러났다. 그러나 달빛은 다시 구름에 의해 가려졌다.

‘구름……?’

그러나 세레티는 이윽고 구름이 흘러가는 방향을 보고 지금 달을 가린 것이 구름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

검은 드래곤이 그 눈을 닮은 달을 가린 채 지상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세레티는 리시안셔스를 처음 만났던 그 날처럼 베일을 꼭 붙잡았다.

얼마 안 가 인간형인 두 발이 세레티의 시선 끝에 닿았다. 올려다보지 않아도 그가 리시안셔스라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알면서도 섣불리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만약 리시안셔스가 새삼스럽게 왜 다시 베일을 썼냐고 물어보면 어떡하지. 벗으라고 하면 그때는…….

“왜 울어?”

세레티의 복잡한 생각이 멈춰진 것은 여상한 리시안셔스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나서였다.

“왜 우냐고.”

아니다. 여상하지는 않았다. 그는 지금 굉장히 심기가 언짢은 듯 보였다. 파도와 바람 소리가 거세서 자신의 흐느끼는 소리는 묻힌 줄 알았는데. 멀리서부터 날아오던 그가 눈치챌 정도면 아니었나 보다.

‘에리카는 그동안 리시안셔스와 수도 없이 많은 대화를 나누었을 텐데…….’

괜히 자신이 목소리를 냈다가 에리카와 달라서 그가 눈치채게 된다면 어떡해.

내심 그가 다시 에리카가 아닌 자신을 찾아 주길 바랐으나, 막상 이 순간이 다가오자 두려움만이 엄습했다. 누가 뭐라고 해도 다른 인간들과는 다르게 흉측하게 생긴 자신의 얼굴을 보여 주기는 싫었다.

“울고 싶은 건 나인데, 대체 왜 네가 울어.”

그는 이번에도 알 수 없는 소리를 했다. 리시안셔스가 왜 울고 싶었다는 걸까.

그는 눈물을 흘릴 이유가 없을 텐데.

오히려 한창 행복할 때가 아닌가.

그가 바라던 대로 자신의 얼굴을 보여 줬고, 목소리도 들려줬고, 이름도 알려 줬을 테니까…….

“이제 못하겠어.”

“…….”

“그러니까 이제 그만하자.”

……대체 무엇을?

“내가 잘못했어, 세레티.”

베일 속 세레티의 눈이 커졌다. 그녀는 눈동자만 치켜올려 리시안셔스의 표정을 살폈다.

그제야 리시안셔스가 아주 괴로운 표정을 짓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제 이름을……. 어, 어떻게…….”

“지금 그게 중요해? 난 너에 대해서 생각보다 많은 걸 알아. 어쩌면 네 자신보다 너에 대해서 더 많이 알걸. 그 망할 베일 속에 숨겨진 예쁜 얼굴만 아직 모를 뿐이지.”

“…….”

“네가 나한테 네 자신을 숨김없이 보여 주길 바랐어. 누구의 강요도 아닌 네가 스스로 자신감을 얻고 다 드러내 주길 바랐는데…….”

빛이 바래지 않고 선명한 금안에 물기가 어렸다.

눈물이란 위대한 존재가 내보일 만한 것이 아니지만, 그는 한낱 인간 때문에 눈물을 글썽였다. 눈물을 참기 위해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있는 모습이 잔뜩 토라진 소년 같아 보이게 했다.

“이제 됐어. 내 욕심이 과했다는 걸 인정해.”

이번에도 똑같이, 무엇도 잘못하지 않은 리시안셔스가 제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했다.

“그러니까 제발 다른 여자를 너인 척 보내는 짓 좀 그만해. 이제 장단 맞춰 주기 힘드니까.”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거예요…?”

“장난해? 내가 말했잖아. 난 네 얼굴 빼고 너에 대해서 다 안다고.”

그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지자 세레티가 무릎 위에 쥐고 있던 자신의 두 손에 힘을 줬다. 그 모습을 본 리시안셔스가 외려 큰 잘못을 저지른 것처럼 어깨를 움찔, 떨었다.

“……미안해. 화낸 거 아니야. 나는 단지…….”

“…….”

“그냥 네가 보고 싶었어.”

한숨과도 같은 말이었다.

“네가 다시 용기를 내서 나한테 와 줄 때까지 속는 척하려고 했는데…….”

그는 마치 변명이라도 하는 것처럼 두서없이 중얼거렸다.

“그 꽃. 맞아. 그 꽃 말이야. 꽃에 내 이름을 지었다며. 날 생각하면서 이야기도 지어냈다며. 그럼 그런 건 네가 직접 들려줘야지. 어떻게 그런 거까지 네 대타한테 시켜? 설마 진짜로 평생 대타한테 연기시키고 날 안 볼 생각이었어?”

“…….”

“아니지? 너는 날 안 봐도 상관없어?”

세레티는 생각했다.

만약에 내가 리시안셔스라면?

내 눈 한쪽을 내어 줄 정도로 헌신을 다한 상대가 대타를 내보내며 자신을 기만했다면?

“화……, 안 났어요?”

화를 내야 정상 아닌가.

리시안셔스는 대체 어떻게 이 순간마저도 다정하지.

“화는…….”

“…….”

“나긴 났어. 근데 아주 조금, 약간 난 거뿐이야. 아니, 아니지. 생각해 보니까 별로 안 난 거 같기도 하고…….”

베일을 써서 얼굴도 보이지 않을 세레티의 눈치를 살피던 리시안셔스가 한숨을 쉬며 아주 느릿한 걸음으로 세레티에게 다가왔다. 초식동물에게 접근하듯이 조심스러운 몸짓이었다. 조금이라도 상대를 놀라게 하거나 겁먹게 하지 않으려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정작 그가 세레티를 두렵게 한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말이다.

“나는 속상했던 거야. 근데 그렇게 날 속이는 게 네가 널 지키는 방법이었다면…….”

“…….”

“그럼 괜찮다고 생각했어. 적어도 네 마음은 다치지 않은 거니까.”

“…….”

“근데 왜 울었어?”

기만당하고 상처 입은 리시안셔스가 자신의 바닥을 보이고 나서야 세레티도 무너져 내렸다.

“미안해요…….”

밑바닥이라고 하기에는 리시안셔스가 가진 마음은 부드럽고 선했으나, 외려 그것이 세레티의 마음을 부드럽게 녹였다.

“저도 리시안셔스를 속이고 싶지 않았어요. 리시안셔스가 본 나 자신이 괜찮은 사람이길 바랐어요……. 근데 저는 다른 사람들에 비하면 너무 모, 못생겼고……. 흑…….”

“…….”

“리시안셔스는 괜찮다고 하지만, 보여 주기 싫었어요……. 나는 첫 번째 인간이지만 사람들은 저같이 불완전한 존재를 싫어해요……. 인간들 중에 첫 번째로 태어난 내가 이렇게 불완전하면 다른 사람들이 우리 종족에 대한 자부심을 가질 수 없대요……. 그래서 늘 에리카가 제 이름을 달고 나가요. 에리카는 아름답고 모두가 좋아하고, 두 번째로 태어났지만 저와는 다르게 완전하니까……. 그래서 리시안셔스도, 저보다 에리카를 더…….”

그동안 말하고 싶었지만 참았던 설움을 빠른 속도로 쏟아냈다.

“다시 태어나고 싶어요. 결함을 가지고 있어도 당당해질 수 있는 사람으로…….”

나 자신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사람으로 태어나고 싶다.

그래서 누군가를 상처 주지 않고 사랑할 수 있는 사람으로.

“그렇게 울면 내가 정말 속상해지는데…….”

세레티는 우느라 고개를 들 수 없었지만 유독 무겁게 잠긴 리시안셔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난 또 내 고백이 부담스러워서 피하는 줄 알았지.”

그러나 특유의 장난기는 어디 가지 않았다.

세레티는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니에요! 놀라기는 했지만 부담스럽진 않았어요!”

“그럼 좋았어?”

“네, 네!”

“아, 그래? 그건 몰랐는데.”

“…….”

어두워졌던 분위기가 조금은 나아졌다.

리시안셔스가 킥킥, 거리며 짓궂게 웃었다. 얼결에 한 대답이기는 했지만 무르고 싶진 않았다.

“그렇구나. 너도 날 사랑했구나.”

“……네.”

세레티가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도 장난으로 세레티를 골리려던 리시안셔스는 너무 순순한 대답에 외려 당황했다.

“……진짜로?”

“저도……. 사, 사랑해요!”

세레티가 아예 쐐기를 박았다.

기만당해 화를 내야 마땅한 드래곤은 화를 내기는커녕, 얼굴도 보이지 않은 채 내뱉는 사랑 고백에 결국 무너져 내렸다.

턱이 들렸다.

얇은 천을 사이에 두고 입술이 맞물렸다.

비록 세레티는 아직 자신의 모습을 숨긴 채였고, 아무것도 달라진 건 없었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서로의 숨결을 느끼기에는 충분했으므로.

***

쿠웅!

굉음과 함께 땅이 울렸다.

“으윽!”

순간 세레티의 머릿속에서는 차례대로 보이던 기억이 복잡하게 섞여 순식간에 눈앞을 어지러이 스쳐 지나갔다.

달빛 아래 두 남녀가 입을 맞추던 아름다운 풍경이 바뀌었다.

디에고가 힘들어 보이는 세레티에게 무언가를 속삭이고, 드래곤들의 폭동…….

불에 타버린 숲과…….

「왜 그랬어?」

리시안셔스의 원망.

「제 어리석음을 되돌릴 방법은 없겠죠.」

지금 이 신의 정원 앞에서 잔인한 방법으로 목숨을 끊는 세레티가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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