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리, 리시안……셔스…….”
온몸의 뜨거운 기운이 감돌았다. 그리고 마치 모든 에너지를 빼앗기는 것처럼, 혹은 모든 강렬한 에너지를 받고 있는 것처럼, 온몸이 꼼짝할 수 없었다. 세레티는 자신의 새카만 세상에 점점 윤곽이 잡히는 걸 느끼며 눈을 감았다.
“말을 못 한다더니.”
쓰러지기 직전에 들은 것은 그의 짓궂은 타박이었다.
“순 거짓말쟁이.”
앞으로 고꾸라진 몸을 받아 준 것은, 몸속에 흐르는 열기를 전해 준 드래곤이었다. 세레티는 그로부터 아주 긴 어둠을 맞이했다.
자신의 지금껏 겪어 온 어두운 세상보다 더 짙은 어둠이었다. 그것은 꿈이 존재하지 않는 완전한 수면이었다. 그러나 어두운 밤이 영원하지 않은 것처럼, 세레티의 어두운 세상에도 종말이 찾아왔다.
“…….”
끔뻑이는 시야로 찾아온 것은 베일을 안으로 스며들어온 붉은 노을빛이었다.
그리고…….
“일어났어?”
여상한 리시안셔스의 목소리에 세레티는 몸을 벌떡 일으켰다.
“리, 리시안셔스! 괘, 괜찮아요? 설마 눈을……. 당신의 눈을 저한테 준 거는…….”
“그동안 말하고 싶은 걸 어떻게 꾹 참았어?”
“…….”
“말 잘하네.”
리시안셔스는 아마 자신이 말을 한 것에 놀라 세레티가 다시 입을 다물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세레티가 말을 하다 말고 입을 다문 것은 그런 것 때문이 아니었다.
“듣기 좋은 목소리야.”
언제나 빛나는 눈동자만 보이던 그의 완전한 얼굴을 처음으로 보았기 때문이었다. 리시안셔스는 아름다운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자신의 어두운 시야와 똑같은 흑발에, 소년과 청년의 언저리에 있는 희고 아름다운 얼굴……. 그리고 아름다운 한쪽 금안과, 이제는 빛을 잃어버린 한쪽 눈동자.
“눈이…….”
세레티가 멍하니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자 리시안셔스가 지나치게 당황하며 회색빛이 되어 버린 한쪽 눈을 가렸다.
“아……. 미, 미안해. 보기 좀 그렇지?”
이제 자신의 외적인 것을 부끄러워하는 건 리시안셔스였다. 정작 그는 한쪽 눈을 잃고도 여전히 아름다운데 말이다.
세레티는 고개를 저으며 아래로 푹 숙였다.
솔직히 조금…… 혼란스러웠다.
“더 기다려 줄게.”
“…….”
“돌아가면 거울에 비친 네 얼굴을 꼭 봐. 네 생각보다 흉측하진 않을걸?”
고마운데, 미안하고.
미안한데, 고맙고.
슬픈데, 기쁘며
기쁘지만, 슬펐다.
그리고 이해가 되지 않았다.
“왜 이렇게까지…….”
자신은 한낱 보잘것없는 인간이었다. 그것도 완벽하게 태어나지도 못한 존재였다. 그런 제게 왜 이렇게까지 하는 것일까.
제게 한쪽 눈을 내어 주고도 아직 자신의 이름은 물론이고 얼굴조차 보지 못한 리시안셔스가 정말 이상한 말을 들은 것처럼 한쪽 눈썹을 위로 치켜올렸다.
“설마 진짜 몰라서 묻는 건 아니지?”
“뭘요……?”
“……미치겠네.”
어쩌면 진작에 알고 있었으면서도 낮은 자존감으로 인해 부정하고 있었던 사실이 그의 입을 통해 확실해졌다.
“내가 너를 사랑이라도 하나 보지.”
“…….”
“인간들은 이런 걸 사랑이라고 한다던데…….”
그는 베일을 써서 얼굴이 보이지도 않을 세레티의 눈치를 흘끗, 보더니 결국 결심한 듯 자신의 발언을 정정했다.
“미안해. 창피해서 잠깐 실언했어.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아니지. 생각하고 결론을 내린 지는 아주 오래됐는데.”
“…….”
“그러니까, 내가 너를…….”
그 누군가에게 평생 들을 일은 없을 거라 생각했던 말이었다. 특히나 가장 위대하고 신성한 존재에게 들을 거라고는 상상조차 해 본 적 없었다.
“사랑하고 있어.”
사랑.
누군가가 제게 사랑을 말했다.
이름도 모르고 얼굴조차 본 적이 없는 상대를 사랑할 수 있을까?
아주 잠깐 의문이 들었으나, 눈앞의 리시안셔스는 자신의 감정에 아주 작은 의심도 없는 듯했다. 사실 그 의문에 대한 대답은 굳이 다른 곳에서 확인받을 필요가 없었다. 세레티도 리시안셔스의 얼굴을 모르면서 그를 사랑했으니 말이다.
“당장 뭘 어쩌자는 거 아니야. 너는 이해 못 하겠지만, 나는 네게서 받은 걸 돌려주는 것뿐이니까. 오늘은…….”
이름도 알려 주지 않고 얼굴도 보여 주지 않았다. 목소리조차 말을 하지 못한다고 거짓말까지 해 가며 숨겼다. 그런 존재를 사랑한다며 큰 희생을 치룬 리시안셔스가 세레티에게 한 부탁은 아주 작고 사소한 것이었다.
“돌아가서 너 자신을 마주 봐.”
“…….”
“내가 장담하건대, 넌 네 생각보다 괜찮은 존재일 거야.”
그저 ‘괜찮은 존재’를 바라보는 것치고 베일로 얼굴을 가린 세레티를 바라보는 그의 한쪽 눈은 지나치게 큰 애정을 담고 있었다.
“네가 스스로를 인정할 수 있게 되면, 그때 내게 너를 보여 줘.”
세상에서 가장 사소한 부탁이었지만 세레티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어려울 수밖에 없는 부탁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자신을 사랑한다 말하는 이의 희생은, 세레티에게 용기를 불어넣을 만한 계기가 되어줬다.
신전으로 돌아온 세레티는 베일을 쓴 채 거울 앞에 섰다.
“후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다가 또다시 깊게 숨을 들이마시었다. 지금까지 아무것도 안 보이던 채로 살던 세레티로서는 거울을 마주 보는 것조차 큰 용기가 필요했다.
‘리시안셔스가 내게 그랬어.’
나는 내 생각보다 괜찮은 사람일 거라고.
그러니까, 괜찮을 거야.
스륵, 베일이 떨어져 내렸다.
기껏 떨리는 손으로 베일을 내리고서도 눈을 질끈 감고 있던 세레티가 긴 망설임 끝에 마침내 눈을 떴다. 세레티는 거울 속 자신을 만져 보았다. 그러다가 나머지 한쪽 손으로 천천히 실제 자신의 얼굴도 만져 보았다.
뭐라고 해야 할까.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나쁘지 않은데.’
신전으로 돌아와 처음으로 베일 너머를 통해 다른 사람들의 얼굴을 봤다. 그들의 얼굴에 비해 자신의 외모가 그렇게까지 흉측한 거 같지는…….
『진짜 흉측하다.』
하지만 옆에서 들려 온 디에고의 목소리에 세레티는 어깨를 움츠릴 수밖에 없었다.
“다른 사람들보다 내 얼굴이 그렇게 못났어……?”
『그걸 몰라서 묻는다는 게 더 신기한데?』
“하지만 다른 사람들과 내 얼굴이 크게 차이 나는 거 같지는 않은데.”
『그걸 어떻게 알아? 넌 다른 인간들의 얼굴을 오늘 처음 본 거잖아.』
“그거야 그렇지만…….”
리시안셔스의 희생으로 세레티의 눈이 보인다는 사실에 디에고는 처음에는 놀랐으나 이내 그녀에게 잘된 일이라고 해 줬다. 하지만 세레티가 겨우 용기 내어 거울 앞에서 자신의 얼굴을 마주하자, 그는 혀를 차며 그녀의 얼굴을 외면했다.
『리시안셔스도 네 얼굴을 보면 실망할 거야.』
그건 세레티가 가장 무서워하는 결말이었다. 하지만 리시안셔스는 내가 얼굴을 보여 주고 이름을 말해 주길 기대하고 있을 거야.
내가 거울 속의 나를 보고 생각보다 괜찮은 모습에 자신감을 얻었을 거라고 생각했을 거야…….
하지만 예상대로 못난 내 모습을 마주했을 거라는 생각은 아예 안 하고 있겠지.
자신의 얼굴이 예상대로 추한 것은 괜찮았다. 어차피 예상하고 있었고, 괜한 희망을 품은 것부터가 어리석은 일이었으니.
다만, 리시안셔스의 실망이 걱정되었다. 아무것도 그에게 해 준 것이 없는데. 적어도 그를 실망시키고 싶지는 않았다.
바로 그때였다.
똑똑 - .
문 바깥쪽에서 누군가의 노크 소리가 들렸다.
“세레티, 안에 있니?”
다름 아닌 에리카였다. 세레티는 서둘러 베일로 얼굴을 가리려고 했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세레티……?”
늘 베일로 얼굴을 가리던 세레티가 얼굴을 드러낸 채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초점이 없어야 할 눈동자가 정확하게 에리카와 마주쳤다.
“에, 에리카…….”
그리고 세레티는 이날의 선택을 두고두고 후회했다. 아니, 비단 이날뿐만이 아니었다. 이날로부터 시작된 자신의 모든 어리석음을 후회했다.
시작은 자초지종을 설명한 뒤, 에리카를 자신이라 속이고 리시안셔스에게 보낸 것부터였다.
「내 얼굴이 그렇게 추해……? 리시안셔스가 정말 많이 실망할까?」
「괜찮을 거야, 세레티. 드래곤의 미적 기준은 인간과 다를 수도 있잖아.」
「하지만 그래도 리시안셔스도 내가 흉하게 생겼다고 생각하면 어떡해…….」
「그럼 그에게 끝까지 얼굴을 보여 주지 않을 생각이니?」
「그렇지만 리시안셔스는 내 얼굴을 보길 기대하고 있을 텐데……. 다른 의미로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
「가엾은 세레티, 내 자매. 어쩌면 내가 널 도울 수도 있을 거 같아.」
비록 리시안셔스에게 이미 목소리를 들려주기는 했으나 몇 마디 안 했으니, 에리카의 목소리와 크게 구별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실제로 세레티가 멀리서 지켜보기에, 리시안셔스는 베일을 쓰지 않은 자신인 척하는 에리카를 의심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다.
자신을 대하는 것처럼 다정했고, 부드러웠으며, 환하게 웃어 주고 있었다. 손을 잡아 주고 안아 주고, 무언가 다정한 말을 속삭여주는 듯했다.
기분이 이상했다.
무언가가 잘못된 거 같은데, 뭐가 잘못된 건지 알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