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신전 안에 지하실이 있을 거예요. 우린 최대한 신전 내부의 깊숙한 곳에 숨어 있는 편이 좋아요.”
“하지만 드래곤들이 절벽 위를 습격하면 우린 도망칠 곳도 없어요.”
“잊었어요, 샬롯? 바닥은 뜨거워서 신발도 녹아내린다고요. 우리끼리는 절벽 아래로 내려가서 도망칠 수 없어요. 그렇다고 전투 중인 드래곤들에게 우리를 태워 달라고 어리광을 부릴 수도 없잖아요.”
“…….”
“어쨌든 신전 안에 있는 게 가장 안전해요. 어쨌든 이곳은…….”
스위트피는 말을 하려다가 말았다. 정확히는 할 말이 더 있었으나, 갑자기 이다음에 하려던 말이 뭐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세레티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려고 했더니, 정말 자신이 세레티라도 된 듯한 기분이었다.
“어서 안으로 들어가요. 어서요!”
스위트피는 자신의 드래곤들을 바라보며 두려움과 걱정에 사로잡힌 샬롯과 콜린을 이끌고 신전 안으로 들어갔다
“다른 드래곤들의 눈에 띄지 않게 지하로 내려가야 해요!”
혹여 적들이 신전에 침입하더라도 최대한 눈에 띄지 않도록 가장 깊숙한 곳에 숨어 있어야만 했다.
고대에 존재하던 나라에 온 것도, 그 나라에 있던 신전에 들어온 것도 이번이 처음이건만. 스위트피는 마치 제집이라도 되는 것처럼 익숙하게 샬롯과 콜린을 안내했다. 마치 현재의 기억 속에는 없어도 무의식의 저편에 기억이 있기라도 한 것처럼.
‘예전에도 종종 이런 일이 있었던 거 같은데…….’
이 땅이 처음부터 모든 종족들이 어우러져 살던 낙원은 아니었다. 다양한 생명체들이 생겨나고 그 수가 불어나기 시작했을 때, 권력을 쥐고 영토를 늘리고 싶은 자들이 욕심을 부리기 시작했다. 분쟁의 소용돌이를 피해 다른 인간들을 피신시키기 위해 만든 것이 신전의 지하실이었다.
그러나 가장 최상위 생명체인 드래곤의 의무는 이 땅에 있는 생명체들의 화합과 평화를 지키는 일이었다. 결국 드래곤의 개입으로 전쟁은 멈추게 되었고, 수많은 피를 흘리고 나서야 모두가 화합을 이루며 살 수 있는 낙원이 되었다.
‘글쎄. 진짜 낙원이었다고 할 수 있을까.’
부모는 모든 자식을 공평하게 사랑할 수 있겠지만, 셀 수도 없이 많고 다양한 자신의 형제들을 공평하게 사랑하기란 힘든 일일 것이다.
심지어 형제라고도 할 수 없었다. 생김새도 특성도, 가지고 있는 힘의 차이와 본능도 너무나 달랐다. 그런 그들이 서로 어우러져 사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진심으로 이 화합을 유지하려는 자도 있겠지만 분명 누군가는 마음속에 전혀 다른 생각을 품을 수밖에 없을 테니.
‘그런데 내가 왜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
마치 그때 당시를 살아왔던 사람처럼.
고린도를 통해 리시안셔스와 디에고의 과거를 보게 된 순간을 기점으로 스위트피는 마치 자신이 세레티가 된 것처럼 생각하고 느끼고 있었다. 세레티의 기억 속에서 드래곤들은 봉인되어 있지도 않았고, 신이 이어 준 반려의 개념도 없었다.
드래곤과 인간이 서로 사랑을 할 일도 없었다. 그들은 평화를 수호하며 인간들을 지켜 줬으나 은연중에 인간을 아래로 보는 경향을 숨기지 못했으니까.
리시안셔스와 세레티의 경우가 특수한 예외였다.
스위트피는 단순하게 생각하면서 살고 싶었다. 힘든 시절은 많았지만 그때마다 견딜 수 있었던 건, 해결할 수 없는 일에 대해서는 일부러 단순하게 생각하며 긍정적인 생각으로 자신을 지탱했기 때문이었다. 비록 도망칠 길이 보이지 않는 희망 없는 곳이라 해도.
결국에는 그 길에 리시안셔스라는 자신의 희망을 만났으니까.
비록 리시안셔스를 만나고 목숨이 위험한 상황을 여러 번 겪긴 했으나, 그럼에도 스위트피는 밝게 웃을 수 있었다. 이번에는 견디기 위해서 노력한 게 아니라 절대적인 힘을 가진 존재를 향한 믿음으로 두려움에 지배당하지 않을 수 있었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안 된다. 긴장해야 했고, 머리가 아파도 계속 생각해야 했다.
‘사실 혼란스러워…….’
고린도의 힘이 지금 제게 영향을 끼치는 것도 아닌데.
어째서 세레티의 기억이 점점 짙어질까. 어째서 그녀처럼 생각하게 될까.
그것도 이 땅에 온 뒤로, 더욱…….
‘설마 정말로 내가…….’
먼 동양의 나라에서 전해지는 전생이니, 환생이니 하는 개념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동안 바보 같은 착각인 것 같아 그 가능성에 대해서는 생각해 보지 않으려 했지만…….
‘정말 세레티가…… 내가 아니라고 할 수 있어?’
설령 바보 같은 착각이라 할지라도, 자신이 세레티의 기억을 보고 그녀를 느낄 수 있다면. 지금은 자신을 그녀의 환생이라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그편이 이 상황에서 조금이나마 자신들에게 유리할 것 같았다.
“그런데, 로렌 양.”
뒤에서 샬롯 그레이엄이 의아함을 숨기지 않은 채 물었다.
“어떻게 이렇게 신전의 내부를 잘 아나요? 로렌 양도 이 신전은 물론이고, 섬도 처음일 텐데…….”
“그게…….”
진실을 말해야 할지, 고민이 되었다. 왜냐하면 리시안셔스에게도 비밀로 하고 있던 얘기였으니까. 그러나 서로 아슬아슬한 동맹을 유지하고 있는 지금, 저들의 눈에 자신을 향한 의심을 심어 둘 수는 없었다.
지하로 내려가며 스위트피는 리시안셔스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진실을 꺼냈다. 어느 날을 기점으로 아케르트가 말한 리시안셔스의 예전 연인의 시점을 보게 되었다고.
“아케르트의 입방정은 제가 대신 사과할게요. 단순하고 짓궂고 폭력적이지만 나쁜 드래곤은 아니에요.”
“으음……. 폭력적인데 나쁜 드래곤이 아니라고요?”
“……아마도요.”
차마 동맹을 맺은 드래곤의 뒷담화를 그 반려의 앞에서 할 수 없었던 스위트피는 이 얘기는 그만 넘어가기로 했다. 사실 누군가의 뒷담화를 할 만한 여유도 없었다.
신전의 깊숙한 지하실로 내려오자 바위로 이어진 돌벽과 중앙에 아주 낡은 촛대가 보였다. 스위트피는 별생각 없이 촛대 앞에 다가가 있지도 않은 촛불을 끄듯이 호, 숨을 불었다. 그러자, 외려 길쭉한 촛농 위에 작은 불이 피어올랐다.
그리고 그 작은 불은 환한 빛으로 어두운 지하를 비췄다.
이 모든 것이 의식하지 못한 채 나온 행동이었다.
탁, 탁-.
스위트피는 발로 바닥을 내리쳤다. 그러자 저 아래에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역시나 이 지하의 밑에는 또 다른 공간이 더 있었다. 그리고 신전의 계단을 통해서는 여기까지가 끝이었다. 이 밑에, 나무의 뿌리와 연결되어 있을 공간으로 가려면 역시 산의 가파른 계단을 내려가야 한다.
그리고 자신이 본 세레티의 기억대로 절벽과 이음새 하나 보이지 않고 꼭꼭 숨겨져 있는 문을 찾아야 한다.
“그런데요, 로렌 양. 아, 아니, 아가씨.”
“편하게 스위트피라고 부르세요.”
“네, 스위트피 씨. 그……. 이런 말 해서 미안한데요.”
콜린 핸슨은 미안함보다는 황당함과 난감함이 뒤섞인 얼굴로 스위트피를 보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솔직히 스위트피 씨의 말을 믿기 힘들어서요.”
솔직히 이런 반응이 나올지도 모른다는 건 스위트피도 예상하고 있던 바였다. 누가 들어도 황당한 얘기긴 했다.
“스위트피 씨가 거짓말을 한다는 건 아니에요. 그건 아닌데…….”
밖에서 한참 전투 중일 드래곤들과 적들의 습격을 피해 낯선 지하실에 숨은 이 상황 속에서 콜린 핸슨은 애써 두려움과 혼란을 잠재우며 자신이 하려는 말을 정리하며 꺼냈다.
“오래전에 살았던 사람의 기억을 본다는 게 말이 되는 일인가, 싶어서요. 저희도 모두 드래곤의 반려이지만, 저희는 그런 꿈이나 환각을 보지 않거든요.”
“…….”
“그러니까, 제가 하고 싶은 말은……. 그 기억에만 의존해도 되는 겁니까?”
콜린 핸슨은 이 위험한 상황 속에 확신을 얻고 싶은 듯했다. 그 기억에 의지해도 되는지, 당신을 믿어도 되는지도. 그리고 안타깝게도, 스위트피는 이 문제에 대해서 확답을 줄 수 없었다. 본인조차도 내내 의심을 품고 있었으니까.
대체 왜 자신이 세레티의 기억을 보는지. 이 기억을 처음부터 끝까지 믿어도 되는지.
“그러나 로렌 양 덕분에 신전의 지하실로 피신 올 수 있었던 건 사실이에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는 스위트피를 도와준 것은 샬롯 그레이엄이었다.
“그리고 안 믿으면 어쩔 거예요.”
우아하고 품위 있는 말투를 쓰던 샬롯이 까칠한 얼굴로 돌변했다.
“어쨌든 우리는 동맹을 맺었어요. 서로를 믿어야만 하고, 우리들의 드래곤이 승리하고 올지 지고 올지 알 수 없는 상황에……. 이곳에 숨은 채 아무것도 안 할 수는 없어요.”
극한의 상황에서도 마냥 우아해 보이기만 하던 샬롯의 본모습을 본 것 같았다. 샬롯 그레이엄은 콜린 핸슨보다 침착하지만 위기 상황에 기민하게 반응할 줄 알았고, 상대에게 믿음을 먼저 보여 줄 수 있는 용기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