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드래곤이 인간과 특별한 관계를 맺는다는 건 당시에는 있을 수 없던 일이었다.
신의 뜻을 받들어 세상의 평화와 균형을 지키는 드래곤이었지만 가장 강한 종족이라는 우월감은 숨길 수 없었다. 그런 그들로서는 굳이 자신들보다 하등한 생명체를 사랑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그런데, 최초의 드래곤이자, 한참 후세대에 태어난 드래곤들에게는 아버지라 불리는 리시안셔스가 한낱 인간 여자와 어울려 지내다니.
뒤에서 온갖 말들이 나왔으나 정작 리시안셔스는 어떠한 말에도 개의치 않는 모습을 보였다.
다른 이들의 시선이 두려웠다면 처음부터 세레티를 가까이 두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세레티는 그 사실을 몰랐다.
“나는 네 이름도 모르고, 얼굴도 모르고.”
아름다운 것은 모두 인간이 만든 기준이었다.
모두 아름답게 태어난 드래곤인 리시안셔스의 입장에서 겉으로 보여지는 아름다움이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또한 아무리 말로 설명한다 하더라도 세레티는 받아들이지 못할 게 분명했다.
앞이 보이지 않는 불완전한 자신이 아름다울 리가 없다. 불완전한 만큼 추하고 흉하게 생겼을 것이다.
‘그러니 다른 사람들도 자신을 보며 수군거리겠지.’
그러나 리시안셔스의 생각은 달랐다.
“이제 그만 널 내게 보여 줘.”
그는 언제나 한결같은 부탁을 해 왔다. 그것도 하필이면 세레티가 절대로 들어줄 수 없는 부탁을.
싫다면 강요하지 않겠다던 리시안셔스는 어느 순간부터 무언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세레티에게 반복적인 부탁을 해 오고는 했다.
“나는 인간들과 달라. 네가 가진 외모가 어떻건, 나는 실망하지 않을 거야.”
가끔은 그 다정하고 간절한 목소리에 마음이 흔들릴 때도 있었다.
그래, 리시안셔스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라. 그는 드래곤이니까. 내가 아무리 추해도 실망하지 않을 거야. 하지만 그러다가도 덜컥, 겁이 나고는 했다.
말로는 누구나 달콤한 말을 속삭일 수 있다. 물론 지금의 저 말은 진심일 것이다.
‘정말로 지금은 내가 어떤 모습이든 실망하지 않을 자신이 있을 테지만…….’
막상 두 눈으로 직접 보게 된다면 생각이 달라질 게 분명하다. 경험해 보기 전과, 경험한 후의 마음가짐은 달라지기 마련이니 말이다.
「디에고, 넌 내 얼굴을 봤잖아.」
세레티는 또 같은 거절을 하기 미안해서, 애꿎은 깃펜만 세게 움켜잡았다.
「내 얼굴 어때……? 리시안셔스가 실망할까?」
세레티가 리시안셔스의 간절한 부탁에 흔들리던 마음을 다잡은 것은 디에고의 영향이 컸다. 디에고는 조심스러운 세레티의 질문에 한참을 대답이 없었다. 그러다 그는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이렇게 답했다.
「……그 얼굴을, 나 말고도 리시안셔스에게도 보여 주려고?」
그는 마치 재앙을 막으려는 것처럼 허둥대는 목소리로 이리 말했다.
「우리 같은 드래곤도 보는 눈이 있어! 인간들이 추하게 여기는 건 우리도 마찬가지라고. 리시안셔스라고 다를 거 같아? 내가 널 위해서 충고하는 건데, 절대로 리시안셔스에게 그 얼굴을 보여 주지 마. 나는 너와 똑같이 불완전한 존재니까 네 얼굴을 봐도 아무렇지 않은 거지만, 걔는 달라. 널 보고 실망할 거야!」
거의 악다구니를 지르듯이 만류하는 디에고의 반응을 겪고서야 세레티는 다시금 자신의 주제를 깨달았다.
안 되는 건, 안 되는 것이었다.
리시안셔스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
깃펜을 쥔 손에 떨림이 점점 심해질 때였다. 부드러운 온기가 손을 감쌌다.
“……미안해.”
잘못이 있다면 흉한 얼굴을 가진 자신의 잘못인데. 듣기 싫은 목소리를 가져서 말을 못 한다고 거짓말하고 있는 자신이 잘못한 건데. 이름조차도 알려 주지 않는 제 잘못인데도.
그런 자신을 몇 년째 끈기 있게 기다려 주는 리시안셔스는 아무 잘못이 없다. 그러나 언제나 사과를 하는 쪽은 그였다.
“……리…….”
리시안셔스는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어요.
그 말을 하고 싶었으나 차마 입 밖으로 목소리를 낼 수는 없어 다시 굳게 입을 다물었다.
“강요하지 않겠다 했는데…….”
“…….”
“나랑 만나는 거 이젠 싫지?”
세레티는 황급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와의 만남은 언제나 큰 기쁨이었다.
“나보다 이젠 디에고가 더 좋아?”
이건 정말로 큰 오해였다. 물론 디에고를 좋은 친구라고 생각하기는 했으나, 리시안셔스만큼 좋은 건 아니었다. 그 누구도 그만큼 좋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것이 자신의 반쪽이나 다름없는 에리카라고 해도 말이다.
세레티는 글자를 쓰는 대신 근처에 있는 꽃잎을 모아 글자를 만들었다.
‘리시안셔스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요.’
그 발언에 기분이 풀린 듯이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저 웃음소리는 세레티가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소리 중 하나였다.
“이렇게 하자.”
“…….”
“내가 너의 눈이 보이게 해 줄게.”
‘리시안이 어떻게요?’
“잊었어? 난 드래곤이잖아.”
그가 드래곤인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드래곤이라 하더라도 눈이 안 보이는 사람의 눈을 고쳐 줄 수 있다는 얘기는 처음 들었다.
그거야 이 세상에서 불완전함을 가지고 태어난 것은 자신뿐이니, 어찌 보면 당연한 걸 테지만….
“내가 너의 눈을 돌려줄게.”
‘돌려줘요?’
“음……. 이걸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그는 자세히 설명해 주지 않고 모호한 설명과 함께 웃었다.
“꿈을 꿨는데, 내가 네 덕분에 태어나는 꿈이었어.”
“…….”
“그러니까 내 눈은 네 것이나 다름없어.”
‘혹시 제 앞을 보게 하려면 리시안셔스가 무슨 희생을 치러야 하는 건 아니죠?’
세레티는 생각보다 눈치가 빠를 때가 있었다.
“그럴 리가.”
하지만 그런 만큼 단순하고 남의 말을 잘 믿기도 했다.
“내가 정말 널 많이 좋아하긴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무언가를 희생하는 건 나한테도 무서운 일이야.”
‘정말이죠?’
“그래. 그러니까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
무엇보다 누군가가 자신을 위해 큰 희생을 치를 거라는 기대나 믿음은 거의 전무했다.
세레티는 베일을 쓴 채 고개를 들어 자신의 캄캄한 세상을 비춰 주는 두 개의 빛을 바라봤다. 리시안셔스의 눈은 올곧게 자신을 감추고 있는 세레티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내 말대로만 하면 돼.”
“…….”
“우선, 눈을 감아.”
앞을 볼 수가 있다고?
부정적인 가능성을 생각하기에는 너무 달콤한 희망이었다. 무엇보다 그 말을 한 대상은 위대한 드래곤들 중에서도 가장 위대한 드래곤이며, 이제까지 제게 항상 진실되던 리시안셔스였다. 세레티는 기꺼이 저 말을 믿고 싶어졌다.
세레티가 눈을 감았다. 그리고 아주 오랫동안, 이상할 정도로 아무 소리가 나지 않았다. 기이할 정도의 침묵이었다. 무언가 이상해서 세레티가 다시 고개를 들려고 할 때, 한쪽 손이 그녀의 머리를 감싸 끌어안았다.
“괜찮아, 조금만 기다리면 돼…….”
이상하게 그 목소리는 묘하게 잠겨 있었으며, 자신을 안은 팔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세레티는 자신을 끌어안은 팔을 더듬거렸다. 그의 팔에는 축축한 땀이 묻어났다.
꼭, 엄청 큰 고통을 감내하는 사람처럼…….
그러나 세레티는 이내 자신의 생각이 말도 안 된다 여겼다.
‘그럴 리가 없잖아.’
아무리 리시안셔스가 제게 다정하다 해도 그가 자신을 위해서 큰 고통을 감내할 이유가 없었다. 자신은 그럴 가치가 없다. 리시안셔스도 무언가를 희생하는 건 무서운 일이라고 본인도 말하지 않았던가. 그 두려움을 이겨내고서 무언가를 잃어야 하는 희생을, 고작 자신을 위해 치를 리가 없었다.
“자-.”
심상치 않은 리시안셔스의 반응에 세레티가 혼란스러워 할 때였다.
무엇을 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그는 마침내 일을 끝냈는지 안고 있던 세레티의 몸을 풀어 줬다. 그리고는 베일 안으로 불쑥 손을 집어넣었다.
“아…!”
베일을 벗기려는 줄 알고 세레티가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젖히려 했지만, 리시안셔스가 평소의 그답지 않게 강한 힘으로 어깨를 붙잡았다. 그때 세레티의 눈에 베일 안쪽으로 올라오고 있는 금색 사탕 같은 것이 보였다. 리시안셔스의 눈처럼 밝게 빛나는 구슬이었다.
「내가 정말 널 많이 좋아하긴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무언가를 희생하는 건 나한테도 무서운 일이야.」
그제야 세레티는 깨달았다. 리시안셔스가 처음으로 제게 거짓말을 했다는 것을.
“리, 리시아, 읍……!”
말을 하면 안 된다는 것도 잊고 반사적으로 입을 열었을 때였다. 기회를 놓치지 않은 손이 입 안으로 구슬을 밀어 넣었다.
“으읍!”
그가 반강제적으로 세레티의 입을 막았다. 이제껏 단 한 번도 물리적인 힘은 물론 드래곤의 권능을 사용해서 자신을 압박한 적이 없던 그인데 말이다.
꿀꺽, 마침내 구슬이 삼켜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