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나는 분명히 널 좋아할 테니까.”
네가 어떤 행동을 하고, 어떤 성격을 가졌든.
분명히 난, 널 좋아할 거야.
왜냐하면, 지금도 네가 이렇게 좋은데 눈을 뜨고 나와 대화해 주는 널 더 좋아하지 않을 순 없을 거야.
비록 아직 눈을 뜨지 못해서 자신의 말에 대꾸 한번 해 주지도 못한 상태지만.
이렇게 부화를 기다리며 잠든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숨김없이 마음을 털어놓고, 깨어났을 때의 모습을 상상하고.
그런 나날이 매일같이 반복되자, 대화는커녕 눈도 마주친 적 없는데도 이 존재에게 마음을 주게 되었다.
신도 그런 세레티의 모습을 보고 이 세상의 유일한 인간인 세레티의 외로움을 눈치챘다.
신께서는 두 번째 인간을 만들었다. 두 번째 인간의 이름은 ‘에리카’였다.
세레티는 에리카를 진심으로 좋아했다. 차분하고 다정한 성격을 가진 에리카는 세레티에게 언제나 좋은 말벗이 되어 줬다.
그러나 잠들어 있는 드래곤을 향한 세레티의 기다림은 끝나지 않았다. 아직 깨어나지 못한 드래곤을 두고 두 번째 인간을 만든 것이 세레티의 불안함을 자극했다.
‘이러다가 저 드래곤을 영원히 포기하시면 어쩌지?’
불완전한 생명체라고 버리면 어떡해?
너무나 긴 기다림이었기에 세레티로서는 당연히 들 수밖에 없던 생각이었다. 그렇다고 감히 신께 드래곤을 완성시켜 달라 빌 수는 없었다. 이미 신께서는 에리카까지 탄생시킨 후가 아니던가.
결국 세레티는 묘안을 냈다.
자신이 신을 대신해 이 드래곤을 완성시키는 것이다.
너무나 건방지고 오만한 생각일 수도 있으나 세레티는 신이 가장 공들여 만든 존재였다. 아무런 대가 없이 신이 만들다 만 존재를 완성시킬 수는 없지만, 큰 대가를 치른다면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이다.
“걱정하지 마. 내가 널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해 줄게.”
신은 이 드래곤에게 세상을 볼 시야를 아직 주지 못했다고 했다. 세레티는 제 것을 줄 생각이었다.
어디든 갈 수 있는 두 다리도, 사랑하는 것들을 안고 만질 수 있는 두 팔도, 소통할 수 있는 입술도, 향기롭고 맛있는 냄새를 맡을 수 있는 코도,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두 눈도 중요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있어도 혼자면 무용지물이었다. 이제 세레티에게는 두 번째 인간이라는 친구가 생겨났으나, 긴 외로움을 지켜 준 이 친구도 중요했다.
물론 단 한 번도 자신을 본 적도, 재잘대는 말에 대답해 준 적도 없고 자신의 존재도 모르겠지만.
세레티는 이미 이 드래곤을 자신의 소중한 존재라 여기고 있었다.
“내 눈을 너에게 줄게.”
세레티는 투명한 알 속 곤히 잠들어 있는 드래곤과 이마를 맞대었다. 세상의 빛을 볼 수 있는 세레티의 시야가 드래곤에게로 넘어갔다.
이윽고 새카만 어둠이 찾아왔고, 세레티는 어둠 속에서 눈을 감은지도 모르고 쓰러졌다.
그러나 세레티가 간과한 사실이 있었다.
각오했다고 생각했지만 앞을 못 보게 된 것에 대한 대가는 생각보다 더욱 컸으며, 그 과정 또한 고통스러웠다.
세레티는 세상이 암전된 순간, 빛을 보던 이전의 기억을 잃어버렸다.
그 대신, 신은 외로움에 눈도 뜨지 못한 생명체에게 마음을 줘 버린 첫 번째 딸을 안타깝게 여겨 그녀에게 세상의 모든 것과 소통하고 부릴 수 있는 권능을 주었다. 시야를 잃은 세레티가 스스로를 보호할 힘을 갖게 하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한편 세레티가 기억을 잃기 전.
그녀가 간절히 바랐던, 검은 드래곤이 눈을 뜬 것은 쓰러졌던 세레티가 모든 기억을 잃은 채 암흑 속에서 눈을 떴을 때였다.
‘리시안셔스’라 이름 붙여진 드래곤은 홀로 눈을 뜨고 깨어났다. 신이 만든 아름다운 세상을 눈에 담은 드래곤은 의아함을 지우지 못했다.
의식 없이 잠들어 있던 때부터 자신을 깨우듯 옆에서 쉼 없이 떠들어 대던 맑은 미성을 기억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언제나 곁에서 떠들어 대던 그 목소리는 막상 눈을 뜨자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 시끄럽던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해 보고 싶었는데.’
깨어나지 못한 자신에게 왜 그렇게 말을 걸었는지, 궁금했는데.
리시안셔스는 세상에 적응해 가며 종종 그 목소리의 주인에 대해 생각하고는 했다. 그 목소리의 주인을 만나지 못한 것을 생각하면, 아쉬움이라는 감정이 뭔지도 깨닫지 못한 채로 아쉬움을 느끼고는 했다.
‘차라리 잘됐지.’
굉장히 귀찮을 거 같은 성격으로 예상되니 말이다. 그렇게 시끄럽고 성가신 존재는 딱 질색이었다.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드래곤은 성격이 확고한 편이었다.
그리고 긴 시간이 흐르며 리시안셔스의 머릿속에서도 자신이 태어나기 전에 말을 걸던 목소리에 대해서는 점차 사라져 갔다.
그들이 재회한 것은 그로부터 몇백 년이 지났을 때였다.
신의 손 아래 인류와 다양한 종족은 번성했다.
리시안셔스는 한 인간 여자에 대한 얘기를 오랫동안 들어왔다. 첫 번째 인간인 세레티에 대해서였다. 아름답고 친절하며 신의 사랑을 듬뿍 받아 드래곤들조차 질투한다는 인간 여자였다.
그 얘기를 듣고도 리시안셔스는 별생각이 없었다.
그러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인간이 만들어진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에, 자신이 태어났다. 그렇다면 알에 잠들어 있던 자신에게 시끄럽게 떠들어 댄 게 어쩌면, 아주 초창기에 태어난 인간들 중 한 명일지도 모른다고.
그리고 거기까지 추측해 냈을 때, 그제야 리시안셔스는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기억을 떠올렸다.
「네가 깨어나면 다시 소개할 테지만, 지금 미리 말해 줄게.」
잠들어 있던 제게 했던 그 말이.
「내 이름은 세레티야.」
세레티, 자신과 마찬가지로 첫 번째로 만들어졌다던 인간.
처음에는 관심을 끄려고 했다.
몇백 년이나 지났는데, 관심을 가질 만한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궁금하지 않다고도 생각했었다. 그러나 관심을 가질 만큼의 가치도 없고, 그다지 궁금하지도 않은 일에 대해서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 지 사흘째.
결국 리시안셔스는 첫 번째 인간이 머문다는 신전을 찾아오게 되었다.
“놀라게 할 생각은 없었어. 널 해칠 생각도 없고.”
그리고 그곳에서 사고인지, 자살인지 관심은 없지만 절벽 아래로 추락하려던 인간 여자를 구해 주게 되었다.
“궁금한 사람이 있어서 찾아왔어. 듣자 하니 여기엔 나와 똑같이 첫 번째로 만들어진…….”
리시안셔스는 세레티를 찾기 위해 어쩌다 구해 주게 된 인간 여자에게 그 존재가 어디에 있는지 물어보려 했다.
그러나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여자는 분홍색 꽃잎으로 허공에 문장을 적었다.
‘당신의 눈이 아름다워요.’
그 순간 어째서인지, 리시안셔스는 자신이 이곳까지 온 본래의 목적이 더는 중요하지 않게 여겨졌다.
아주 오래전에 목소리를 들은 게 전부인 여자보다는 지금 눈앞에 얼굴을 꽁꽁 가린 채 신의 권능을 휘두르는 존재에게 더 흥미가 가기 시작했다.
“누굴 만나도 너보다 재미있을 거 같진 않네.”
그게 이 인연의 시작이었다.
처음에는 흥미가 가서, 재미있어서, 만나 달라고 하니까.
그래서 만나게 된 건데, 만남이 지속될수록 리시안셔스는 세레티에게 속절없이 빠져들었다.
어떤 특별한 사건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같이 있는 시간이 생각보다 지루하지 않고 재미있었다. 세레티가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방법이 예뻤다. 그녀가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는 문장들은 다 사랑스러웠다.
그건 아마도 세레티의 내면이 아름다우니 그런 것이겠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늦은 뒤였다. 그녀를 대하는 자신의 행동과 생각들이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빠져나오기에는 늦은 뒤라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아, 내가 인간을 좋아하는구나.
내게 얼굴도 보여 주지 않고, 목소리도 들려주지 않는, 비밀투성이 인간 여자를.
그러나 목소리를 들려주지 않아도, 리시안셔스는 이미 그녀의 목소리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애써 아쉬움을 참을 수 있었다.
사랑에 빠졌다는 걸 인정한 순간 즈음부터, 리시안셔스는 한 치의 의심도 없이 그녀의 정체를 확신했다.
너였구나. 나를 깨우던 목소리가.
***
- 스위트피!
“아…….”
스위트피는 두 눈을 번쩍, 떴다.
그리고 자신의 손이 어느새 스위트피 꽃이 아니라 리시안셔스 꽃을 만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손을 떼어 냈다.
스위트피.
리시안셔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귀가 아닌 마음속으로 들리는 것이었다.
자신이 리시안셔스의 목소리를 애타게 부르면, 그에게 자신의 목소리가 전달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리시안……? 무슨 일이에요? 다, 다쳤어요?!”
아직 대화까지는 시도해 본 적이 없었다. 그저 이름만 불러도 금방 달려와 줬으니까.
더욱이 스위트피가 그를 애타게 찾는 경우는 있어도 그가 스위트피를 이렇게 마음으로 전달될 정도로 간절하게 찾은 적은 없었다.
아직 그 숲에 있구나.
아, 리시안셔스가 봤나보다. 자신이 절벽 안에 숨겨진 공간에 들어오는 것을.
“다친 곳은 없는 거죠?”
걱정되는 마음에 물어봤으나 이후 들려오는 목소리는 없었다.
내밀한 대화는 불가능한 것인지, 그만큼 현재의 리시안셔스가 긴급한 상황인지는 모르겠다.
‘나가 봐야 하나…….’
잠깐 그런 마음이 들긴 했으나 이내 마음을 다잡았다. 지금은 과거를 마저 보는 것이 우선이었다. 스위트피는 다시 꽃을 향해 손을 뻗었다. 이번에는 손이 움직여 꽃을 잘못 만지지 않도록 힘을 주어 스위트피꽃을 움켜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