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말도 안 되는 생각일 수도 있지만 그만큼 스위트피는 간절했고,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스위트피는 자신도 모르게 침실 구석에 있는 커튼이 쳐진 공간을 응시했다. 그리고 그곳으로 걸어가 문을 열자, 세레티가 평소 자주 입던 흰 사제복과 반투명한 베일이 보였다.
이건 꿈으로 꾸지도 않았는데 자신이 어째서 세레티의 옷이 있던 공간을 알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은 답을 알 수 없는 문제에 계속 골몰해 있을 때가 아니었다.
스위트피는 망설임 없이 사제복과 베일을 입었다.
그리고 침실을 나서려던 순간, 커다란 전신 거울을 마주한 스위트피는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세레티가 바로 눈앞에 서 있는 줄 알았네……..’
세레티의 사제복과 베일을 걸친 스위트피는 얼핏 보면 정말 세레티와 흡사해 보였다.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문을 연 스위트피는 망설임 없이 꿈속에처럼 신전 밖을 뛰쳐나가, 계단으로 향했다.
계단은 꿈에서 봤던 대로 경사졌으며, 아무도 관리를 하지 않아 바위틈으로 잡초가 솟아 있기도 했다. 스위트피는 벽을 더듬으며 아래로 내려갔다. 진짜 세레티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려면 눈을 아예 감고 움직여야 하겠지만, 그러기에는 이 경사진 계단은 너무 위험했다.
‘눈을 뜨고 내려가는 것도 위험한데, 눈을 감고 내려갈 수는 없지.’
대체 그 시대 때의 사제들은 어떻게 이 계단을 매번 오르고 내려왔을까. 잠깐만 한눈팔아도 아래로 구를 것 같은데…….
스위트피의 시선은 나선으로 된 계단의 옆을 향했다. 광활한 자연이 펼쳐져 있었다. 아름다웠지만 이 위험한 계단 위에서 보기에는 아찔한 광경이었다.
‘어디까지 내려가야 하지…….’
숨겨진 문은 절벽과 한 몸처럼 붙어 있어서 눈으로 찾기는 힘들었다.
‘어디까지 내려가야 문이 나오는지 모르겠어.’
벌써부터 약간의 후회가 스위트피를 찾아왔다.
바로 그때였다.
“아앗!”
계단 아래로 한 걸음 내디딘 순간, 길게 자라 늘어진 잡초를 밟고 만 것은.
안 그래도 붙잡을 곳 없고 경사진 계단 위에서, 치렁치렁한 사제복까지 입고 있던 스위트피가 앞으로 고꾸라지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읏……! 윽!”
계단 아래로 구르기 시작한 몸에 가속이 붙자 스위트피의 힘으로는 제 몸을 주체할 수 없었다. 길게 늘어지지 못한 비명은 짧게 끊겨 나왔다. 간신히 손톱으로 계단을 마구 긁으며 멈추려 노력한 결과, 스위트피는 계단 아래로 아예 추락하는 것까지는 막을 수 있었다.
“아파…….”
아이처럼 엉엉 울고 싶은 마음을 애써 추스른 스위트피가 쓰라린 무릎의 통증을 참으며 몸을 일으켰다.
이 와중에도 벗겨진 베일을 주워 다시 머리 위에 쓴 스위트피는 세레티가 앞이 보이지 않으면서 이런 계단을 오르내린 것에 대해서 새삼 경의를 표했다.
“그나저나 숨겨진 문은 대체 어디에 있는 거야…….”
딱 한 번 꾼 꿈에 의지해 숨겨진 장소를 찾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돌아갈까.’
잠시 그런 나약한 생각이 들었다.
바로 그때, 발밑에 거슬리는 느낌이 들어 살짝 고개를 내리자 절벽을 깎으면서 덜 다듬었는지 울퉁불퉁 튀어나온 구간이 있었다.
그 울퉁불퉁한 계단의 표면을 발로 긁던 스위트피가 자신도 모르게 멍하니 생각했다.
‘30칸 아래로…….’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생각이 난 대로 걸어가야 할 거 같았다.
‘내가 진짜 세레티가 되었다고 생각하자.’
세레티의 옷을 입은 것뿐만이 아니라, 진짜 세레티처럼 굴어야 해.
결심을 끝낸 스위트피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떨리는 손을 들어 벽을 짚었다.
그리고 천천히 숫자를 세며 밑으로 내려갔다.
한 칸, 두 칸, 세 칸…….
계단의 높낮이가 일정하지 않아서 눈을 감고 발을 아무리 내려도 아무것도 닿지 않고, 어지러워서 손을 허우적거리다가 넘어질 뻔한 적도 여러 번이었다. 하지만 스위트피는 마침내 30번째 칸에 내려오는 것에 성공했다.
“하아…….”
가쁜 숨을 내쉰 스위트피는 하마터면 눈을 뜰 뻔했으나, 다시 꾹 감고서 벽을 더듬었다.
‘세레티가 어떻게 문을 열었더라?’
스위트피가 기억하기로 세레티가 계단을 내려오자 절벽에 숨겨져 있던 문이 저절로 열렸었다. 마치 세레티를 알아보는 것처럼.
그럼 자신은 대체 어떻게 해야 이 문을 열 수 있단 말인가.
‘세레티였다면…….’
스위트피는 다시 세레티처럼 생각하기 위해 눈을 감았다. 그러나, 바로 그때였다.
저 멀리서 거센 돌풍이 불어왔다.
‘이 바람은…….’
익숙한 느낌이었다. 자신의 드래곤이 날아올 때는 언제나 이런 바람이 불어오고는 했으니까.
하지만 리시안셔스치고는 날갯짓이 너무 거친데.
리시안셔스는 언제나 제게 내려올 때는 앞이 보이지 않는 자신이 놀라지 않도록, 부드럽게 내려왔는데…….
“너…….”
인간화로 변한 듯한 리시안셔스의 목소리가 바로 코앞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리시안셔스의 목소리 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네가 왜 이곳에…….”
그는 마치 유령이라도 본 듯한 목소리였다.
세레티는 고개를 들었다. 베일 너머로 캄캄한 제 세상을 밝혀 주던 금안이 보였다. 먼저 손을 뻗은 이는 스위트피였다. 그 손을 가만히 지켜보던 리시안셔스가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그때, 다시 바람이 불어왔다.
드래곤이 서둘러 날아올 때도 벗겨지지 않았던 베일이 갑자기 확 벗겨졌다.
“…….”
베일이 날아가며 달빛이 감고 있는 눈꺼풀 사이로 스며들어 왔다. 그제야 스위트피는 눈을 떴다.
순간, 자신이 정말 세레티라도 된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하고 있었다. 앞이 보이지 않는 세레티처럼 계속 눈을 감았고, 리시안셔스의 빛나는 눈동자는 볼 수 있던 세레티처럼 눈을 감았음에도 리시안셔스의 슬픈 눈동자가 베일 너머로 보였다.
그리고 세레티가 아닌 지금의 자기 자신으로 돌아온 스위트피가 눈을 뜨고 가장 먼저 마주한 것은…….
“리, 리시안…….”
꿈에서 깨어난 것처럼 차게 굳은 리시안셔스의 얼굴이었다.
“지금 뭐 하는 짓이야.”
“…….”
“네가 그 옷은 왜 입고 있어.”
“리시안, 그게…….”
“그 옷은 어디서 난 거야.”
“지, 진정하고 제 얘기를 좀…….”
“오늘 하루 종일……!”
점점 목소리를 높이던 리시안셔스는 이내 손바닥에 얼굴을 파묻으며 깊게 숨을 내쉬었다.
“침실 안에 있길래 입어 봤어요. 다름이 아니라, 실은 제가…….”
애써 화를 삭이고는 있으나, 이렇게까지 화를 내는 리시안셔스의 모습은 처음이라 조금 무서웠다. 안 그래도 제게 화가 나서 밖에 나갔던 리시안셔스인데, 화를 풀어주기는커녕 두 배로 더 화나게 만들어 버렸다.
‘사실을 말해야겠어.’
자신이 왜 이러는 건지 리시안셔스에게 설명해야 할 거 같다. 그렇지 않으면 리시안셔스의 분노를 영영 풀어 주지 못할 것 같았다.
“실은, 제가……!”
스위트피가 황급히 이유를 설명하려고 입을 열었다.
휘이이이-
그러나 본격적으로 말을 꺼내기도 전에, 거센 돌풍이 스위트피를 덮쳐 왔다.
이번에도 익숙한 기시감이 들었다.
“드래곤이…….”
스위트피가 굳은 표정으로 천천히 바람이 불어온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저 멀리서 드래곤들이 날아오고 있었다.
한 마리가 아니라, 여러 마리의 드래곤들이.
적들의 침입을 눈치챈 건 스위트피뿐만이 아니었다.
“스윗.”
“네!”
“위로 올라가.”
“네, 네!”
어차피 아래로 내려가 봤자 뜨거운 땅 위를 혼자서 걸을 수도 없었다. 그러니 궁지에 몰린 신세가 된다고 하더라도 절벽 위에 있는 신전에 몸을 숨길 수밖에 없었다.
본체의 모습으로 돌아간 리시안셔스가 온 세상이 울리도록 거칠게 포효했다. 신전 안에 있는 다른 드래곤들을 깨우기 위해서였다.
스위트피는 계단을 올라가면서도 저 멀리 날아오는 드래곤들 중에서 한가운데에 있는 드래곤을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또 디에고의 짓이야.’
꿈속에서 과거의 디에고를 봤다. 그 당시 세레티와 디에고는 나름 가까운 사이였던 것 같지만, 그 관계가 지금까지 이어져 독이 된 것이다.
‘서둘러야 해!’
리시안셔스가 혼자서 드래곤들을 막기 위해 날아가는 사이, 그의 포효 소리를 들은 나머지 드래곤들도 신전 밖으로 나와 스위트피를 맞이했다.
“이게 무슨 일인가.”
“디에고가 다른 드래곤들을 데리고 왔어요!”
칼루스의 질문에 스위트피가 황급히 상황을 전했다. 그러나 이미 디에고가 날아오고 있는 방향을 확인한 칼루스는 더 말을 붙이지 않고 절벽 바깥쪽으로 뛰어가 본체의 모습으로 리시안셔스를 돕기 위해 날아갔다.
“아, 정말 난 평화주의자라서 싸우기 싫은데…….”
긴장이 되는지, 평소와 다르게 여유롭지 못한 표정의 아케르트가 콜린 핸슨의 어깨를 가볍게 툭 치고는 동족들을 도우러 날아갔다.
“우린 이제 어쩌면 좋죠?”
샬롯 그레이엄이 발을 동동 구르며 스위트피에게 물었다.