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아무것도 보이지 않기 때문에 더욱 그런 걸 수도 있다. 세레티는 앞이 보이지 않아도 아무런 문제 없이 이곳을 다녔으니까.
분명히 처음 온 것인데도 익숙한 길을 쭉 걷자, 마침내 저 멀리 희미한 빛이 보였다. 긴 어둠 속에서 발견한 빛이라 더욱 눈부시고 환하게 느껴졌다. 어둠뿐이던 세상에서 리시안셔스의 두 눈을 볼 수 있던 세레티의 마음이 이것이었으리라.
눈부심을 이겨 낸 스위트피는 초록색 잔디를 밟을 수 있었다.
“와아…….”
저절로 입에서 감탄이 새어 나갔다. 바깥세상의 아름다움을 모두 모아 축약해 놓은 것처럼 화려한 장관이 펼쳐졌다. 그중 스위트피의 눈을 가장 사로잡는 것은 천장에서부터 내려온 나무줄기였다. 이것은 아마도 절벽 위에 솟아나 있던, 신전 옆의 나무뿌리일 것이다.
눈부신 신의 숲에 태양에서부터 뻗어 나온 뿌리에는 아름다운 꽃이 피어 있었다. 종류도 다르며 서식지도 다른, 공통점이라고는 없는 다양한 꽃들이 같은 나무의 줄기에서 피어나고 있는 것이었다.
그 꽃들은 누군가의 삶을 담아 놓은 것이었다.
마치 자신의 것인 것처럼 그들의 기억을 볼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들이 어떤 감정으로 세상을 바라보았는지 그 색채가 느껴졌다.
너무나 모호한 것이라 단순하게 설명하기는 어려웠지만, 세레티는 그렇게 꽃을 통해 누군가의 삶을 느끼고 그들의 삶을 상상하며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이 꽃에 어울리는, 사람들이 꽃에 얽힌 이야기를 듣고 타인의 삶을 이해하고 상상할 수 있도록.
그건 신이 시킨 일이 아니었다. 세레티가 스스로 한 일이었다.
어째서?
혼자서 의문을 제기하자마자 곧장 답을 알 수 있었다.
사람들이 자신과는 다른 타인을 이해해주기를 바랐으니까.
잘 지어낸 이야기를 통해 타인의 삶을 살아보고 그들을 이해해 보기를 바라서. 그리해서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인간들 중 유일하게 앞이 보이지 않는 자신 또한 사람들에게 이해받기를 원했으니까.
‘그렇다면 어째서 세레티만 눈이 보이지 않았을까?’
인간들이 서로 사랑하여 아이를 낳고 번성한 지금은 선천적으로, 혹은 기술이 발전한 세상에서 사고로, 장애를 갖게 되기도 한다. 그러나 신이 직접 생명을 창조하던 그 시기에는 세레티를 제외하면 장애를 가진 존재가 없었다.
그랬기에 세레티가 사람들에게 그토록 배척받은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어째서, 세레티만?
‘에리카……. 내 언니의 말대로일까?’
세상을 창조하고 나서 바로 그다음에 첫 번째 인간을 만들었기 때문에? 신의 힘이 다한 상태에서 무리해서 창조한 인간이라 불완전했던 거라고?
“알려주세요……!”
스위트피는 신이 자신의 목소리를 듣고 있을 거라 믿으며 그를 향해 외쳤다. 나무의 줄기가 다양한 꽃을 피워 내며 가지처럼 내려오고 있는 통로인 태양을 향해. 그러나 절벽 위와 연결되어 줄기가 내려오고 있는 태양은 아무런 응답도 해주지 않았다.
“제발 말씀해 주세요. 다 보여 주세요!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한 건 너무나도 많았다.
어째서 세레티는 자신을 닮은 것인지.
자신은 왜 세레티의 기억을 보는지.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 전쟁은 어떻게 해야 끝낼 수 있는지.
“듣고 계시잖아요!”
하지만 아무리 외쳐도 신은 응답하지 않았고, 스위트피는 점점 지쳐갔다.
‘다 틀렸어…….’
자신의 착각이었다. 이곳까지 오면 무언가를 얻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새로운 발견을 하기는 했으나 현 상황에는 아무짝에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눈부신 공간과는 상반되게 희망의 빛은 점점 꺼져 가고 있었다. 허무함에 다리에 힘이 풀린 스위트피는 그대로 주저앉았다.
‘겨우 여기까지 왔는데…….’
얻은 소득이 아무것도 없었다. 희망을 잃고 모든 기운이 떨어지자 다시 되돌아서 나갈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신의 숲에도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다면…….
이 대륙에서 얻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울어도 해결되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걸 알면서. 어린아이처럼 울고 싶은 기분이 되었다.
『…….』
“어……?”
입술을 앙다물고 울고 싶은 감정을 추스르고 있던 스위트피의 귀에 어떤 소리가 들려왔다.
바깥 소음인 거 같기도 하고, 누군가의 목소리 같기도 한 소리였다. 스위트피는 그 소리를 따라 하늘에서 내려와 있는 여러 줄기들을 살폈다. 그러던 중 저 멀리 떨어져 있는 줄기에 눈길이 사로잡혔다.
느려진 걸음으로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이건…….”
그 줄기에는 두 가지 종류의 꽃들이 서로 뒤엉켜 피어나 있었다. 하나는 제 이름과 똑같은 이름의 ‘스위트피’ 꽃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정말 오랜만에 보는 것인데도 절대 기억에서 지울 수 없던 꽃이었다.
“……리시안셔스.”
꽃의 이름을 가진 인간과 드래곤.
그들을 나타내는 꽃이 이곳, 신의 숲에서 피어나 있었다.
스위트피는 손을 뻗었다. 무의식적으로 리시안셔스를 만지려던 스위트피는 이내 제 이름과 똑같은 꽃을 만졌다. 왜인지 그것부터 확인해야 할 것 같았다.
그리고, 부드럽고 연약한 꽃잎을 만지는 순간.
스위트피는 다시 세레티가 되었다.
***
식물들은 땅에 뿌리를 내려 아름다운 자연을 이루었고, 그 속에서 자유롭게 뛰노는 짐승들이 태어났다. 그리고 신은 마지막으로 인간을 탄생시켰다.
세레티는 그렇게 태어난 존재였다.
에리카의 말은 틀렸다. 세레티는 신이 만든 창조물들 중 가장 완전하고 완벽했다.
신은 한동안 자신의 창조물이 흡족하여 아무것도 만들지 않았더랬다.
세레티는 자신을 사랑하는 신에게 불평을 할 수 없어 속내를 드러내지 않았지만, 사실 외로움에 메말라가고 있었다.
세레티는 완전하고 완벽했으나, 신처럼 모든 생명체하고 대화를 나누는 능력은 없었다.
그렇게 아주 긴 세월을 신의 사랑 하나에 기대어 외로움을 견뎠다.
그러나 모든 세상을 만들고 다듬어가던 신이 인간 하나에게 할애할 수 있는 시간은 많지 않았다. 세레티는 점점 혼자인 시간이 많아졌다.
그러던 어느 날, 드디어 신이 세레티 다음으로 두 번째 생명을 만들었다.
세레티와 같은 인간과 비슷하지만 명백히 인간은 아닌 존재였다.
“‘새’와 ‘뱀’을 합친 건가요? 아, ‘도마뱀’을 합친 건가……?”
신이 만든 모든 동물을 보았던 세레티가 진심으로 의문을 표하자, 신이 답했다.
나의 사자가 될 존재라고. 너와 이 세상을 지켜 주고, 평화와 중심을 잡아 주는 역할을 할 거라고.
그러나 모든 세상을 창조하고, 모든 생명체의 낙원이자 신의 왕국이 될 대륙에 공을 들이며, 많은 동물과 가장 완벽한 인간을 창조해 낸 신은 한계에 다다랐다.
창조물의 기준에서 창조주는 절대적이며 무한한 힘을 가진 존재이지만, 창조주에게도 힘의 한계란 있는 법이었다.
날개 달린 도마뱀을 닮은 거대한 존재는 투명한 알 속에서 몸을 웅크린 채 아주 오랫동안 깨어나지 않았다. 미완성인 생명체를 세상에 꺼낼 수 없어 신은 힘이 보충될 때까지 때를 기다렸다. 그리고 신이 힘을 보충하며 쉬는 기간은, 인간인 세레티에게는 너무나 긴 시간이었다.
그 시간 동안 신은 세레티조차 돌보지 않았으니 외로움은 점점 더 짙어져만 갔다.
“신께서 많이 힘드신가 봐. 요즘 날 찾아오지 않으셔.”
그런 세레티가 찾은 대화 상태는, 아직 알 속에 잠들어 있는 커다란 나무를 두 개 합친 듯한 크기의 드래곤이었다.
“지금의 너는 나와는 생김새가 정말 많이 다르지만, 나와 똑같은 모습으로 변할 수도 있대. 그리고 나와 대화가 통하는 상대일 거라 했어. 또 너는 불도 내뿜을 수 있고, 하늘도 날 수 있어. 아, 맞아. 첫 번째 드래곤이 될 테니까 특별한 능력을 더 선물해 준다고 하셨어.”
아주 가끔 찾아오며, 한참 드높은 상대인 신 말고 대화 상대가 될 수 있는 존재는 이 드래곤이 유일했다. 물론, 아직 깨어나기 전이지만.
세레티는 아주 오랫동안 이 존재가 깨어나길 바랐다. 그러나 기다림만 길어질 뿐, 이 커다란 새는 아직도 깨어나지 않았다.
“이 기분을 뭐라고 하는지 모르겠어. 여긴 너무 평화로운데……. 나는 늘 부족한 게 없는데도…….”
세레티는 아직은 잠들어 있는 드래곤에게 매일 찾아가 아침부터 밤까지 늘 조잘거리고는 했다.
“세상이 너무 고요한 것만 같아…….”
‘외롭다’는 표현을 알지 못하는 세레티는 자신의 외로움을 그렇게 표현했다.
“그러니까 어서 깨어나.”
드래곤이 깨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그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알지만, 감히 신을 탓하거나 재촉할 수는 없어 애꿎은 드래곤을 재촉했다.
“너와 나는 분명 좋은 친구가 될 거야.”
세레티는 확신에 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