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방법이 있는 거죠?”
“……네?”
“전생의 신관이었는지 하는 여자의 기억을 본다면서요. 그 여자의 기억 속에 무언가 이 사태를 해결할 만한 열쇠가 있으니까 말을 꺼낸 거 아니에요?”
“아…….”
얘기가 그렇게 되나? 그냥, 신전의 내부를 왜 이렇게 잘 아냐고 물어보길래 사실대로 말한 것뿐인데…….
아무래도 샬롯은 희망을 가져 보고 싶은 모양이었다.
‘열쇠’라…….
이 위험한 상황을 벗어나게 해 줄 확실한 열쇠는 없었다. 하지만 ‘열쇠’ 대신에, 조각조각 난 그림을 맞춰 볼 수 있는 퍼즐 조각들은 가지고 있었다.
세레티의 기억이 바로 그 퍼즐 조각이었고, 그 속에서 스위트피가 맞춰 봐야 할 가장 큰 조각은 바로 절벽 속에 숨겨져 있을 또 다른 공간이었다. 만일 자신이 헛짚고 있는 것이라면 모두를 실망시키는 일일 테지만, 스위트피는 자꾸 그 절벽 속에 힌트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세레티는 인간들 중에서 유일하게 신과 소통이 가능했던 존재예요. 그런 세레티만이 유일하게 출입할 수 있었던 비밀스러운 공간이 있는데…….”
확신을 가지지 못하고 느릿하던 목소리가 점차 또렷해지고 빨라졌다.
“그 공간 속에 들어가고 나서의 일에 대해서는 아직 기억이 안 떠올라요. 하지만 저는 그 공간 속에 무언가가 있을 거라 생각해요.”
“그곳이 어딘데요?”
“바로 이 밑에 있는 공간인데……. 여기서는 못 내려가요. 신전 밖으로 나가서 지상과 연결된 계단을 내려가야 해요.”
“저희가 도와줄 일은요?”
스위트피는 고개를 저었다.
“마음만 고맙게 받을게요. 그런데 그 공간은 세레티만 들어갈 수 있던 공간이고, 일단은 밖으로 나가야 하기 때문에 두 분에게 위험할 거예요. 다른 드래곤이 습격하러 오면 피하기 힘들 테고요.”
샬롯은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저 혼자 가야 해요.”
세레티는 나무를 통해서 신과 소통하기도 했지만, 그 나무의 뿌리는 절벽의 땅속 깊은 곳까지 연결되어 있었다. 신과 더욱 내밀하고 깊은 소통이 필요할 때면 절벽 아래 숨겨진 공간으로 향하던 세레티였다. 그런 곳에 아무런 힌트가 없을 리 없다.
신이 만든 전쟁이니, 이 전쟁을 끝내려면 신의 흔적을 쫓아야 한다.
“괜찮겠어요?”
“걱정해줘서 고마워요, 샬롯.”
“그레이엄 양이라고 불러 줘요.”
“……우리 동료 아니었나요?”
“미안해요, 제 나름대로 친밀한 사이에 대한 기준이 있거든요. 대신 오늘 살아남게 된다면 그때 이름을 허락할게요.”
자신에게 먼저 믿음을 보여준 샬롯의 단호한 모습에 스위트피는 외려 웃음을 터트렸다. 그럴 상황도 아닐뿐더러, 다정한 말을 건네준 것도 아니었지만 오히려 이런 일상적으로 느껴지는 대화가 긴장감을 조금 풀어 주는 느낌이었다.
“자, 잠깐만요!”
그러나 모든 것이 언제나 순조롭게만 이뤄지는 것은 아니었댜. 사람이 세 명이나 모였는데 모두가 뜻이 같을 수는 없었다.
“정말 이런 말은 하기 싫었지만…….”
이 셋 중 유일한 남자인 콜린 핸슨은 가장 겁에 질린 얼굴로 불신을 드러냈다.
“저도 스위트피 씨를 믿고 싶어요! 근데, 그런데!”
“믿기 어렵다고요?”
“미안해요, 정말! 그런데 먼저 동맹을 제안한 것도 그쪽인데, 신전 내부를 잘 아는 것도 이상하고……. 근데 우리만 지하에 남겨 놓고 본인은 밖으로 나가겠다고요? 사실 탈출할 수 있는 길을 따로 알고 있는데 우리를 미끼 삼아서 본인만 빠져나가려는 거 아니에요?”
애써 상대를 의심하지 않으려 노력했던 콜린은 결국 밑바닥까지 숨겨 놓으려 했던 불신을 토해 냈다.
스위트피는 그런 콜린을 탓할 수 없었다. 그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의심이었다. 사실 스위트피도 저들을 믿으려고 노력하는 것이지, 의심 한 톨도 없이 완전히 믿는다고 하기는 힘들었다.
드래곤은 반려를 지키려면 다른 드래곤의 반려를 죽여 심장을 취해야 한다. 이 규칙이 신이 되기 위한 드래곤들의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었다.
다들 14일을 채우기까지 시간이 꽤 남아 있는 편이라고 했으나 그건 저들의 주장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같이 있어도 저들을 완전히 믿을 수는 없었다. 다행인 건 다른 반려의 심장을 취하는 건 같은 인간 반려가 아니라 ‘드래곤’이어야 한다는 점이었다.
적어도 이 자리에 저들의 반려인 드래곤은 없었고, 이 동맹을 주도하고 있는 것도 스위트피와 리시안셔스였다. 그러니까 자신이 보이는 불안함보다 저들이 내보이는 의심이 더 클 수밖에 없는 것도 당연히 이해는 갔다.
믿어 주려고 하는 샬롯 그레이엄이 고마운 거지, 콜린 핸슨을 탓하기는 어려웠다.
“핸슨 씨, 우리는 동맹을 맺었어요. 서로를 믿지 못한다면 이 동맹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요.”
“그, 그렇지만……!”
“그리고, 사실 저도 콜린 핸슨 씨 때문에 불안하다고요.”
“제, 제가 그레이엄 양에게 뭘 했다고 그래요?”
스위트피를 대신해서 콜린 핸슨에게 반박해 주는 것은 샬롯 그레이엄이었다.
“생각해 봐요, 핸슨 씨. 로렌 양이 나가고 나면 저와 핸슨 씨 둘만 남는 거잖아요.”
“……그게 왜요?”
“아무도 오지 않는 지하실에 건장한 남성과 둘만 남겨지는 건데, 전 얼마나 두렵고 무섭겠어요?”
“저는 그런 짐승 같은 놈이 아닙니다!”
“그건 핸슨 씨의 생각이죠.”
“일단 제가 당신을 건드린다면 아케르트가 저부터 죽일걸요? 당신의 드래곤인 칼루스님은 어떻고요?!”
“이 세상에 이해할 수 없는 짓을 하는 짐승 같은 놈들은 많아요. 핸슨 씨가 그런 미친놈이 아닐 거라 제가 어떻게 확신할 수 있겠어요.”
“저는 정말로 그런 놈이 아니라…….”
“하지만 그럼에도.”
샬롯은 억울해하는 콜린 핸슨의 말을 단호하게 자르며 자신의 얘기를 이어갔다.
“저는 당신을 믿을 거예요.”
“…….”
“로렌 양이 나가고 어두운 지하실에 아직 낯선 남자와 둘이서만 남겨지는 건 무섭지만, 당신이 제게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을 거라 믿어요, 콜린 핸슨 씨.”
까칠한 태도로 콜린 핸슨을 몰아붙이던 때와 달리 샬롯의 목소리는 다시 부드러움을 갖추고 있었다.
“왜냐하면 우리는 서로 힘을 합치기로 약속한 사이고, 믿음보다 의심이 앞서는 동맹은 아무런 위력을 갖지 못하기 때문이에요.”
겁에 질려 의심을 감추지 못하던 콜린 핸슨의 눈빛이 힘없이 아래로 떨어졌다.
“그러니 제가 콜린 핸슨 씨를 믿는 만큼, 핸슨 씨도 로렌 양을 믿어 주세요.”
“…….”
“서로 힘을 합친다는 건 그런 의미잖아요.”
그제야 콜린 핸슨이 한풀 꺾인 기세로 스위트피에게 우물쭈물하며 입을 열었다.
“제가 추태를 보였습니다. 죄송합니다…….”
“괘, 괜찮아요! 저라도 그런 생각이 들었을 거예요!”
자신을 향한 콜린 핸슨의 의심은 사실 그렇게 큰 상처도 아니었다. 충분히 이해하고 있는 바니까.
다만 예상치 못한 샬롯 그레이엄의 멋있는 모습에 스위트피는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역시 극한의 상황은 그 사람의 진짜 모습을 보여 주는 법이었다.
샬롯의 말대로 오늘 살아남고, 전쟁까지 끝내게 된다면 그녀와 좋은 친구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스위트피는 그들에게 믿어 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거듭하고는, 내려왔던 계단을 다시 올라가기 시작했다.
‘안전한 곳에서 나와 있는 모습을 보면 리시안이 화를 낼 텐데.’
자신 때문에 그의 집중력이 흐트러져 전투 중 다치면 어떡하지.
머릿속으로 별의별 걱정이 다 들었다. 그러나 두 다리를 멈출 수 없었다. 이번에는 꼭 절벽 안에 숨겨진 공간으로 들어가야 한다. ‘신의 숲’이라 불리는 공간에.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무슨 수로, 그곳을 찾지? 고작 한 번 본 남의 기억을 더듬어 위치를 찾기에는 숲의 문은 꼭꼭 숨겨져 있었고, 기억은 가물가물했다. 세레티처럼 행동하고 생각하려 노력했으나, 일부러 의식하고 한 노력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하나의 방법을 찾았다고 얻어지는 기대와 희망보다는 걱정과 두려움이 배로 앞섰다. 그러나 스위트피가 지상으로 올라와 입구를 지탱하는 기둥 앞에 섰을 때…….
“윽……!”
전투 중인 드래곤들의 날갯짓으로 인해 저 멀리에서부터 돌풍이 불어왔다. 기둥 뒤에 숨은 스위트피의 눈에 세 마리의 드래곤들이 서로 얽히고설킨 모습이 보였다.
이 어둑한 풍경, 금방이라도 자신의 몸이 날아갈 것처럼 거센 바람…….
오래된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가족들이 죽던 날을, 그리고…….
‘이 땅이 불바다가 되던 그 날처럼.’
스위트피의 눈이 아득해졌다. 자신이 어느 날의 어떤 풍경을 떠올리고 있는지도 모른 채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머릿속으로 기억이 떠오른다기보다는 본능이 어떠한 감각을 기억하고 있는 것처럼 익숙하게 여기고 있었다.
칠흑 같은 밤하늘, 신의 손길 아래 번성하던 대륙, 그 위에서 드래곤들의 거친 날갯짓과 거칠게 전투를 치르며 온 세상이 울리게 포효하던 소리까지…….
지금 이 순간 스위트피는 세레티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려 노력하지 않았다.
내가 나인 것을 인지하려 노력하고 행동하지 않는 것처럼 이 순간의 스위트피는 그저 세레티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