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리시안셔스를 실망시키지 않았으니까, 그걸로 괜찮아.’
리시안셔스가 에리카를 자신으로 생각하고 만족한다면, 자신도 괜찮았다.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세레티는 자신의 선택을 후회했다. 에리카는 리시안셔스의 곁에 있을 수 있는데, 이제 자신은 그의 곁에 있을 수 없었다. 진실을 모르는 리시안셔스는 만족스러워 보였지만 자신은 아니었다.
『세레티.』
“……응.”
『나는 너처럼 신과 자주 소통하진 못해. 그러기엔 나는 신에게 특별한 존재가 아니거든.』
세레티는 디에고의 말을 한 귀로 들으며 눈앞의 있는 꽃을 어루만졌다. 자신이 이름을 ‘리시안셔스’라고 지은 꽃이었다. 이 꽃에 관한 꽃말과 이야기를 정리하느라 집중하지 못하는 세레티를 알면서도 디에고는 묵묵하게 제 할 말을 이어갔다.
『그런데 신께서 딱 한 번 내게 그러셨어. 불완전한 존재들은 서로를 만나 부족한 것을 채워 주며 완전해지는 것이라고. 그때부터 인간들의 세상에는 ‘반려’라는 개념이 생겨났지.』
신은 아주 천천히 이 세상에서 손을 떼고 있었다. 이제 지상에 내려오는 신을 만날 수 없게 된 지는 벌써 몇백 년이 지났다.
『인간들끼리 서로가 서로를 사랑해서 짝을 짓기 시작했어. 최근 들어서는 신이 아니라 인간들끼리 자손을 번식해 새로운 인간을 만든다더군. 그러니까 신은 인간들에게 생명을 만들 수 있는 축복을 주신 거지.』
이때까지만 해도 세레티는 디에고의 말에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그리고 신께서는 내게 이런 말씀도 남기셨어. ‘나의 소중한 아이가 너를 사랑하게 되면 너는 충만해질 것’이라고.』
“…….”
『어쩌면 너와 나는 신이 정한 안배한 인연일지도 몰라.』
“그게 무슨 뜻이야?”
깃펜으로 책 속의 글을 정리하던 세레티가 정확하게 초록색 눈동자를 디에고에게 응시하며 물었다.
『너는 불완전하잖아. 그 눈도 리시안셔스의 덕분이지, 네가 가지고 태어난 것은 아니야.』
“…….”
『너는 불완전하고 나도 불완전해. 그리고 신께서는 그분의 소중한 아이가 날 사랑하면 내가 충만해진다고 했어. 그러니까…….』
“그 말인즉슨, 내가 널 사랑하면 네가 완전한 드래곤이 될지도 모른다는 말이야?”
조금 예민해진 세레티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하지만 자신의 예민함을 차치하고서라도, 디에고의 말은 상대를 기분 나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나도 처음에는 헷갈렸어. 한낱 인간과 드래곤이 반려로 이어진다는 건 말이 안 되잖아? 아무리 내가 불완전하게 태어났다고 해도 말이야! 하지만 너는 신과 주기적으로 소통이 가능한 ‘첫 번째 인간’이고, ‘첫 번째 드래곤’인 리시안셔스는 널 사랑하고 있어.』
“그 말은 하찮은 인간이지만 드래곤과 이어질 만한 가치를 증명했다는 소리가 하고 싶은 거지?”
드래곤의 오만함은 불완전하게 태어난 드래곤에게도 예외가 없었다.
“못 들은 걸로 할게.”
『어째서?』
“어째서냐고? 이유는 간단해, 디에고.”
세레티는 디에고를 여전히 친구라고 생각했다.
“난 너의 불완전함을 채워 주기 위한 도구가 아니야.”
그렇기 때문에 그의 불쾌한 발언은 용서해 줄 수 있었지만 실망감은 어쩔 수가 없었다. 책을 챙긴 세레티는 그대로 도서관을 나섰다.
‘디에고는 바보야.’
신과 오랫동안 소통해 온 세레티는 단번의 그 말씀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런데 신께서 딱 한 번 내게 그러셨어. 불완전한 존재들은 서로를 만나 부족한 것을 채워 주며 완전해지는 것이라고. 그때부터 인간들의 세상에는 ‘반려’라는 개념이 생겨났지.」
‘반려’는 인간들이 자신이 사랑하는 이를 신이 정한 운명이라 여기며 만든 단어였다. 그러나 신은 인간의 운명에 개입하지 않는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그러했다.
인간들은 자의적인 선택으로 누군가를 사랑하고 선택하며 인생을 함께한다. 신은 그런 그들을 축복하며, 수많은 자식으로 여기는 종족들이 스스로의 힘으로 완성된 세상을 살아갈 수 있도록 자손을 만들 수 있는 축복을 내려 준 거뿐이었다.
신이 디에고에게 그런 말을 하고 나서 인간들이 반려와 자식을 만들 수 있게 된 것은 우연일 뿐이었다.
‘불완전한 존재들은 서로를 만나 부족한 것들을 채워 주며 완전해진다.’
그것은 비단 디에고에게 한정된 얘기는 아니었다. 신은 그분이 만든 모든 자식들을 ‘불완전’하다고 여겼다.
드래곤과 인간, 그 외의 수많은 생명체들은 불완전했다. 그런 그들이 서로 어울려 살며 부족한 것을 채우면 완전해질 수 있다 말한 것이다. 신께서는 어째서 그 말도 제대로 받아들이고 이해하지 못한 디에고에게 저런 말을 한 것인지 모르겠다.
「신께서는 그분의 소중한 아이가 날 사랑하면 내가 충만해진다고 했어. 그러니까…….」
디에고는 정말로…….
정말로 바보야.
어쩌면 다른 이들이 말한 대로 아주 약간의 애정의 차이는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신은 그분이 만든 모든 피조물을 사랑했다.
신의 자식들.
인간들이 사랑할 수 있는 드래곤이 되면, 충만함을 느낄 거라는 뜻이다.
즉, 드래곤으로 태어났다는 오만함을 버리고 본분을 다하라는 것이다. 충만해진다는 것이 겉으로 보여지는 그의 불완전함이 채워진다는 것인지, 마음속의 번뇌가 사라진다는 것인지는 조금 헷갈리지만.
세레티는 디에고를 친구라고 여기기에 이런 생각을 하는 것조차 미안했지만…….
확신할 수 있었다. 디에고는 평생 신의 뜻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고.
‘어떻게 저럴 수 있지.’
자신은 디에고를 친구라고 여겼는데. 디에고는 자신을 본인의 불완전함을 채워 줄 도구처럼 품평해 온 것이 충격적이었다. 이런 배신감은 처음 느껴보는 것이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들었다.
‘내가 디에고를 한심하다 여길 자격이 있을까?’
자신도 어떤 의미로 보면 리시안셔스를 배신한 것이다. 그에게 끝까지 모든 것을 속였고 에리카를 내세워 자신을 숨겼다. 비록 아무것도 모르고 속은 리시안셔스는 만족하고 있다고 해도…….
자신을 위해서 희생한 그를 배신한 것과 다름없었다. 때마침 세레티의 시선에 저 멀리 분주하게 어디론가 이동하는 에리카가 보였다.
“에리카.”
다른 사제들의 시선을 피해 외출하려던 에리카가 세레티의 낮은 목소리를 용케 알아듣고 걸음을 멈췄다.
“리시안셔스에게 가는 중이니?”
“응. 하루가 멀다 하고 보자고 하셔서…….”
“……그렇구나.”
자신이 자초한 일이니 그 누구를 원망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세레티는 에리카에게 조용히 자신의 책을 넘겼다.
“이게 뭐야……?”
“그 책 안에 리시안셔스의 이름을 붙인 꽃에 관한 이야기를 만들어 봤어.”
“…….”
“나는 직접 들려주지 못하니까, 네가 들려줘.”
에리카는 별다른 말 없이 책을 챙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잠깐 서로에게 어색한 침묵이 돌았다.
에리카가 리시안셔스와 관계가 깊어질수록 이상하게 그들의 관계는 점점 더 어색해져 갔다.
아름다운 에리카는 사뿐사뿐한 걸음으로 세레티를 스쳐 지나갔다. 평소라면 리시안셔스를 만나러 나가는 것은 자신이었을 테지만, 지금 이 순간 그를 만나는 것은 에리카였고, 남겨진 사람은 세레티였다.
이제 세레티는 두 번 다시 리시안셔스의 앞에 설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자신의 어리석음과 흉하게 태어난 죄로 인해.
***
밤이 되었다. 에리카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계속 리시안셔스와 있는 걸까.’
언제까지? 밤새도록 함께 있으려고?
입술 안쪽 살을 깨물자 턱에 잔주름이 생겨났다. 괜히 눈물이 날 거 같은 기분에 세레티는 고개를 숙였다.
‘다 내가 선택해 놓고…….’
누구의 강요도 없이 모두 자신이 선택한 일이었다. 그 누구도 원망할 자격이 없었다. 혼자서 서러워할 자격조차도 없었다.
그걸 알면서도 자꾸 눈에서는 눈물이 차올랐다.
마음이란 얼마나 간사한지. 죄다 자신의 선택이므로 기꺼이 받아들여야 할 일인 것을 머리로는 알아도 마음은 그걸 받아들이지 못했다. 세레티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자신은 아직 이곳에 그대로였다.
리시안셔스가 자신의 눈 한쪽을 내어 줬을 때, 그는 무엇을 바랐을까.
아마도 거울을 보고 생각보다 흉측하지 않은 나의 얼굴에 자신감을 갖고, 그에게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길 바랐겠지.
하지만 자신은 그럴 수 없었다. 제 눈에 괜찮다고 해서 괜찮은 것이 아니었다. 남들의 시선이라는 것이 있으니까.
디에고는 자신의 얼굴이 흉하다고 했다. 같은 드래곤인 디에고가 그렇게 말할 정도면 리시안셔스의 생각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결국 자신은 그가 큰 희생을 치를 가치가 없었던 것이다.
희망을 가졌지만 결국 진실을 깨달은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제까짓 것에게 큰 희생을 치른 리시안셔스가 실망하지 않도록 자신을 숨기는 일이었다.
자신은 아직도 타인에게 얼굴을 보이지 않도록 베일을 꼭꼭 쓴 채 아직 이 자리에 남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