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를 기억해 주세요-104화 (104/120)

<104화>

“아…….”

정신을 차렸을 때, 스위트피는 어느 한 계단 앞에 멈춰 서 있었다.

이유 없이 그냥 알 수 있었다. 익숙한 곳인 것처럼.

바로 이 앞에 문이 있다. 스위트피는 아주 미세하게 파여 있어 남들은 보지 못할 작은 틈을 발견하고 그곳을 쓸었다. 그러자 가파른 계단과 함께 땅이 진동하더니, 밤하늘보다 짙은 어둠이 눈앞에 펼쳐졌다.

이 어둠 속으로 걸어가면 신의 숲이 나온다.

“…….”

간절히 원하던 것을 발견했건만, 막상 문이 열리자 스위트피는 망설였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모든 과거를 다 보게 되는 게 나한테 좋은 일일까.’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본인조차 알 수 없었다. 다만 이제 와서 모든 것을 알게 되는 게 두려워졌다. 어쩌면 과거를 알게 되는 게 자신에게 그리 좋은 일은 아닐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위트피는 새까만 공간을 앞에 두고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한 채 얼어붙은 모습 그대로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러는 사이, 여섯의 드래곤 중 하나가 바닥으로 추락했다. 추락하는 드래곤이 자신들의 아군인지 적군인지, 자신의 리시안셔스인지 아닌지, 어두운 시야 탓에 확인이 불가능했다.

‘리시안은 아닐 거야.’

막연하게 그런 믿음이 들었다.

내 드래곤은 죽지 않을 거야.

그렇게 믿어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버틸 수가 없으니까.

하지만 만약 추락한 드래곤이 리시안셔스가 아니라 해도, 자신들과 동맹을 맺은 드래곤이라면, 그것도 큰 문제였다. 자신들이 불리한 상황이라는 걸 의미하니까. 그렇다면 더더욱 서둘러야 한다. 망설일 시간이 없었다.

‘이제 와서 뭘 망설이는 거야.’

스위트피는 자기 자신을 다그쳤다.

‘망설이는 건 나답지 않아.’

알기 두려운 진실이라 하더라도, 똑똑히 마주 볼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두렵다고 피하기만 하면 둘 중 한 가지의 길밖에 없었다. 상황이 더 나빠지거나, 그 상태 그대로 고여 있거나.

스위트피는 그 자리에 고여 있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결국 고여 있는 것도 잠시일 뿐이었다. 고여 있는 물은 점점 썩어가기 마련이고, 결국은 최악의 상황에 직면하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이제까지 늘 두려움을 감수하고 새로운 길을 걸어왔던 스위트피였다. 리시안셔스의 손을 잡고 그에게 매달렸던 선택이 특히 그러했다. 그리고 그때의 그 선택은 스위트피에게 있어서 인생 최고의 결정이었다.

지금 이 앞으로 걸어가는 게 최고의 선택이라고는 할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앞으로 나아가게 해 주는 길인 것만은 분명했다.

이번에도 용기는 두려움을 이겨냈다. 스위트피는 어둠 속으로 나아갔다.

드르륵-.

신이 가장 사랑한 소녀에게만 출입이 허락되던 문은 스위트피가 들어오자 두터운 문을 굳게 닫아 버렸다.

***

추락한 드래곤은 다름 아닌 아케르트였다.

전략보다는 단순하게 힘으로 들이박던 아케르트는 공격하던 상대가 아수라장인 틈에 동료인 칼루스의 뒤에 숨자 공격을 망설였고, 그 틈에 다른 적에게 날개를 뜯겨 아래로 떨어졌다.

드래곤이 날개를 다친 것은 정말 치명적인 문제였다. 재생력이 덜한 신체였고, 상처의 깊이에 따라서는 재생이 아예 불가능할 수도 있었다.

뜨거운 지상이야, 두꺼운 드래곤의 비늘로 견딜 수 있겠지만 다른 드래곤이 아래로 떨어진 아케르트를 쫓아 공격한다면 그녀는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다른 드래곤이 아케르트를 공격하기 위해 뒷모습을 보이며 하강하는 순간을 노린다면…….

적어도 적들 중 한 마리의 드래곤을 손쉽게 죽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자신의 공격에 아케르트가 휘말릴 가능성이 크지만, 그것까지야 어쩔 수 없는 문제 아닌가.

리시안셔스의 머릿속에 아주 잠깐 매정한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그 생각은 찰나였을 뿐이다.

리시안셔스는 누군가를 먼저 배신할 성향이 되지 못했다. 상대방이 배신의 기미를 조금이라도 보였다면 모를까, 먼저 손을 내밀고서 저버리는 비열한 짓은 하고 싶지 않았다.

아케르트와의 관계는 ‘배신’을 논할 만큼 친근한 사이도 아니었으며, 그녀가 죽어도 큰 슬픔은 느끼지 못할 테지만. 하지만 아주 약간의 안타까움 정도는 느낄 것 같았다.

아주 오래전을 마지막으로 리시안셔스는 그 누구에게도 먼저 마음을 주는 법이 없었고, 누군가가 제게 먼저 다가오도록 마음을 열어 준 적도 없었다.

그 긴 시간을 거쳐서 유일한 예외가 생겨나긴 했지만.

잠시 머릿속에 떠오른, 그 예외의 경우를 만든 누군가를 애써 지워 낸 리시안셔스는 아케르트를 공격하려는 드래곤의 꼬리를 물어 칼루스와 맞붙던 드래곤 쪽으로 날려 보냈다. 칼루스가 때를 놓치지 않고 리시안셔스로 인해 함께 날아가던 두 마리의 드래곤을 향해 불을 뿜었다.

한 마리의 드래곤은 불길을 정면으로 맞아 허우적거리며 아케르트처럼 아래로 하락했다. 우연찮게도 그 상대는 아케르트의 날개를 찢어 놓았던 그 드래곤이었다. 다른 드래곤은 꼬리에 불이 붙었으나 금방 꼬리를 거칠게 흔들며 불을 꺼 버렸다.

다행히 불리했던 상황은 다시 동등해졌다. 물론 디에고에게 ‘고린도’가 있는 한, 완벽히 동등한 상황이라고 보기는 힘들지만.

‘그런데 이상하군.’

자신의 고린도를 훔쳐서 이날 이제까지 잘만 이용하고 다니던 디에고가 아니던가. 그런데 디에고는 어째서인지 고린도를 사용하지 않았다.

‘그러고 보면 늘 저 녀석은 마지막 순간까지 가서야 고린도를 썼지.’

전투 중에 자신이 불리하거나 극한까지 가서야 고린도를 사용하고는 했다. 전부터 은연중에 의심하고 있는 부분이 있었다.

‘부작용.’

아주 오래전 그 가능성에 대해 깊게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적어도 겉보기에는 아주 오랜 시간 동안 디에고에게서 고린도로 인한 문제점을 본 적이 없었고, 자신에게서 빼앗아 간 고린도로 인한 부작용에 대한 생각은 잃어버린 것에 대한 집착으로 느껴지게 만들었다.

결국 리시안셔스는 일부러 그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기 시작했다. 어차피 자신에게는 잃어버린 것을 되찾아 올 만한 기운이나 의지도 없었으니까.

진짜로 되찾고 싶었던 건 이미 잃어버린 뒤였으니, 모든 의지는 부러지고 꺾여서 누군가와 대화하고 홀로 무언가를 생각할 기력조차도 없었다. 그러나 오늘, 리시안셔스는 다시 한번 그 가능성에 대해서 생각해야 했다.

고린도로 인한 부작용의 여부는 곧 이 싸움의 승패를 가를 수도 있는 중요한 요소이니 말이다.

『드래곤이라는 자들이 신에게 버림받아 더는 동족이 아닌 자의 명령이나 받들다니. 한심하군.』

리시안셔스는 대놓고 디에고를 도발했다.

『나에게 모든 것을 빼앗긴 주제에 말이 많군.』

역시나 디에고는, 리시안셔스의 도발에 어김없이 넘어왔다. 그가 가지고 있는 열등감은 그의 작은 도발 하나를 그냥 넘기지를 못했다.

『나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은 대가로, 넌 너의 정체성을 잃었지.』

드래곤으로 태어났으나 더는 드래곤이 아닌 자.

그게 디에고였다.

『너는 한 번도 완전한 드래곤이었던 적이 없어.』

『……닥쳐.』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실패작이지.』

한때는 다른 동족들에게 배척당하던 디에고를 유일하게 같은 드래곤으로 인정해 주던 옛 친우는 이제는 과거와 현재의 그를 모두 부정했다.

『리시안셔스.』

다른 드래곤과 전투 중이던 칼루스가 낮은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그대의 반려가…….』

스위트피가 언급되자마자 리시안셔스의 시선이 반사적으로 신전이 아닌, 신전으로 가는 계단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와 마주쳤던 곳과 가까운 곳에서, 스위트피는 바위산의 갈라진 틈새로 걸음을 내딛고 있었다.

‘신의 정원’을 향해.

리시안셔스의 시선을 디에고가 놓쳤을 리가 없었다. 스위트피를 발견한 디에고의 눈이 번뜩거렸다. 물론 디에고를 스위트피에게 보내 줄 리시안셔스도 아니었다.

두 마리의 드래곤은 서로를 향해 이빨을 드러낸 채 정면으로 맞부딪혔다. 그리고 잠시 뒤, 한 마리의 드래곤은 포효했으며, 또 다른 드래곤은 고통에 찬 울음소리를 내었다.

***

절벽 안쪽의 공간은 정말 어두웠다. 문이 닫히고 이곳에 꽤 오랫동안 있었던 것 같은데 희미한 빛도 보이지 않았고, 공간 속의 윤곽조차 잡히지 않았다. 그러나 스위트피는 꼼짝없이 어둠 속에 갇힌 신세인데도, 밖에서 망설이던 때처럼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다.

이 공간의 어둠마저도 익숙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이미 모든 것을 감당할 각오를 마쳤기 때문일 것이다.

스위트피는 굳이 세레티처럼 생각하려 노력하지 않았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정말 자신이 세레티가 된 것처럼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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